!@#… 며칠전 이런 트윗을 남겼던 바 있다:
‘안녕하십니까’로 시동이 걸린 관심의 불씨를 실제 화롯불로 키워내는 것은, 안녕하기 위해 필요하며 구호 차원을 넘어 제도적으로 성취 가능한 구체적인 요구의 도출, 그리고 그것의 제도적 실현 과정에 대한 지지의 조직화.(링크)
그런데 아무래도, 말미에 언급한 조직화라는 말이 워낙 어감이 거창한 관계로 약간의 오지랖성 보충설명. 이런 구조의 글들이 대충 그렇듯, 구플에 먼저 메모한 것 옮김.
기본적으로 ‘조직화’란, 어떤 집단에서 최소한 이 4가지 패턴이 발생했음을 말한다:
a)공동의 목표.
b)명시적 소속.
c)성원들에게 역할 부여.
d)지속성.
(*주: 평범한 고전적 테일러리즘 조직론을 살짝 설명 편의를 위해 단순화시키고 다듬은 것.)
당연하게도 조직화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고, 당장 일어나 정치정당을 만들어야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조직화와 그냥 순간적 동시발생의 회색 지대를 가르는 요인들이라면 위의 성격들을 반영하는 무언가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a1) 뚜렷하게 서술된 목표.
b1) 가입 과정의 존재, 성원 정체성의 부여.
c1) 구체적 행동강령. 역할 분업까지 이뤄지면 더욱더.
d1) 멤버십을 유지시키는 노력. (나름 불편한) 탈퇴 과정의 존재.
페북페이지에 ‘좋아요’ 누르는 것은 수천명이 모인다 한들 조직화가 아니다. 반면 명시적 활동목표를 놓고 가입자를 받아 어떤 논의를 하자고 메일링리스트를 만들어 계속 활동을 이어가는 것은 (낮은 수준에서나마) 엄연한 조직화다. 결연한 대자보 수십수백은 조직화가 아니라 그냥 집단 발생이다. 반면 대자보를 쓰는 이들이 아무리 느슨하게라도 지속적인 소속으로 뭉치고 집단으로서의 행동원리와 목표가 존재하면 조직화다. “정권 ㅅㅂㄹㅁ”를 십만명이 같은 게시판에서 되뇌인들, 조직화가 아니다. 모인 사람들에게 소속을 부여하고 행동강령이 공유되며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최종목표를 향한 지속적 활동으로 묶일 때 조직화다.
그게 왜 중요한가. 조직화를 할 때, 이런 특성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1)통일성과 협업을 통한, 목표의 강력한 추구: 목표와 소속과 역할이 있으니까.
2)일회성이 아닌, 지속적 목표 추구 활동: 즉 그런 활동이 지속된다.
3)안정적으로 현존하는 이해세력으로 자리매김: 실체가 뚜렷해져서, 정책 판단에 예측가능한 변인이 된다. 즉, ‘세력화’.
정치적 행동이라면 다른 어느 무엇보다도 3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를 움직이는 정치 과정에 있어서, 종속변인이 아닌 독립변인이 된다는 것이다. 특정 정치행위에 대한 ‘결과적 여론’에 머물지 않고, 애초에 행위를 정하는 과정의 참여자 내지 최소한 셈법에 포함시켜야할 고려대상이 되는 것이다. 행동목표와 원리가 일관되고 존재가 지속되는 현존하는 집단이 아니라 그냥 느슨한 ‘세대’니 ‘계층’이니 하는 그룹은, 정치 과정에서 주체들 가운데 하나로 나서기 힘들다. 하지만 세대나 계층을 바탕으로 조직화를 한다면, 조직의 견고함과 소속망의 크기만큼씩 활동력이 생겨난다. 안녕하지 못한 심경을 토로하는 것이 발휘하는 힘이 1이라면, 노조 가입률을 끌어올리는 것의 힘은 99다. 정치판 욕하는게 1이라면, 절반 이상쯤은 그래도 자신의 지향점과 비슷해보이는 정당에 가입하여 정치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의 힘은 99다.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이런거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불만이 백만명이라도 조직화해야 변화 동력.”
노통이 남긴 격언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에서 많은 이들이 ‘깨어있는’ 부분만 되뇌이곤 하는데(그러다가 도대체 무엇에 대해 깨어있어야 하는것인지 성찰하는 것을 잊어버리고는 단순히 누군가에게 쌍욕 날리는 것으로 스트레스만 푸는 지경에 빠지기도 하고), 무언가를 실현하는 것은 뒷부분의 ‘조직된’에서 나온다.
!@#…그런데 아래 만화의 프롤로그 에피소드만 읽으면 이런 설명 다 필요 없다.
송곳(최규석)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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