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좌’의 승리 -『본격2차세계대전만화』[기획회의 235호]

!@#… 한 호 분량 건너뛰고(직접 번역한 책 ‘만화의 창작‘에 대해서 도서리뷰를 하는 건 좀 이상하겠다 싶어서 234호는 대타로 다른 좋은 글을 게재했었음. 생각해보니 2004년 9월 처음 지면을 맡은 이래로 무려 첫 휴재였다!) 다시 재개한 지난 ‘기획회의’ 도서리뷰 원고. 뭐, 당연히 다룰 것이다 싶은 작품을 다뤘다.

 

‘본좌’의 승리 -『본격제2차세계대전만화』

김낙호(만화연구가)

오타쿠라는 용어를 동원하든 긱이라고 부르든, 어떤 분야에 대한 매니악하면서도 대중문화 친화적인 심취는 나름대로 강력한 팬덤을 형성한다. 특히 일부 소재는 그런 현상을 더욱 부추키는 경향이 있는데, 내용 측면에서는 인간사의 이야기 거리로 풍부하며, 몰입의 측면에서는 세밀하게 설정을 파고 들어갈 구석이 많고, 쿨함의 측면에서는 뭔가 매력적인 형상과 기능의 물건들이 가득한 경우가 그렇다. 그런 범주에 해당되는 인간 문명 속 소재라면 스타워즈든 건담이든 열광적 팬, 혹은 폐인들을 양성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소재를 하나 뽑으라면 큰 망설임 없이 많은 이들이 어떤 가상의 작품보다도 인류사의 어떤 순간, 바로 2차세계대전을 꼽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차세계대전이야말로 인간문명이 지금껏 탄생시킨 가장 화려하고 복잡하고 잔인한 삽질이니 말이다. 덤으로 각종 아이템들까지 가득하다. 그렇다면 이 소재에 심취한 이들이 여러 다른 대중문화의 매니악한 요소들을 섞는 향유방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나아가 그들에게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매체 가운데 하나인 웹만화의 형식으로 소통한다면 더욱 안성맞춤이다.

『본격제2차세계대전만화』(굽시니스트 / 애니북스 / 1권 출간중)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웹만화를 책으로 묶어낸 작품이다. 아니 큰 인기라는 표현은 뭔가 부족하고, 팬들이 “승리의 굽본좌”를 연호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본좌란 특정 분야에서 확실한 고수의 경지에 이르렀고 그 분야가 소위 인터넷 폐인들에게 확실하게 공감가는 코드일 때 붙여주는 일종의 극존칭으로, 굽본좌는 작가의 필명인 굽시니스트와 합쳐서 생겨낸 명칭이다. 게다가 원래 이 작품은 인터넷 연재를 할 때 포털사이트의 만화란을 거치지 않고, 사용자 커뮤니티인 디씨인사이드의 관련 게시판과 개인블로그에 연재되었다. 즉 이 책의 출간은 마치 프로야구팀에 곧바로 스카웃된 괴물급 고졸신인 같은 이미지까지 부여된 것이다. 작품은 큰 틀에서 2차세계대전의 역사적 순서를 따라가면서 주요 분기점적 사건을 각 화에서 하나씩 에피소드 방식으로 풀어내는데, 현재 출간된 1권은 히틀러의 등장부터 레닌그라드 전투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큰 틀의 역사적 흐름보다는 개별 사건에 집중하게 되는데, 내용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그 경과를 오타쿠 취향 대중문화 패러디를 활용해서 이면에 있는 복합적 관계들을 비유적으로 풀어내는 식이다. 또한 그것이 전체 2차대전의 맥락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짝 설명해준다.

이 작품의 장점은 명확하다. 인터넷 폐인들, 오타쿠 취향의 여러 대중문화 코드를 능수능란하게 패러디로 구현하여 딱딱하기 십상인 2차대전 이야기를 때로는 귀엽게, 때로는 처절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작품과 그 독자들 사이에 형성되는 동시대성, 동취향성은 최근 본 어떤 다른 작품들보다도 높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공감물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놓치지 않는 세부적 탐구와 인간사를 바라보는 의외로 따뜻한 시선이다. 특히 연재 당시의 온라인 버전에서 크게 내용이 보강된 1장 히틀러의 등장편이 이런 장점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미술학도에서 독재자가 된 그의 등극과정 속 여러 모티브들을 오늘날 오타쿠들의 행동패턴에 대입시키며 (코드를 이해하는 이들에게는) 명료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탁월한 이야기 구성이다. 하지만 더욱 매력적인 것은 그 안에 여러 가능한 역사적 설명들을 슬그머니 펼쳐놓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독자들과 대화를 하고, 히틀러가 그런 식으로 등극한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거리를 던지는 대목이다. 그 과정은 하나의 해답을 던지며 노골적인 훈계에 빠져있지 않고, 여러 서로 충돌하는 복합적 요인들을 넌지시 제시하고는 마치 그 상황의 독자 당신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어보는 듯한 입체감이 있다. 패러디를 하면서도 히틀러와 나치세력을 미화하지 않고, 동시에 히틀러를 뽑은 시민들을 우매한 악의 공범자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사람 사는 세상이 그리 쉽지 않고, 그 속에서 무언가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것에 대한 애착을 비춘다. 단지 패러디의 ‘덕력’(오타쿠적 취향의 깊이를 칭하는 은어)이 높은 것이라면 그냥 단타성 개그로 끝났겠지만, 이런 구심점이 있기에 작품으로서의 재미를 보장한다. 실제로 폴란드 기병대를 다룬 2장의 경우, 패러디에 의한 웃음보다는 그저 정직하게 자존심과 목숨을 걸었던 그들의 우직한 낭만과 인간의 전쟁에 동원되어 의미 없이 목숨을 잃은 군마들의 이야기를 섞어내며 진득한 감동을 준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여하튼 살아남은 사람들의 훈훈한 옛날 이야기의 전형성을 보여주는 듯 하다가 마지막 나레이션 한마디로 그것과 오늘날 세상을 연결짓는 12장의 레닌그라드 전투 역시 이 작품의 장점을 압축하고 있다.

웹만화에서 종이책으로서의 미디어 이식에는 많은 노력이 투여되었는데, 결과는 장단점이 있다. 우선 종이책으로서의 장점은 상당량의 원고 재작업이다. 원래 아마추어 연재였던 만큼, 팬층이 형성되기 이전의 초기 원고는 그림이나 연출의 품질은 물론 실제 내용면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부족한 측면이 많았다. 또한 연재 당시의 인터넷 유행 코드를 패러디에 집중 활용한 만큼, 그 코드를 이해할 소구대상층이 좁을 수 밖에 없었다. 작가와 출판사는 이점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단행본을 내면서는 그런 요소들을 집중적으로 보강했고, 그 결과 대다수의 에피소드들이 사실상 통째로 새로 만들어졌다. 나아가 그냥 사건을 맥락없이 던져주던 웹연재의 에피소드 방식 역시 보강하기 위해서 책은 챕터 사이에 패러디 내용 설명, 역사적 맥락 해설 등을 채워 넣었다. 웹만화의 종이출판에 있어서 성실한 노력으로 좋은 경력을 쌓아올린 애니북스 출판사로서도 이 정도의 성의는 새로운 경지로 보인다.

반면, 종이출판의 과정에서 작품의 몇몇 단점들이 더 드러나게 된 점도 있다. 새로 작화를 했지만, 기본적으로 아직은 다른 요소들로 작화의 미숙함을 완전히 덮을 수 있을 정도의 그림에 도달하지 못했다. 단지 미숙함이라기보다 그림체의 확고한 구심력이 부족한데, 웹만화의 저해상도가 아니라 종이의 높은 선명도로 오면서 더욱 아쉬움을 남긴다. 칸을 페이지 속에 더 작고 빼곡하게 재편집한다든지 하는 연출의 묘를 발휘해서 이런 단점을 약화시켰으면 좋았을 듯하다. 또한 전반부의 팽팽한 전개 밀도가, 후반에서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 사실상 전면 재작업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촘촘하게 이야기꺼리가 박혀있는 초반의 히틀러 탄생편과 단순히 패러디 자체에만 집중한 중반의 롬멜 북아프리카 전차전 이야기의 내용 품질은 천지차이다. 또한 에피소드로 볼 때는 재미있던 연재가, 책으로 모았을 때 전체 흐름의 맥락이 오히려 애매해진 경우도 있다. 에피소드들을 뽑아낸 패턴이나 에피소드들이 전체 전쟁을 설명해주는 맥락이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흐름을 좀 더 깔끔하게 시각화해서 주석 페이지에서 설명하는 등 좀 더 적극적으로 맥락을 만들어줬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이 작품은 『먼나라 이웃나라』마냥 모범 교과서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2권에서도 현재의 매력을 이어가고 약점들을 극복하면, 더욱 막강한 작품으로 완성될 것이다. 극적 전복의 매력, 이익관계의 교차, 전쟁의 허망함, 인류의 어리석음과 희망, 그 수많은 매력적 테마들은 2차대전의 후반에 더욱 뚜렷해지니까 말이다. 굽본좌의 승리가 끝까지 이어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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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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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제 2차 세계대전 만화 1권
굽시니스트 지음/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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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본좌’의 승리 -『본격2차세계대전만화』[기획회의 235호]

Comments


  1. 같은 전쟁사 모에물이라도 [헤타리아]는 치를 떨었는데 (게다가 일본 있을 당시 여성향계 대 히트라 애니화도 진행되고, 굿즈나 동인지나 차고 흘러넘쳐 안보이는 데가 없었음OTL…아무리 멋진 척, 귀여운 척 해도 니들은 오리지널 악의 축…이란 걸 짚고 넘어가기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모른 척 넘기지 말라고 크엉! <<그리고 동인녀로써의 자신의 넘사벽을 파악하다…) [본격 2차대전만화]는 재밌게 본 것은, 말씀하신대로 역시 냉철하고 본질을 놓지지 않으면서도 인간미를 간직한 작가의 관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역시 단행본화는 아쉬운 데가 더러 있었지만…칼라가 전부 안된 부분이라던가, 무리하게 패러디를 넣어서 매끄럽지 않은 진행이라던가, 웹상으로는 괜찮아 보였는데 종이로는 비어 보이는 칸 배치 등등. 그래도 아더왕과 클램프에 왠지 관용도가 UP되는 저란 놈은(…클램프는 좋아해서라기보단 클램프 류의 밀리터리/나치제복풍 간지가 눈 감고 있는 본질을 끄집어낸 듯하여…) 디씨파워도 있지만 출판사 홍보도 열심이었던 (한양문고의 현수막;이라던가) 사례로써도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2. 저번 기획회의에 낙호 님 글이 안 실려서 ‘또 만화 리뷰가 하나 사라지는 구나’라고 생각할 뻔 했습니다 (…)
    팝툰에 새롭게 연재 시작한 ‘만화에서 배우는 생존법’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3. !@#… 시바우치님/ 사실 재작업한 1,2화 만으로도 책의 가치는 충분하긴 하지만, 개선해야할 부분은 개선해야할 부분이죠. 그리고 이제 완연히 노하우가 축적된 출판사의 근성에도 박수를.

    Skyjet님/ 감사합니다. 생존법이라는 말이 다른 칼럼과 겹쳐서 뭔가 조정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합니다만;; 게다가 뭔가 글이 빼곡한 것이, 자료 도판을 좀 더 적극적으로 선정해야 할 듯도 합니다.

  4. 블로그 이사 기념 믹스업 한번 해보고 갑니다^^ 두호샘 책은 25일 피디에프판 교정지 돌릴 예정입니다.

  5. !@#… 박석환님/ 오, 티스토리에 새 둥지를 트셨군요. 접근성도 더 높아졌으니 앞으로도 더 재미있는 글 많이 올라오길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