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는 무사히 마무리 좀… 그리고 여세를 몰아 남자이야기 연재 재개 성사 내지 해와달 시즌2 같은 희소식도 나오면 좋겠지.
버티는 것의 강렬함 – 『남한산성』
김낙호(만화연구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싸움이 있다. 무언가를 무너트리기 위한 싸움, 그리고 이쪽을 무너트리려는 힘에 저항하며 버티는 싸움이 그것이다. 물론 많은 싸움은 그 두 가지 싸움들이 크고 작게 섞이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 구분은 전략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항상 유용하게 쓰이곤 한다.
그런데 흔히 공격하는 싸움이 방어하는 싸움보다 더 많은 병력을 필요로 한다고 하지만, 싸움의 과정에서 생기는 피해의 측면을 보자면 방어하는 쪽이 많은 경우 더 큰 손해를 입는다. 왜냐하면 그 방어를 위해서는 자신들의 생활과 터전을 고스란히 소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벽을 쌓는 것은 터전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그 중에서도 지형으로서의 벽인 산,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성을 쌓아 막는 산성은 최고의 위력을 발휘한다(하기야 한국의 현실정치에서 등장했던 ‘명박산성’의 경우도 그렇게 놀림을 받은 이유가 그 굳건함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산성은 그 자체로 무언가를 지키고 버텨내는 상징이며, 건축물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에서도 그 의미 그대로 존재할 수 있다. 압도적인 어려움을 만났을 때 자신들의 삶의 방식, 살아가는 명분, 혹은 생명 그 자체를 보전하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산성을 쌓는다. 왜 각자의 방식인가 하면, 침략 공격담은 하나의 명분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러 사연, 개별적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남한산성』(권가야/거북이북스/1권 발매중)은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제목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 조선후기의 어지러운 난국을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1권은 임진왜란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왕이나 장군의 시점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험난한 세상 속에서 여하튼 살아남고 버티는 각각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살아남아 왜인에게 능욕당하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는 아비의 칼질에도 살아남아 더욱 굳건하게 버티는 여인도 있고, 무익한 살생을 단신으로 막기 위해 똥물을 뒤집어 쓰는 스님도 있고, 구사일생 목숨을 부지하여 다시 전장으로 복귀하는 의병장도 있고, 백성들이 나서서 왜병들을 속임으로써 목숨을 지키는 마을의 큰 어르신도 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개별 에피소드라기보다 서로 엮여 있으며, 어느 하나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다른 것들을 희생하지 않는다. 아니, 버티고 살기 위해 각자 내뿜는 에너지가 워낙 강렬해서 어느 하나 눌릴만한 것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서 보인 성향을 되돌아보면,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작가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장편데뷔작이었던 『해와달』은 무협이라는 장르 속에 실존에 대한 고민을 녹여서 싸움의 의미, 혹은 무의미를 담아내는 독특함으로 한국만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 또한 『남자이야기』에서는 마찬가지로 무협을 가지고 왔지만 배경을 SF인 척 하는 현대물로 살짝 바꿔치기하고는 결국 한 단계 더 나아간 실존에 대한 고민,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지로 계속 싸우는 정서를 이야기했다. 다만 그의 작품들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장르적인 재미와 관념적 고민이 묘한 엇박자의 조화를 이루면서 만드는 강렬함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는데, 연쇄살인 스릴러물인 『푸른길』이나 계간만화를 통해 발표한 일련의 단편들에서는 특유의 강렬한 에너지가 사라져서 밋밋한 느낌을 자아낸 바 있다. 하지만 이번 『남한산성』에서는 다시 싸움 속에서 실존을 고민하는 본연의 방향성을 십분 살리고 있을뿐더러, 그의 장점인 비슷한 비중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각각 그리고 함께 벌이는 앙상블이 잘 살아나고 있다. 이전 작품들에서 보인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그래도 존재하련다”로 정제되어 있으며, 삶에 대한 의지로 어떻게든 버티려는 모습이 뿜어내는 강렬함은 새로운 수준에 도달했다. 이 작품을 탄생시키게 한 ‘경기도 기전문화원형 창작사업’ 같은 관 주도 지원 사업에서 흔히 기대할만한 엉성하고 형식적인 지역소개 관광홍보물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남한산성』은 각 캐릭터의 이야기에 대단히 많은 페이지 분량이나 설명을 할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성의 매력을 재미의 원천으로 잘 살려내고 있다. 이것은 전작 『남자이야기』에서 사실상 완성시킨 바 있는 요소를 더욱 숙성시킨 것인데, 바로 지독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마초성이다. 단순한 여성비하로서의 마초성이라는 민감한 차원을 멀리 뛰어넘어, 아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초적 가치로 질주하여 결국 두 손을 들어버리게 만드는 경지다. 곧 죽어도 ‘폼’을 살리고, 강렬하고 묵직하게 명분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처절하게 생의 의지도 불태우는 절제된 감성의 힘이다. 그나마 『남자이야기』에서는 그런 것을 발휘하기 위해서 많은 페이지와 연출, 수다스러운 개그로 분위기를 가볍게 하다가 비장하게 몰아치는 완급 같은 여러 장치들이 필요했지만, 『남한산성』은 초지일관 비장하고 농축적이다. 그리고 어떤 어이없을 상황이라도, 진지한 비장함으로 끝장을 본다. 부상 중에 한 여인의 간호로 살아 돌아온 민병대 장수와 부하가 나누는 대화가 좋은 예다. 부하가 묻는다. “전쟁의 와중에 어찌 그런 여인을…” 장수가 대답한다. “난… 여인을 품었던 것이 아니다. 조선을 품었던 것이다!” 그것도 보호해줘야 할 가련한 대상으로서의 조선이 아니라, 굳건하게 산성을 쌓아올리며 생명력으로 버티는 그런 조선으로 묘사를 하고 있을 정도니, 그 정서에 공감하고 말고를 떠나서 먼저 압도당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게다가 비장함은 단순히 국가에 대한 큰 충성 그런 것보다 자신이 세운 명분에 대한 신뢰, 각자의 생에 대한 의지로 귀결되기에 더욱 강하다.
『남한산성』은 표현적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지점이 많다. 그림 자체는 연필선과 컴퓨터를 활용한 흑백 농담 채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 동작선 등의 부가 효과를 제외함으로써 거칠면서도 정적인 느낌을 주는 효과가 있다. 반면 전투장면에서는 강렬한 구도의 데생으로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이미지가 되어준다. 화려한 묘사를 통한 결투의 과정은 절제되어 있으나, 싸움에 담긴 감정선은 올곧이 남겨놓는 압축적 연출을 구사하는 것이 가능해진 셈이다. 실제로 페이지 분량 대비 사건 전개는 대단히 빠르고, 그 와중에서도 사람들의 사연과 감정에 대한 전달력은 높다. 이는 기존의 한국 사극만화보다는 오히려 영미권의 그래픽노블에 가까운 전개 페이스로 보일 정도다. 이런 연출실험을 이 정도로 성공적으로 실행한 것만도 대단한 성과다.
물론 『남한산성』은 작가의 이전 무협장르 출세작들이 보여준 화려한 무협을 바라던 독자들에게는 성에 찰 수 없는 만화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주었던 굵직한 파격과 강렬한 비장함, 실존적 고민이 응축된 삶에의 의지 같은 주제에 매력을 느꼈던 독자들이라면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아직 첫 권만 나온 상태에서 완성된 작품이 결국 어떤 위치로 평가받게 될지 미리 점치는 것은 경솔한 일이지만, 만약 이 에너지 그대로 무사히 6권까지 완결된다면 작가의 작품세계에서도, 한국의 사극만화 장르에서도 커다란 족적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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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남한산성 1 권가야 지음/거북이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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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back by Nakho Kim
@Gobookibooks 짝짝짝 축하합니다~ :-) 말나온김에 이전에 1권 나왔을 당시 썼던 서평 재발굴 http://capcold.net/blog/2869 RT @Gobookibooks 오늘의 우리만화상 대상에 <남한산성>이 선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