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간지 [만화비평] 4호(2015)에 기고한 꼭지. 간만에 만화의 형식 요인에 대한 틀거리 몇 마디.
웹툰의 표현 양식, 오래된 약속에 관하여
김낙호(만화연구가)
웹툰이 인기몰이를 시작했지만 아직 오늘날만큼 완연한 주류로 자리매김하지는 않았던 십여년 전에, 필자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주최로 열린 ‘만화 온라인 모험기’라는 전시회의 기획 역할을 맡았던 바 있다. 당시에 급부상중이었던 매체의 매력을 온전히 알리기 위해 어떤 주안점을 뽑아야할지 고민 속에 세 가지 섹션으로 나누어 다양한 작품 사례들을 모았는데, 첫째는 종이와 스크린의 차이였다. 즉 온라인 만화작품만의 특성을 스크린이라는 속성에서 찾은 것이다. 둘째는 ‘페이지의 재발명’이라는 소제목 그대로, 페이지 넘김과 사각틀이 아니라 만화의 공간 구성을 새롭게 창조해 독특한 만화적 재미를 주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독자들이 직접 이야기를 구성하거나 아예 임의적인 이야기를 생성한다든지 하는 파격적인 실험성을 모아주었다. 어쩌다보니 모두 웹툰의 표현적 가능성에 주목한 셈이었다.
온라인에서 만화를 표현한다는 것은 기존 종이만화와 다른 방식의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고, 전시에서 사례로 끌어온 것은 해외 작품만큼이나 국내 작품도 많았다. 하지만 모든 산업화, 표준화, 주류화가 그렇듯, 이후 온라인 만화가 ‘웹툰’이라는 표어로 굳어간 과정이란 특정한 양태로 고정되고 파격의 경로는 낮아지는 흐름이기도 했다. 산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창작에 대한 보상, 즉 원고료를 제공하는 주체가 포털사이트 혹은 포털의 모습을 지향하는 만화서비스로 압축되어가며, 형식적 매력의 탐구보다는 해당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기본 페이지 형식이 중시되었다. 여러 갈래의 가능성 가운데, 종이 페이지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면 정적인 세로 스크롤이 사실상의 표준으로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대부분의 작품은 영화 콘티에 가까운 일방향적 나열을 선호하게 되었다.
물론 분명한 산업적 필요 위에서 창작자와 독자의 이해관계도 대략 맞아떨어진 현실 앞에서, 그런 형식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아쉬워할 이유는 별로 없다. 다만 그럴수록, 더욱 풍부한 연출과 절묘한 표현을 만들어내기 위해 아직 더 시도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다시 들춰볼 필요가 있을 따름이다. 이를 위해 웹툰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 속성들을 되짚고, 그런 것을 활용할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들을 점검하는 가장 뻔하고 기초적인 지형 탐사 작업이 어떨까 제안하고 싶다.
‘연속 그림’ 연출의 요소
만화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백가쟁명이 있었으나,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탁월하게 짚어낸 것은 아직도 윌 아이스너가 정리한 “연속예술”이라는 개념이라고 필자는 평가한다. 그림의 연속적 흐름을 통해서 이야기의 진행을 표현해내는 서사방식에 주목하는 것이다(물론 단칸으로 이뤄진 카툰을 만화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더 세부적 조건이 붙어야한다). 그런데 그림들을 나열함으로써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주무르는 방식, 즉 영화로 치자면 편집에 해당할 만한 요소들은 거칠게 보자면 누구나 동의할만한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바로 시야, 공간 흐름 및 분절이다.
먼저 시야는, 독자에게 어느 정도의 내용이 한 번에 눈에 들어오도록 의도되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종이출판 만화로 치자면 책을 펼쳤을 때 펴지는 두 페이지 한 가득에 해당되고, 벽화라면 대체로 벽 전체에 해당되는 시야의 전체 폭이다. 한 번에 보여주는 정보량을 통제하는 것은 시각적 연출의 기본이기에, 개별 칸 안에 담는 내용 너머 칸들이 합쳐져서 만들어내는 시야 단위의 조형 또한 만화의 중요한 표현요소가 된다.
공간 흐름이란, 제시된 시야 안에서 서사의 진행을 위해 각 그림들이 어떤 방향과 속도로 흘러가도록 유도되는가를 지칭한다. 종이 페이지에서 가장 흔한 것은 소위 Z자 읽기로, 한 단을 가로로 읽어내고 그 밑에 배치된 다음 세로 단의 가로 방향 앞부분에서부터 다시 읽어내는 방식이다. 물론 그 안에서 칸을 뚫고 나오는 ‘스플래시’ 배치, 사실상의 표지판 기능을 배치하여 방향을 투르기 등 크고작은 기법으로 흐름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진행 방향뿐만 아니라 속도에도 이런 패턴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이 작용하여, 예를 들어 가로 칸이 기본인 전개에서 세로 칸이 나올 때 오래 탐색하며 머물게 만들기도 한다. 짧게 머물며 사건만 파악하고 넘어가게 하거나, 길게 머물며 그 안에 담긴 정서를 조금 더 소화하게 하는 차이들이 가능하다.
분절은 다음 시야 단위로 넘기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종이출판 만화의 경우는 종이 페이지가 자동적으로 그것을 제공한다. 페이지의 한도가 끝나고, 손으로 종이를 넘기는 것 말이다. 분절은 읽는 호흡의 조절이자, 다음 시야 단위로 가기 전의 추가적 소화를 촉진한다. 나아가 전환 과정에서 독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다.
웹에서 구현하기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만, 웹툰이 종이출판 만화와 다르게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은 이런 연속그림 연출의 요소에 담겨있다. 한편으로는 발달한 인쇄기술, 다른 한편으로는 포화점에 도달한 스크린 해상도와 그래픽 처리능력을 볼 때, 종이와 스크린에서 만화를 보는 것의 차이는 더 이상 개별 그림에서 갈라지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시야, 공간 흐름, 분절 모든 요인에 있어서 웹툰은 종이보다 기본적인 자유도가 원래는 높다. 개별 서비스 플랫폼의 제약을 잠시 논외로 두고, 기술적으로 가능한 표현의 폭 말이다.
첫째로 시야, 즉 한 번에 보여주는 시각 정보의 단위는 창의 크기에 달려있다. 스콧 맥클라우드가 ‘무한캔버스’라고 칭한 디지털만화의 표현구조가 좋은 개념화인데, 칸들이 배치된 캔버스는 무한한 크기로 펼쳐질 수 있는데 다만 작가가 그 중 일부를 독자에게 창으로 틀지어서 제시한다는 것이다. 창의 크기를 자유롭게 지정함으로써 작가는 정보량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높아진 자유도에는 까다로운 부대효과가 따르는데, 창의 크기를 반드시 작가가 의도한 대로 관철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문제다. 종이페이지라면, 독자는 작가가 의도한대로 두 페이지를 시야에 넣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화면에서 창의 크기는, 강제로 고정하지 않는 한 개별 사용자들이 키우고 줄이며, 각자가 보는 화면의 뷰포트에 따라서 표시되는 영역이 다르다. 즉 시야에 대한 통제를 작가가 오히려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데미지 오버 타임](선우훈/미디어다음)은 픽셀이 큰 고전 게임 화면의 문법을 통해서 군대와 좀비의 이야기를 펼치는 방식인데, 가로 화면에서 한 칸이 한 화면으로 표시되는 시야에서 가장 적절하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연재공간에서도 그것을 감상하는 수많은 세로 화면 모바일 기기에서도 그런 배려는 주어지지 않아서, 세로로 주루룩 나열된 일반적 세로스크롤의 모습으로 시야를 채우곤 한다.
둘째로 공간 흐름은, 배열의 방향이 사실은 세로 일변도일 필요가 없다는 점을 되짚어야 한다. 물론 일반적인 웹페이지의 흐름이 그렇기에 가장 주류적이지만, 서사의 필요성에 따라서 방향을 자유롭게 가다듬는 것이 원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서부극 [총알은 신경쓰지 마] (스튜 웹디자인)의 사례처럼 파노라마식 화면이 계속 흘러가는 것이 서사의 기본일 때는 가로 스크롤이 효과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최적화 문제가 특히 강하게 개입되는데, 많은 화면들이 가로 기준으로 시야를 정하고 있어서 흐름 또한 그에 맞추어야 하는 상황이 많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의 4칸시사만화 [장도리](박순찬)는 신문에는 가로로 배열되고, 온라인에서는 세로로 배열되는 사례다.
셋째로 분절은, 넘김의 방식을 흔한 세로 스크롤 화면 밀어냄에 의존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주목해야 한다. 세로 스크롤 화면 밀어냄이 가장 적절한 서사연출도 있지만,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대안이 가능하다. [스페이스킹](박수용/네이버)은 온갖 외계 문명을 통해 사회적 탐구를 하는 작품인데, 그러다보니 스케일 큰 우주 액션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칸 단위 분절 넘김의 방향을 연출의 일부로 사용하여 액션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우주선의 빔의 방향에 따라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위쪽 공격측을 보여주기 위해 위쪽방향으로 다음 칸의 전환이 이뤄지며 독특한 동세를 만들어내는 것이 예다. 또는 [xkcd](랜덜 먼로)의 한 에피소드인 ‘클릭앤드랙‘에서처럼 아예 무한해보일 정도로 큰 공간 안에서 그저 독자가 하염없이 그림을 드래깅하며 탐험을 나서는 방식의 분절도 있다. 이렇듯, 인터페이스와 전환 방식은 무궁무진하다.
확장된 시도들
시야, 흐름, 분절이라는 기초적 메타 칸 문법 너머, 온라인이기에 시도할 수 있는 여러 다른 연출 기법도 물론 있는데, 바로 멀티미디어, 인터페이스 효과, 정보연결 등 정지 화상 너머의 표현요소들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워낙 이질적 신선함을 부각시키기 때문에, 한 때는(사실은 지금도 상당히) 전면에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남용되면 만화의 표현적 매력을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방해하는 기믹으로 전락할 위험이 높기에 신중하게 활용해야할 부분이다. 움직임이 있으면, 소리가 나면 중요한 서사 정보가 더해지는 것이 과연 있는가.
가장 흔하게 떠오르는 것은 바로 멀티미디어, 즉 동적 이미지와 소리다. 특히 반복되는 움직임을 구현하는 AniGIF(소위 ‘움짤’의 기본 형식이다) 기술을 웹툰에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GIF를 단순히 무언가가 살아 움직인다는 효과로 쓰는 것은, 순간적 강조의 효과에 있어서 탁월하지만 기본적으로 다음 칸으로 시선이 원활하게 넘어가지 않아서 산만해진다는 부작용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야기의 필요에 적절하게 사용한 사례 한 가지로 [우리집 토요타는 환상적이었다](Boulet)이 있는데, 어릴적 부모님 자동차 뒷자리에서 바라보던 모습들이 느리고 무한하게 반복되는 듯한 기억의 풍경을 묘사하기에 gif의 반복효과가 적격이다.
좀 더 본격적인 기법은, 인터페이스 효과다. 좋은 사례가 바로 [옥수역 귀신](호랑/ 네이버)인데, 갑자기 귀신이 튀어나오는 류의 호러물이다. 특정 지점에 도달하면 일반적으로 독자가 전적으로 쥐고 있는 화면 넘김의 통제권을 갑자기 박탈하여 기괴한 소리와 움직이는 화면 효과로 충격을 극대화한다.
웹의 가장 근본적인 기능인 부가정보의 연결을 활용할 수도 있다. [원전회의록](경향신문)은 원자력 발전의 여러 이슈들을 풀어내는 만화형 보도인데, 동물들이 회의를 하며 의제를 제기하는 옆에 세부적 관련 내용들을 펼쳐볼 수 있다. 서사적 재미를 노렸다면 크게 방해되는 방식이지만, 교육적 재미를 노리는 것인 만큼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연출이다.
서비스 종속성의 문제
앞서 언급했듯, 무한하지는 않더라도 대단히 자유도가 높은 기술적 가능성은 플랫폼의 허용치로 인해 제약된다. 고료를 주는 포털서비스에서 가로스크롤을 허용하지 않으면, 가로스크롤을 쓸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플랫폼에서 기술을 제공하여 특수한 연출을 해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최근 네이버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고고고](하일권/네이버)는 웹디자인 기술에서 발달시킨 각종 특수효과들을 만화의 서사 안에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탁월한 사례다. 세로 스크롤 문법에서 움직이면서, 커다란 공간 소개 장면에 패럴랙스 스크롤링으로 깊이감을 부여하고, 특정 대목에 도달하면 칸 안에서 움직임이나 부분 전환 효과로 상황의 생동감을 더하고, 심지어 모바일기기로 보면 총쏘는 장면에서 갑자기 진동이 울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우려와 연결되는데, 바로 연출이 특정 서비스에 종속되는 것이다. 특정 서비스의 전용 저작툴로 만들어졌는데 구현 라이브러리가 공개형이 아니거나 기타 이유로 다른 곳에 백업해놓고 공개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 기업이 서비스를 그만두면 작품이 그냥 사라져버린다. 원래의 출판사가 없어져도 복간 재간이 가능한, 즉 서비스 종속성이 낮은 종이만화와 차이가 있다. 한 때 삼성에서 큰 마케팅 노력을 기울인 소위 ‘탭툰’ 작품들은 지금은 ‘404에러’의 대상일 뿐이다.
즉 창작자는 자신의 웹툰에 들어가는 높은 수준의 특수한 연출 효과에 대해서, 이런 종속성에 대한 고려도 동시에 해야하는 난관이 추가된다. 하지만 마치 조각가가 신소재 플라스틱으로 조각을 효과적으로 해내려면 그 소재를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하듯, 영화감독이 3D 특수효과를 하려면 신기술을 익혀야 하듯, 만화 작가 역시 웹툰의 표현적 가능성을 한껏 펼치고 싶다면 피할 수 없는 고충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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