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에 나왔던 훌륭한 히어로물 [캐셔로] 단행본의 책내 서평. 요즘은 책내 서평 넣는 만화책이 꽤 줄어든 느낌인데, 마치 한창때 씨디 음악평의 운명과 비슷해지는 듯.
사람이 사람을 돕는 이유
김낙호(만화연구가)
슈퍼히어로 이야기는 옛날의 그리스신화든 오늘의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든, 결국 두 가지 요소를 얼마나 잘 풀어내는가에서 그 훌륭함이 결정된다. 하나는 “슈퍼”, 즉 주인공이 지닌 보통 인간과 다른 초월적 능력의 속성이다. 번개를 난사하든 하늘을 날든 손목에서 끈끈이가 나가든, 어떤 기발한 능력과 한계 속에서 히어로가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지 그 상상력이 바로 재미다. 하지만 더 중요한 다른 하나의 요소는 “히어로”, 즉 어디에 그 대단한 능력을 사용하는가다. 초월적 능력에 걸맞는 초월적 역할을 해내는가의 문제인데, 이것은 그저 가장 거대한 명분을 추구해야 좋다는 말이 아니다. 당대에 가장 동경하는 환상을, 가장 와닿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관건이다. 그렇기에 슈퍼히어로는 가장 환상적인 장르이면서도 오히려 당대 현실의 맥락과 가장 떼놓고 생각하기 어려울 때 훌륭해진다. 지금 여기에 필요한 히어로를 꿈꾸게 만드는 것, 다시 말해 우리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의 갈등을 넌즈시 직면하고, 그 안에서 거대한 갑갑함을 신기한 능력으로 어떻게든 돌파해내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일찌감치 [캐셔로]를 “올해 최고의 슈퍼히어로물”로 꼽으며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이 작품이 바로 지금 여기의 슈퍼히어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우선 캐셔로에 등장하는 초능력은, 그야말로 지금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확장해낸 것 그 자체다. 상웅과 민현 등이 지닌 이 작품의 대표 초능력은, 바로 현찰을 몸에 지니면 괴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한편 수오의 능력은 술을 마시면 괴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권청년 의명이 지닌 능력은 좋아하는 사람을 열렬히 좋아할수록 괴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런 기승전괴력 대잔치의 근간에는, 돈이 좀 있어야 힘나고 술이라도 마셔야 용감해지고 누구를 좋아하니까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 현실에 가장 뼈아픈 제한사항들이 자동으로 함께 붙어나온다. 가족 자본력으로 뒷받침되지 않은 그저그런 대다수 청년세대는, 큰 현찰을 쥘 일이 별로 없다. 술은 현실에서는 일종의 파괴적 도피와 구분이 가지 않아서, 솟아나는 용기와 함께 맨 정신이 흔들린다. 좋아하는 마음은 안정적이지도 않고 무엇보다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을 나는 외계인, 엄청난 자본과 과학력의 천재, 돌연변이 거미의 은총 같은 한참 먼 상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상상이다. 풍부하고 공정한 유머감각과 연작 4칸만화 특유의 여운으로 만들어내는 캐릭터간 궁합을 매개로, 이런 능력들이 단순한 설정놀음이 아닌 자연스러운 생활형 재미로 전달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외계인으로부터, 초능력 악당으로부터, 수상한 비밀기관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영웅적 행위들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상웅과 상안 남매는 그저 한 달 가계부 수지타산 맞추며 빈곤한 일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다. 큰 돈을 만져볼 일이 없기 때문에 현찰로 괴력이 생기는 능력을 깨닫지도 못했을 정도다. 수오는 술먹고 행패부리는 아버지가 있는 가정 때문에 고단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만큼씩 주변에 생긴 문제를 내버려두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화재 현장에 몰래 들어가 사람을 구조하는 것 같은 전형적인 영웅행위도 있다. 하지만 데이트하던 여성의 손을 잡아채는 남자를 혼내주는 훨씬 평범한 끔찍함에 대한 도움도 있고, 창에서 뛰어내릴 듯 우울해 보이는 사람을 매일 지켜봐주는 배려, 고공농성중인 노동자들에게 핫팩을 넌즈시 전달해주는 연대도 있다. 다시 말해 누군가 겪는 일상의 폭력에 대해 대처를 돕고, 배려가 필요한 이에게 말을 건네고, 싸울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싸움을 비웃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은 거대한 멸망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곳이 되기 위해 서로에게 늘 해줘야하지만 대체로 팽개쳐놓는 어떤 가치들을, 힘이 더 닿는 만큼 더 실현하는 것이다. 그냥 지나쳤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넘어갔을 상황에 대해서, 그저 자신이 어떤 애매한 능력이 있다는 자각 때문에 결국 개입하는 긍정적 의미의 오지랖이다. 즉 이들은 초월적 수호자들이 아닌, 좀 더 나은 사회인들로서의 영웅이다. 심지어 실제로 큰 재해에 마주하게 되는 대목에서조차, 능력자들 모두가 힘을 합쳐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들의 심리와 매스미디어의 속성과 자신들간의 역할 분배를 합쳐넣은, 지극히 사회적인 작전으로 풀어나간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슈퍼히어로 모험의 공간은 일상과 분리되어있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의 본질을 되묻는다. 주인공들은 힘을 발휘해서 영웅행위를 하는 만큼씩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며 좀 더 생활에 불편함을 겪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내린 결론은 명확하다.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만큼은 돕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고귀한 박애정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사는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 가장 근본적으로는 간직해야할 소박한 존엄이다. 공명심이나 물질적 욕심이 없어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내 코가 석 자라고 해도 당장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뭘 안 할 수가 없었”기에 한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 어떤 누군가의 그저 그런 문제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해도 신경이 쓰이면 일방향적으로 돕고야 마는, 사회에 대한 “짝사랑”이다. 이런 자세를 우리는 판타지의 영역 바깥에서도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의 시간과 돈과 노동을 쪼개서 더 많은 인권을, 더 평등한 권리를, 구성원들의 억울함이 덜한 사회를 위해 운동하고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자발적 개인과 조직이라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렇게 슈퍼히어로의 탁월한 오락적 상상력은 현실도피성 재미나 대리만족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지금 여기의 현실, 바로 함께 사는 사회를 우리 자신들의 존엄을 통해서 만들어가는 과제와 하나가 된다.
[캐셔로]가 이번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축하스럽기 이전에 다행스러운 일이다. 더 많은 독자들에게 선보일 기회가 온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모아놓고 보는 것이 더 완성도가 낫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들로 물갈이하고 여러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했던 2부 분량 초반은 연재로 분절되어 진행될 때에는 4칸만화의 서사적 여백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구석이 많았는데, 모아서 볼 때에는 결국 후반에서 다시 이야기가 합쳐지고 복선이 겹겹이 회수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가장 온전한 버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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