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의(지금도 꽤 흡수되어 남아있지만) 담론적 지뢰밭을 통과하기 위해, 건조함을 더욱 배가시킨 글. 즉 어느 쪽에서도 다들 서운해할 글…이지만 내가 뭐 원래 그렇다. 게재본은 여기로.
언론과 시민의 기묘한 대립각을 해결하기
김낙호(미디어연구가)
온라인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느슨하고 빠른 집결을 해서 무언가에 열광하고 무언가를 공격하는 것은 지극히 익숙한 일이다. 또한 합당한 경우든 아니든, 언론이 제 역할을 안 했다고 시민들에게 비판받는 것도 일상적이다. 그럼에도 최근 개혁 성향의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일부 열성적 지지자들과 은근슬쩍 ‘한경오’로 통칭되게 된 진보성향 언론 사이에 발생한 대립각은 기묘했다. 인사와 정책에 대한 열띤 논쟁이 아니라 얼굴 사진 구도나 경칭의 정도 같은 다분히 소모적인 소재가 촉발점이고, 전개 과정 역시 건조한 봉합이 아니라 감정적 격화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읽어내고 무엇을 지향해야할 것인가.
사회적으로 격화되는 상황은, 늘 여러 가지 에러가 하필이면 결합하면서 벌어지곤 한다. 이번 경우에도 최소한 세 가지 문제가 겹치는데, 그 중 첫째는 언론사와 언론인의 소셜미디어 사용방식의 문제다. 보도 내용이 아니라 보도에 묻어나는 자세에 대한 불만이라는 것은 어차피 주관적이고, 아무리 감정이 크게 결집되었다고 한들 언론의 정보 및 토론 기능에 있어서는 비본질적인 반응이다. 언론으로서는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후속 제시하여 건조하게 봉합하는 것이 정석이다. 물론 개별 언론인은 사적 개인이기도 하기에,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감정이 격양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이 아니라 언론이라는 공적 역할로서 받아들여지는 소통 통로에서는 그냥 언론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소셜미디어는 개별 사용자가 사적 개인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적 공간이 결코 아니다. 신분의 맥락이 드러나 있는 이들이 불특정 다수에게 말을 공개하는 곳이 어떻게 사적일 수 있겠는가. ‘친구공개’라는 용어로 개별 서비스업체가 사적인 느낌을 유도한다고 해도 대부분은 마찬가지다. 사적 개인은 다른 사적 개인에게 화를 낼 수 있고, 그에 대해 사적 후속대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인이 독자에게 “덤벼라 문빠들”을 날리는 것은 공적 관계에서의 논쟁을 시작하는 것이고, 공적 파장을 감수해야 한다. 언론인이 소셜미디어에서 공식지면의 틀보다 더 분방한 ‘형식’으로 소통하는 것은 권장할 바지만, 공식지면에서는 던지지 않기로 선택했을 ‘내용’이라면 소셜미디어에서도 금해야 한다.
둘째는 좀 더 오랜 사회적 과제인, 단순화한 정치 서사의 문제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자신의 좁은 전문적 관심사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정치 현실을 그럴듯한 큰 서사로 인식하도록 되어있다. 우리가 사안에 비유적 틀을 쓴다는 레이코프의 프레임론이나, 이야기 구조로 인식하려 한다는 피셔의 내러티브 이론이나, 스스로의 앎의 수준을 착각하며 실제로는 많은 것을 외부 확인에 의존한다는 최근 페른백 등의 인지 연구가 밝혀낸 바가 그런 방향이다.
물론 이 글을 굳이 여기까지 읽고 계신 분들이야 개별적 사실관계를 신경 쓰며 이성적 비판을 선호하시겠지만, 세상에는 열정적으로 무턱대고 한걸레니 미디어오물이니 멸칭을 뱉으며 절독과 폐간을 외치고, 기자 개개인에게 전화를 걸어 욕하고 위협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의 격함은, 그만큼 선명하게 단순화한 정치 서사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한경오는 가난한 조중동, 몽둥이가 답이다”라는 공격성의 이면에는, 한경오가 참여정부를 반대하여 성공을 가로막았고,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를 불렀으며, 그 계승인 문재인 정부도 싫어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당하지 않겠다는 명료한 서사가 있다. 하지만 기록을 되돌아보면 한경오라는 묶음이 실제로 가능한지조차 회의적일 정도로 각 언론사의 역할은 더 다층적이었고, 무엇보다 정부와 일관된 진영의식으로 연결되기보다는 사안별로 입장이 갈렸다. 모든 이념 스펙트럼의 언론사들이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등을 돌렸던 그 악명 높은 뇌물수사 국면만 하더라도 “굿바이 노무현” 운운하며 지금까지 분노를 사고 있는 기사들이 실제로 담은 것은, 노무현이라는 구심점 없이 범 개혁/진보 진영이 다시 회복할 길을 진단하는 내용이었다.
셋째 문제는 언론의 사회적 역할을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어 싸우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시민들의 바람은 물론이고, 언론인들조차 그런 정의감으로 움직일 때가 적지 않다. 물론 언론이 사회적 지향점에 대한 비전을 지니는 것은 필요하고, 공공의 선을 추구하며 묻혀버린 약자들의 목소리를 발굴해내는 것이 당연한 책무지만, 언론이 충족시켜줘야 하는 기능은 사회운동 단체와 다르다.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을 정교하게 관찰하고 제대로 굴러가는지 감시하여, 우리가 뭘 제대로 파악한 상태에서 시민적 참여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도록 돕는 것이다. ‘사안’을 정보로서 밝혀내고 시민들에게 소통해내는 역할이다. 오히려 진영에 복무하고자 정보의 냉엄함과 이성적 전달이 부실해지는 것을 감수한다면, 그것이 바로 언론의 부실이다.
언론과 열광적 시민의 역기능적인 대립각을 앞으로 줄여나가려면, 언론역할이라는 과제 해결 중심의 접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언론은 정보를 소통해내지 못하면 제 역할을 못함을 인식하고, 엘리트 전위부대가 외부에서 견인하는 듯한 대화법을 버려야한다. 그 대신, 같은 사회의 대등한 시민인데 그 중 정보에 특화된 이가 하는 권유로 서술의 틀을 잡아내야 한다.
한편 모든 시민들은 “우리 편 언론”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게도 어떤 대중에게도 불편하더라도 논의가 필요한 담론들을 끄집어내주는 독립적 언론 환경이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이렇게 표현하니 복잡한 과제처럼 들린다면, 그것은 복잡한 과제가 맞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많은 노력이 있었고, 성과도 아쉬움도 많았다. 시민 일반이 누구나 주인이 되는 언론을 만들면 해결될까. 그렇게 한겨레가 탄생했다. 전문성을 보장받도록, 기자들이 주인인 언론을 만들면 어떨까. 98년 이후 경향신문은 우리사주제가 되었고 개혁성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것이 문제니까, 시민 일반이 누구나 기자가 되는 언론을 만들면 어떨까. 오마이뉴스의 캐치프레이즈를 기억해본다.
우선 첫 걸음은, 제도화된 언론에 대한 포괄적 냉소를 깨고 전문적 역할을 인정하는 것이다. 문 정권의 일 잘함에 대한 열광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막연하게 까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정규직화 방식의 세부 수립에서 나오는 갈등 요인을 드러내며 해결 과제를 끄집어내 효과적으로 공론에 붙이는 것은, 좋은 언론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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