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적 통제의 역설, 80년대 만화잡지와 아기공룡 둘리 [월간 그래픽노블 26]

월간 그래픽노블 26호 아기공룡 둘리 특집에서 한 꼭지, ‘한국만화사 속 둘리’ 파트.

 

후진적 통제의 역설, 80년대 만화잡지와 [아기공룡 둘리]
김낙호(만화연구가)

어떤 대중문화양식이 사회적 동네북이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양식의 확고한 성장 때문에 벌어지곤 한다. 무시할 수 없는 대중적 인기나 산업적 기반이 쌓여서 떠오르고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 굳이 기성도덕에 대한 해악으로 낙인을 찍어봤자 재미를 볼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양식 전체를 묶어 성장을 응원하는 동시에 불량을 논하는 이중적 상황이 반복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해당 분야를 말아먹는 꽤 확실한 길이지만, 그런 갈등이 정반대로 새로운 발전을 앞당기는 특수한 경우도 있으니, 바로 80년대의 한국 잡지 만화가 그렇다.

잘 알려져 있듯 80년대는 신군부 독재정권의 정치적 엄혹함, 그리고 그들이 반대급부로 던져놓은 대중문화 부흥으로 시작했다. 그 와중에 만화 분야는 대본소의 부흥을 이끈 장편 성인 극화, 만화 잡지를 통해 전면적으로 주류문화화한 아동/청소년 만화의 두 가지 방식으로 새로운 힘을 과시했다. 그런데 대본소가 인기 속에서도 여전히 일종의 하위문화로 기능하고 특히 성인극화가 주종을 이루게 되면서 더욱 청소년 관람불가의 불건전한(?)이미지를 부여받았던 것과 달리, 만화 잡지는 일종의 건전한 주류 교양 오락으로서 시민권을 얻기 시작했다.

사실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교양지식을 주는 잡지라는 면목 하에 기사 사이에 만화를 연재하여 인기를 구가하는 접근법은 이미 70년대에 세워진 공식이었기에, 어깨동무, 소년중앙, 새소년 등의 월간잡지가 모험만화, 스포츠물, 그리고 특히 명랑만화의 대중적 보급처, 즉 웬만한 가정의 거실에도 만화가 놓이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1982년 창간된 보물섬은 만화로 잡지 전체를 채우고 교양 기사는 양념 수준에 머무는 당대 기준으로서는 상당한 파격적 방식을 채택했다. 결과는 큰 대중적 호응이었고, 여타 교양잡지도 만화의 비중을 늘려서 실질적인 만화잡지에 가까워지는 등 판세를 바꾸어 놓았다.

아동/청소년이 만화를 사서 읽기 위해서는 교양을 핑계로 대야 했던 가정환경이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인식 속에서, 어떻게 순수한 비교육적 오락거리 취급받던 만화로만 된 잡지가 당국의 출판 허가를 얻을 수 있었을까. 흔히 회자되는 것은 전대 독재정권의 유산 가운데 하나인 육영재단이 낸 것이기에 가능했다는 특혜설인데, 비슷하게 만화의 상품성을 터트릴 수 있었을 위치의 다른 교양잡지 출판사들이 만화 전문 새 잡지 창간을 해내지 못한 것을 고려하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만화에 대한 통제가 낳은 특혜’ 덕분에, 잡지를 가득 채운 아동/청소년용 오락성 만화들이 당대의 표면적인 사회적 백안시를 가뿐하게 건너뛰고 손쉽게 주류로 보급될 수 있었다. 만화가 무려 스무 편이나 빼곡하게 연재되는 비교육적인 잡지가, 사회적 권위를 지닌 여러 근엄한 어르신들의 추천사와 함께 광고되는 진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후진적 통제가 어쩌다보니 후진적 대중문화 인식의 우회에 도움이 되어버린 경우다.

통제라는 고난을 우회하다가 훌륭한 결과를 낸 것은 그 잡지의 대표적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아기공룡 둘리]는 보물섬에서 83년부터 93년까지 장기간 연재된 명실상부한 간판스타격 작품이었는데, 이야기 얼개의 모든 것이 심의를 피하며 만들어진 것이었다. 명랑만화라는 장르는 그다지 우수하지 않은 아동 주인공이 겪는 일상의 소동과 희극적 환상모험을 다루곤 했는데, 사회적 분위기가 만드는 압박와 심의의 칼날이 맞아떨어지며 아무리 말썽을 일으켜도 기본적으로 가족 또는 유사가족 관계에는 순종적인 “착한” 주인공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김수정 작가는 이미 [오달자의 봄], [날자 고도리] 등 성년 취향 만화를 통해 인간에 대한 좀 더 현실적인 관찰로 유머감각을 뽑아낸 바 있었고, 새로 그릴 작품에서도 어린이의 조금 다른 중요한 일면에 주목했다. 바로 어른에게 반항하고, 대놓고 버릇없는 행동을 하는 모습 말이다. 심의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작가가 고안해낸 발상은 두 가지였다고 밝혔는데, 하나는 주인공을 인간이 아닌 특이한 존재로 의인화를 하는 것이었고, 겉모습과 별개로 실제로는 어른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빙하 속에서 1억년을 보내고 현대에 되살아난 아기공룡, 둘리가 탄생했다.

만화가 연재되기 전에 사전심의를 받아야했던 억압적 문화 제도, 그리고 아동용 명랑만화라면 건전한 도덕관을 전해낼 것을 요구하는 아직 많이 경직되었던 사회적 인식 안에서, [아기공룡 둘리]는 현실적 불온함을 위해 그 장벽을 요리조리 피하는 과정 속에서 진정한 매력을 얻었다. 심의를 우회하다가 생겨난 [아기공룡 둘리]의 설정은 이 작품이 명랑만화의 숙성된 장르규칙을 충분히 활용하되 동시에 한층 깊이 있게 발전시키는 절묘한 수가 되었다. 둘리는 공룡이기 때문에, 평범한 중산층 가장 고길동씨의 집에 눌러 살게 되었지만 결코 가족이 아니다. 표현만 비뚤어져 보일 뿐이지 깊은 유사가족애로 뭉쳐있다는 손쉬운 훈계도 아니다. 어른은 아이 주인공을 진심으로 구박하고 아이는 어른을 진심으로 무시하는데도 오지랖과 호구스러움과 미운 정으로 여하튼 함께 살아가는 한층 섬세하게 복합적인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렇듯 고길동씨는 하숙집 주인 같은 사무적 관계도, 가족의 가장도 아니다. 군식구를 쫒아내듯 구박하고 또 잠시라도 사라져주면 속시원해하지만, 진지하게 직접 퇴거시키지도 않는다. 내심 챙겨주는 것도 아니되, 동거를 용납한다. 아동의 건전한 모습에 대한 통제도 통제지만, 어른 또한 아동용 작품에서 이런 미묘한 모습이어서는 심의 당국의 불편을 사기 쉽다. 하지만 겉모습에서 풍기는 관계와 달리, 이 작품은 1억살 먹은 공룡 식객과 성깔 있는 집주인의 기묘한 생활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시동이 걸리고 나니, 이후 전개는 더욱 노골적으로 불온해질 수 있었다. 아예 집안의 가장인 고길동을 애완동물이라고 오해하는 외계인 도우너, 허영으로 가득해서 현실감각이 이상해보이는 서커스 탈출 타조 또치 등이 군식구로 불어나고, 비록 고길동의 실제 가족이기는 하지만 너무 아기라서 아무 짓이나 막 해도 변명이 되는 희동이가 자리를 지켰다. 군식구 3인조와 가정에서 도움 되지 않는 아기 하나에 덧붙여 이웃집의 노래하는 백수 마이콜까지 결합한 주인공 팀은, 일상의 소소한 갈등부터 장쾌한 이세계 모험까지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 속에서 각자의 캐릭터 분담이 확실한 티격태격, 그리고 공통의 애증의 대상인 고길동씨와의 관계가 맛깔스런 직설적 대화와 서민적 정서, 황당한 말썽으로 펼쳐진다.

한편, 한국의 만화잡지 환경은 점차 규제 여건이 나아졌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며 정치의 민주화만큼이나 문화제도 또한 발전하여 세부 독자 취향에 맞춘 만화 전용 잡지들이 자유롭게 창간되었다. 사전 검열은 어느덧 유명무실화되고, 좀 더 본격적인 해외 문화 개방 분위기 속에서 아동/청소년 만화 또한 더 수위 높은 표현이 충분히 허용되는 분위기가 생겼다. 유혈 장면과 신체 노출 묘사 같은 것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도덕 교과서 기준으로 인간관계를 묘사해야하는 압박이 거의 사라졌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당국에 의한 직접적 검열이 완화되었다는 것이지, 사회의 문화적 보수성과는 90년대 내내 계속 갈등을 겪고 싸워야 했기에 결국 97년의 청소년보호법 파동과 만화계의 저항운동이 일어났지만 말이다.

그렇게 변한 여건 속에서, 94년 김수정 작가는 인기 소년만화 주간지 [소년챔프]에 그간 국민캐릭터로 성장해버린 둘리의 정식 속편으로 화제 속에 [베이비사우루스 돌리]를 시작했다. 전작의 주요 캐릭터들이 성인이 된 모습으로 전부 재등장할 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도 직접 캐릭터로 합류했지만, 섬세함을 잃고 지나치게 노골적인 콩가루 관계와 비극적이고 냉소적 정서는 인기를 얻는 것에 실패했다. 작품을 억압하는 후진적 통제를 우회하며 기발한 세계관을 만들어냈던 그 레시피의 치열한 절묘함은,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지자 얄궂게도 재현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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