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공룡 둘리: 80년대 가장의 이야기 [전자신문 090925]

!@#… 한바퀴보다 약간 빨리 돌아서 사실 2주전에 이미 나간 전자신문의 ‘만화로 보는 세상’ 연재칼럼. 전자신문 게재버전은 여기로(클릭).

 

아기공룡 둘리: 80년대 가장의 이야기

김낙호(만화연구가)

현재까지 캐릭터상품으로서의 인기가 워낙 오래 지속되고 있기에 자칫 잊어버리기 쉬운데, ‘아기공룡 둘리’는 오롯이 80년대라는 역사의 단면을 담아내는 작품이다. 비록 명랑만화 장르 특유의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모험담이 종종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시대성이 제거된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사회의 80년대 모습과 그 정서와 떼어놓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mp3와 휴대폰과 인터넷이 아니라 LP음반 컬렉션, 거실에 놓인 다이얼식 전화기, 아침 신문을 보며 세상 돌아가는 꼴에 혀를 차는 세계다. 그 속에서는 민폐성 사고뭉치지만 영악한 되바라짐과는 거리가 먼 80년대식 말썽장이 어린이 개념을 각각 다르게 구현한 4총사 주인공들이 있다. 더부살이 식구 특유의 궁상이 돋보이는 둘리, 문자 그대로 외계인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도우너, 유사 공주병 또치, 아무 생각 없는 아기 희동이가 그들이다. 하지만 이 만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뭐니뭐니해도 가장인 고길동씨다.

고길동씨는 도봉구 쌍문동에 사는 샐러리맨이다. 서울 외곽의 평범한 단독주택에 살며, 자가용을 굴릴 정도로 딱히 여유가 있는 신분은 아니지만(80년대 초 기준임을 상기하자) 따로 면허를 딸 의지도 없고 대중교통으로 다니는 것에 익숙하다. 하지만 당대의 다른 가장들처럼 나름대로 가장의 취미에는 흥미가 있어서 LP를 모으고 바둑도 두고 낚시도 다니곤 한다. 그리 착하고 대범한 사람도, 반대로 대단한 악인도 아니다. 그저 적당히 치졸하고, 적당히 이기적이고, 버럭 성질을 내면서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고, 그래도 자기 집안의 평화를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그런 인물이다. 평범하게 사회에 순응하며 그럭저럭 보수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지낼 사람이다. 평온한 안정이 군식구들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깨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70년대의 새마을운동 분위기는 이미 지났지만 아직 90년대의 세계화 무한경쟁의 냉엄한 현실에 내동댕이쳐지지는 않았고, 5공식 독재전략의 부산물로 대중문화 향유가 한층 열린 것이 80년대의 모습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서울권 화이트칼라 가장은 탈권위주의를 추구해볼 상상력은 아직 없으나, 부양능력 하나만 내세우며 가족에서 절대권력 대우를 요구할 만큼 정서적으로 빈곤하지도 않다. 다만 그저 식구들이 가장 대접 좀 해주고, 크게 말썽 피우지 않는 것을 바랄 따름이다. 그런 바람에 대한 화답으로, 둘리 패거리는 말썽을 피우고 살림살이를 박살냄으로써 가장에게 민폐를 끼친다. 하지만 그것조차 가장의 구박에 대한 반작용에 가깝지, 권위 자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 주요 모티브로 등장한 90년대 이후의 풍경과 다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길동씨 역시 어떤 형태가 되었든, 자신에게 주어진 가족이라는 틀은 깨지 않고 또한 하숙집 주인 같은 느낌보다는 가장으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의도가 계속된다. 내쫒겠다고 항상 으름장을 놓고 둘리 패거리가 하루라도 안보이면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건강상태가 호전될 정도지만, 반대로 그들을 신고하는 경우도,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완전히 가로막는 경우도 없다. 그렇듯 뭔가 다음 세상으로 바뀔 듯 하면서도 은근히 예전의 보수적 가치에 그대로 따르는 느낌이 바로 80년대적인 셈이다.

실제로 『아기공룡 둘리』가 완결된 수년 후, 『BS돌리』라는 속편이 지극히 “90년대적인” 감성의 소년만화잡지에 연재된 바 있다. 그 작품에서 길동씨는 탈모에 노이로제로 쇠약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겉으로는 바뀌기 시작했으나 속은 그대로에 가까웠던 80년대적 정서의 가족관과 달리, 정말 구도와 관계들이 바뀌는 느낌이랄까. 이렇듯 만화작품을 통해 역사를 읽어내는 것은 노골적인 소재나 장르 뿐만 아니라 그것이 담아내는 정서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그 역사를 그렇게 살아온 오늘날의 사람들을 파악하는 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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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전자신문의 ‘만화로 보는 세상’ 연재칼럼. 필자들이 돌아가면서 ‘만화의 사회참여’, ‘만화 속 역사’, ‘만화와 여성’, ‘웹툰트렌드’ 등의 소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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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oughts on “아기공룡 둘리: 80년대 가장의 이야기 [전자신문 090925]

Comments


  1. 그렇군요. 아기공룡둘리의 고길동씨는 80년대에 정착한 인물이었어…

    하긴 연재기간이 길어진다고 해서 캐릭터가 담겨있는 시대가 자동으로 바뀌는 일이 드문것 같습니다. 블론디처럼.

    만약 아기공룡둘리가 계속 연재되었다면 그들의 쌍문동은 영원히 80년대를 살아갔을까요? 그렇게 되었을리 없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도 참 의미가 있었을 법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그러고보니 그런 만화가 일본에도 있군요.. 괴짜가족. 영원히 3학년 신학기를 맞으면서 60년대부터 90년대를 넘나드는 주인공들. 일본 꼬꼬마들도 잘 모르는 그 시대.

  2. !@#… nomodem님/ 뭐 당장 ‘BS돌리’만 해도 이미 더 이상 80년대를 살지 않았으니까요;;; (여러가지 의미로 과소평가된 작품이기도 함)

  3. 김수정씨는..
    대중만화에서 만화적인 리얼리즘을 무척 훌륭히 소화한 작가라고 생각해요.
    부담스러움 없이 적당한 선에서 웃음의 힘과 잘 조화시킨.
    ‘일곱개의 숟가락’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분담(?)을 시켰구요.

    둘리의 경우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직접화법을 구사하려고 한 흔적이 보이고
    웃음이라는 부분에서 많이 약해졌다고 생각해 좀 아쉽긴 합니다만..

    BS돌리는,
    만화를 꽤 좋아했다는 친구들 중에서도 그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더라구요^^;;;

  4. !@#… 조랑님/ 옙, 보기보다 암흑 역사 취급당하는 작품이죠(…). 당시 연재지면(소년챔프)으로서는 둘리에 대한 셀프패러디를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아쉽게도 힘들었던 면이 있습니다.

  5. (요)베이베~사우르스 둘리는 …3회까지인가밖에 기억이 안나서 뭐라고 평을 드리기 어려웠습니다. 왠지 작가에게 버림받은 듯한 작품..

  6. !@#… nomodem님/ 작가의 분신 김파마가 주요 조연으로 그대로 등장해버렸는데도 말이죠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