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아차리실 분들은 이미 알아차리셨겠지만, Kübler-Ross의 “큰 손실을 받아들이는 5단계 이론” (부정-분노-흥정-우울-수용)을 살짝 패러디… 했는데, 해놓고 보니 별로 유머러스하지 않아서 당황.
기생충에게 지배당해도 살아가기
김낙호(만화연구가)
80년대의 개그 한 토막을 떠올려보자. “내 속에 또 하나의 생명이 자라고 있어.” “어머, 너 혹시 임…?” “기생충.” 사람은 자신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어떤 부분을 자기 존재의 기반으로 삼기 마련인데, 보통 그것은 각자의 ‘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기생충이라는 것은 그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몸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온 상태인 만큼, 충격이 크다. 고작 내 재산, 내가 아는 이들이 아니라 바로 내가 침범당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기겁하면서 냉큼 약국으로 달려가 그 커다랗고 삼키기도 힘든 구충제를 꿀꺽.
그런데 이것은 이야기라는 측면으로 보자면, 기생충을 계기로 해서 나를 탐구할 수 있다는 소재거리가 되어준다. 인간이란 사실 그다지 별 것 없는 개념일 수 있으며, 나라는 존재도 그렇게 대단히 굳건하지 않고 휘둘리고 변하고 섞여나갈 수 있다는 성찰이라든지 말이다. 기생충과 합쳐져서 새로운 힘을 지닌 존재가 될 수도 있다. 퓨전 사무라이 활극 『무한의 주인』의 주인공 만지의 경우 혈선충이라는 기생충들이 숙주의 육체를 열심히 유지해주는 덕분에, 불사의 경지에 올랐듯이. 그런데 성찰적 깊이와 성장하는 주인공을 보는 직선적인 오락성을 같이 겸비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면 역시 주인공이 자신 속에 들어온 기생충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루는 것이다. 박멸해서 다시 나만의 나로 돌아오는 방법과 달리, 점차 더욱 확장된 자신이 되어가는 모험담은 잘 다루면 최고의 걸작을 탄생시킨다. 그런 경우 중 하나인 작품 『기생수』(이와아키 히토시 / 전8권 / 학산문화사)를 통해서, 기생충에게 지배당해도 살아가는 과정을 살펴보자.
첫 단계: 부정
어느 날, 어디선가 기생체들의 포자가 지구 곳곳에 뿌려진다. 인간을 먹어라, 라는 생물적 본능 하나만을 지닌 이 존재들은 어쩌면 대자연의 백혈구일수도 있고 그저 외계의 침략자들일 수도 있다. 이들은 유생체 상태에서 인간의 몸 속으로 파고 들어가, 뇌에 도달하면 머리를 먹은 후 자신들의 가변형 몸으로 대체한다. 즉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인간의 몸에 기생한 기생체의 머리인 셈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주인공 신이치에게 침입한 기생체의 경우, 뇌에 도달하기 전에 인간이 깨어나 팔을 동여매서 오른쪽 팔에 기생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신이치는 온전히 자기 말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이상한 모양으로 변하는 오른팔, 그리고 가끔 들려오는 머리 속의 목소리에 신경 쓰인다. 하지만 상식적인 생활습관에 의거, 설마 그럴 리가 하면서 부정한다. 간밤에 외계생명체 같아 보이는 괴물과 싸우고, 그 괴물이 사실 오른쪽 팔을 통째로 먹어버리고 대신 흉내내고 있다는 것을 깨끗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설마 그럴리가!
두 번째: 분노
하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상하게 변하곤 하는 손이 야기하는 난감한 상황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분노하게 된다. 식칼로 오른팔을 잘라내려는 생각도 하고, 네게 몸을 지배당하지 않겠다고 으름장도 놓는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왜 이러고 있는지 화를 내며 다그치기도 한다. 어째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더욱 화를 내며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게 된다. 하지만 물론 분노로 문제가 해결되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강력하게 비상식적이다. 또한 이제 오른쪽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기생체는 점점 더 많은 것을 학습해서, 지적으로도 숙주인 인간을 뛰어넘을 태세다. 그렇기에 상황을 받아들이는 반응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세 번째: 공포
이제 이 미지의 생명체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오른쪽 팔이 된 이 기생체의 힘은 너무나 강력하여 도저히 반항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좀 돌아다니다보니 비슷한 생명체들이 인간의 모습을 한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다. 돌아다니기만 하면 좋은데, 애초의 생물적 본능에 따라서 사람도 잡아먹는다. 사람만 잡아먹으면 좋은데(아니 좋지는 않다),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공생하게 된 신이치와 오른쪽이에게 이질성을 느끼고 없애버리려고 덤벼든다. 이쯤 되면 무섭다. 이 생물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공포가 되는 것이다. 무섭기에 움츠려들고, 도망친다. 하지만 문제는 공포에 질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기에는 바깥에서 주어지는 압박이 너무 크다. 상대 기생체들은 인간과 공존하며 두 개의 사고를 거칠 필요가 없기에 더욱 반응속도도 빠르고, 가장 본능적인 방식을 추구하기에 효율적이며 강하다. 이제 공포 만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어진 것이다.
네 번째: 흥정
여전히 가급적이면 이 상황 자체를 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지만, 이미 단순한 부정을 하기에는 확고한 현실이 되어있고 분노하거나 공포하는 것은 이제와서 너무 소모적이다. 그렇기에 오른쪽이와 신이치는 서로의 장점을 살려서 융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즉 기능을 최대화해서 상황을 모면할 수 있도록 서로 흥정을 한다. 처음에는 그저 떨어져서 다른 생물체로 옮겨가면 안될까 거론하는 상황 자체를 무화하고자 하는 발상으로 흥정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오른쪽이가 휴식기에 들어갈 동안 어떤 식으로 대처를 해야 한다든지, 전투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한다든지 서로 합의를 하기 시작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비상식적 상황에서, 흥정을 통해서 서서히 무엇이 가능하고 불가능한지, 그 안에서 어떤 쪽이 나을지 가늠하는 것이다.
최종단계: 수용
그리고 최종단계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마 흥정의 단계에서 몇 가지 옵션들을 충분히 산정해보았을 것이고, 그 상태에서 더욱 상황에 익숙해졌다면 남은 것은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것만 남았다. 이제 신이치와 오른쪽이는 종을 초월한 묘한 우정, 아니 몸을 공유한 연대의식을 느끼며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기생체의 본능적 효율성은 신이치에게, 타 생물에 대한 공감 같은 인간 특유의 정서는 오른쪽이에게 조금씩 흘러들어와 섞인다. 액면상으로는 신이치가 기생체를 수용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이도 인간을 수용했다. 결국 공존의 길이 열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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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 세계의 기생충들은 대체로 그런 훌륭한 공존을 꿈꿀만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좀 더 폭넓게 보자면 몸 속의 대장균도 남들이 내 몸에 돌아다닌다는 점에서 매한가지 아니던가. 만약 당장 내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면, 부정하고 싶기도 하고 분노도 느끼고 무섭기도 하고 흥정의 대상이 되기도 하겠지만 결국 필요에 의해서 수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어디 개개인의 몸 뿐이겠는가. 사람들의 사회에서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은 절차가 필요하지 않겠나 싶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로 다른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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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팝툰>. 씨네21 발간. ‘만화로 보는 생존법’ 칼럼: 험난하고 이상한 세상의 어떤 괴이한 조건에서라도 여하튼 그럭저럭 살아가보기 위한 지혜를 만화에서 빌려보자는 컨셉.)
— Copyleft 2009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흐흣. 저도 참 기생수 재미나게 읽었는데 말이죠… 그나저나 3월부터 월간으로 바뀐다는데, 고료가 주는건가요, 아니면 고료는 유지되고 분량이 더 느는건가요. ㅋㅋ
이와아키 히토시 만세! 히스토리에 만세!
!@#… erte님/ 연재분량이나 회당 고료야 뭐 변함없고, 횟수가 줄어드는거죠. 지면개편 상황에 따라서 또 어떤 재미있는 코너가 가능할지는 차차 궁리해보고.
네이탐님/ 이 작가분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무한한 어시 지원이죠. 연재분량 좀 늘려주시기를…
연재 분량 좀 늘려주시기를 2;;;
히스토리에 기다리다 목 빠져요O—-TL
!@#… JNine님/ 사실은 그래도 중도 포기도 퀄리티 저하도 없이 계속 가는 것만도 감지덕지;;;
팝툰에서 보고 헉…이것이 이전에 말씀하신 BL테마?! 우후후훗!–하고 멋대로 좋아했던 저…; 기생수는 정말 마지막이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히스토리에는 에우메네스와 헤파이스톤의 신경전이 어떻게 다루어질지 궁금…
!@#… 시바우치님/ 알렉산더의 등장이 이미 뻑가게 인상적이니, 나중에도 계속 기대해도 될겁니다.
에에..저 5단계는 심슨에서 너무 잘 정리를 해준터라 임팩트가 부족 orz
!@#… 언럭키즈님/ 그러게 말입니다. 흑흑
기생과 공생이란 결국 ‘나’란 무엇인가 하는 화두로 이어지는 주제가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우리 몸 안팎으로 2만여 생명체가 기생-공생하며 살아가고, 애초에 미토콘드리아도 기생체였다잖습니까?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이들 중에는 ‘대형포유동물이란 박테리아들을 키우기 위해 고안된 주머니’라고까지 표현하는 이도 있고요.
우리는 쉽게 ‘나’라는 영역을 정의해 놓고 살아가지만, 초마이크로한 시각을 가진 외계 생명체가 인간을 본다면, 하나의 거대한 생명군집이 협동하며 움직이는 걸로 보지 않을까요?
그리고 만약 우리 몸의 2만 주민에게 ‘오른쪽이’와 ‘인간’중 누가 지배자가 되는 것이 좋겠냐고 물어본다면 모두다 ‘누가 되든 지금처럼 계속 살게 되면 상관없다’고 하겠지요.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사실 모두들 관심이 없고 현상을 유지해주길 바란다는 점에서,
생명이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극한 상황이 닥치지 않으면 진화는 안 일어나지요.
지금 우리 사회의 기생체는 아무래도 숙주를 죽이는 최악의 기생충으로,
도저히 공생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곧 극한상황이 닥치는 걸까요?
아무튼, 기생수는 피식-포식자로만 그려지던 바디에일리언을 새롭게 해석했던 명작이었죠. 시대적인 영향일지, 일본인들이 워낙 ‘요괴’에 친숙한 문화를 갖고 있어 가능했던 것인지?
!@#… 곰곰님/ 하나의 유기체의 일부로서 살아가면서 공생에 실패하며 그나마 배출도 제어도 되지 않는 상태로 전체의 양분을 일방적으로 흡수하며 억지로 힘을 키우는 존재를 우리는 흔히… 암세포라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