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팝툰 6월호 개편에 맞추어, 이번이 ‘여하튼 살아가기’ 칼럼 마지막회. 만화와 세상사를 접목시킨다는 컨셉을 이어나가면서 더 큰 재미를 줄 수 있는 새 칼럼 아이디어 모집중.
노동력을 수탈당해도 살아가기
김낙호(만화연구가)
굳이 ‘자본론’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살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가지게 되는 의문이 있다 – “내가 과연 내가 일하는 대가를 제대로 받고 있는 건가”. 극소수 운 좋은 이들은 일보다 보상이 훨씬 많이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노동과 보상이 얼추 맞아떨어지거나, 숫제 노동보다 보상이 적더라도 자리 자체를 보전하기 위해서 그럭저럭 참고 지낸다.
그런데 그 노동력을 사는 고용주도 직원이 자리 보전을 위해 웬만하면 보상이 적은 것도 참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안 그래도 불균형할 수 밖에 없는 권력 관계는 더욱 크게 기운다. 그리고 그 기울기가 지나치게 급해지면, 노동과 보상 사이의 격차가 확실하게 벌어진 상태, 즉 수탈이 이루어진다. 물론 제대로 굴러가는 시장이라면, 그 단계에 이르기 전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들이 그만 참고 관계를 결렬시키겠다고 나와서 협상과 균형을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에서 종종 동원되는 격언이 바로 “현실은 시궁창”이다. 그렇다면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로서 불리한 상황에 처할 때, 수탈당하고 있는 것 같을 때 어떻게 하면 그럭저럭 상황을 개선시켜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혁명으로 노동자천국을 만든다느니 그런 아름다운 환타지 말고, 당장의 지저분한 현실 속에서 말이다. 좀 더 극단적이었던 시대의 상황 속에서도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추구하고 상당한 결과를 잉태했던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 『태일이』를 한번쯤 들춰볼 때다.
자료를 확보하라
『태일이』는 70년대에 한국에서 노동권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고 사회발전과 운동방향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어 놓았던 평범한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삶을 만화로 그려낸 것이다. 의도와는 달리 위인전적인 느낌이 들어가 있는 책 ‘전태일 평전’이나 민중과 사회를 바라보는 지식인의 문제의식을 담아내는 듯한 영화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고 평범하게 하나씩 자신을 둘러싼 문제를 깨닫고 해결책을 찾아보곤 하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무거운 결말을 향해 달리는 비장함보다는, 평범하게 즐기고 성장하는 사람의 이야기인 셈이다. 노동문제에 눈을 뜨는 것은 전 5권 가운데 4권에 돌입해서야 이루어지고, 그것 역시 노동관계에 대한 복잡하고 현학적 고뇌보다는 가장 평범한 이치에서 시작한다. 여공들이 공장에서 폐병이 걸릴 정도로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데, 약속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작업조건 개선도 신경 쓰지 않더란 말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일방적으로 노동력을 수탈하는 것만으로 기업 경쟁력을 키우는 왜곡된 시장경쟁, 국가 경제 성장 드라이브를 위해서 편법을 용인하는 국가시스템, 계층간 사회적 단절 등 굵직한 사회 모순들이 엮여있지만, 전태일은 이론 학습과 거시적 통찰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눈 앞의 문제를 보고 개선하기 위하여 나선다.
그렇기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바로 얼마나 수탈당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내는 것이다. 공장장들의 눈을 피해 평화시장 여러 공장의 직원들에게 사비를 털어 만든 설문지를 돌리고, 자료를 모은다. 노동청도 쉬쉬하고 나라를 걱정한다는 지식인들도 대충 넘어간 바로 그 부분, 바로 생생한 자료의 확보다. 평화시장 노동자 자신들만 경험적으로 아는 것으로 세상에 정의를 호소할 수는 없다.
뜻을 같이할 사람들을 모아라
설문조사를 통한 자료 확보든 다른 활동들이든, 뜻을 같이할 사람들이 폭넓게 결합해야 제대로 할 수 있다. 단순히 똑같은 뜻을 가진 순혈의 클론들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겪어온 바가 있고 서로 토론을 하며 뜻을 만들고 좋은 방향을 궁리해 볼 수 있는 이들을 엮어야 한다. 그렇듯 전태일과 평화시장 젊은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공통점으로 모인 것이지, 어떤 투철하고 완성된 신념체계를 학습하여 하나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친목단체처럼 시작해서 점차 완성된 노조의 형태로 발전시켜나가보자는 목표 속에서 각자 진지하게 참여한다. 바보회라는 모임의 형식 외에도, 점차 여공들과 기술자들이 그 뜻에 느슨하게 동의하며 협조를 하는데, 그 중에는 이전에 반목했던 재단사 박씨도 포함된다. 최소한의 조건으로 최대한 참여할 수 있는 개방적 협력인 셈이다. 이것은 이미 완성된 어떤 정체성이 진입장벽으로 작용하지 않는, 바닥에서부터 처음 조직화하는 것이기에 가능한 흐름이기도 하다.
포기하지 말고 더 널리 알려라
전태일과 바보회의 활동 태반은 알리는 것이었다. 사장들을 법정에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경우 도와주도록 되어 있는 상대들에게 상황을 알리는 것이 먼저였다. 사장들에게도 알리고, 노동청에도 알리고, 신문사에도 알리고, 경찰 측의 협력자로 보이는 이에게도 알린다. 제대로 싸움을 걸어 이길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뭔가 할 수 있을 법한 이들에게 상황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사회운동론을 공부한 적도 없는 이들이지만, 그 상황에서 가장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고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현명한 전략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 나가면서 축적되는 에너지로 자연스럽게 작업 거부나 더 큰 집단행동으로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 노동청, 사장단 등 여러 세력들에게 뒤통수를 맞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진상을 계속 더 알려나가고 지지를 끌어 모으는 것에 매진하는 것이 이들의 활동방식이다. 그리고 중요한 시위가 봉쇄되며 큰 벽에 부딪히게 되자, 결국 전태일은 생명을 바쳐가면서 온 세상에 평화시장의 노동문제를 알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결국 평화시장 안과 바깥 모두에게 도달했다.
계속하도록 뚜렷한 의지를 남겨라
하지만 아무리 숭고한 희생을 했다 할지라도, 내일 갑자기 세상이 바뀌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왜 어떤 쪽으로 판을 바꿔야 하는가 하는 의지를 많은 이들에게 확실하게 남겨서 꾸준히 목표를 향해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으로서 『태일이』가 지니는 가장 큰 강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태일의 분신 이후를 다룬 에필로그다. 필사적으로 알리려고 했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씨앗이 되었고, 비록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앞가림을 핑계 삼아 엄혹한 군사독재에 동조하는 체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움직임을 만들게 해주었다. 여전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국 제대로 된 풀뿌리 노조가 만들어지고,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맥을 이어갔다. 결국 90년대가 되어서야 노동권 보장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니, 전태일이 가버린 뒤로 20여년이 더 걸린 셈이다. 오늘 못 이루면 내일이라도, 내일 못 이루면 내년에라도, 해낼 때까지 계속 움직일 수 있는 동력으로서 필요한 것이 바로 앞선 이들이 남겨두는 의지다. 노동력을 수탈당할 때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진보적 사회변화를 추구할 때라도 생각해볼만한 점이 아닐까.
======================================
(월간 <팝툰>. 씨네21 발간. ‘만화로 보는 생존법’ 칼럼: 험난하고 이상한 세상의 어떤 괴이한 조건에서라도 여하튼 그럭저럭 살아가보기 위한 지혜를 만화에서 빌려보자는 컨셉.)
— Copyleft 2009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Pingback by roo's me2DAY
roo의 생각…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고 평범하게 하나씩 자신을 둘러싼 문제를 깨닫고 해결책을 찾아보곤 하는 모습들이 그려진다.무거운 결말을 향해 달리는 비장함보다는,평범하게 즐기고 성장하는 사…
Pingback by anneshirley's me2DAY
앤둘의 생각…
왜 어떤 쪽으로 판을 바꿔야 하는가 하는 의지를 많은 이들에게 확실하게 남겨서 꾸준히 목표를 향해가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 못 이루면 내일이라도, 내일 못 이루면 내년에라도, 해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