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렇게 나름 맑고 희망찬 가이드라니, 써놓고 나서 스스로도 깜짝 놀람.
경제가 망해도 살아가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우리가 원하든 말든, 오늘날 세상은 돈으로 움직인다. 물론 움직이는 방식은 조금씩 달라서 천박한 ‘남들을짓밟고나만잘살면된다주의’를 선택한 사회도 있고 좀 더 함께 잘 살기 위한 장치들을 겹겹이 두고 있는 곳도 있고 그렇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돈으로 움직이는 세상이다 보면 호경기도 불경기도 있고 언젠가는 불운이 찾아올 때도 있다는 점. 그 불운이 상당히 세게 걸리다 보면 경제가 망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그런 불운의 순간에 어떻게 잘 견뎌내며 살아가고, 망한 경제 속에서 다시 뛰어오를 발판을 마련하는가의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칼럼에서 무일푼으로 10억 벌기 필살 팁을 건내 줄 리는 없고(그런 것이 있으면 이미 직접 하고 있겠지), 여하튼 잘 버티기 위한 몇 가지 원칙 정도는 뽑아볼 수 있다. 살림이 쫄딱 망한 어떤 대가족의 미소년 고등학생 가장이 겪는 좌충우돌 코미디, 『타로이야기』라는 만화를 가이드 삼아서 말이다.
주눅들 겨를 따위는 없다
경제가 망한 것에 궁상이나 떠는 것은 극복의지 없음의 동의어다.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고 주눅드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할 겨를 따위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일은 잘 되겠지 하면서 근거 없는 낙관이나 하라는 것이 아니고, 어쩌다가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따져보고 책임있는 쪽에 책임을 지우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현재의 난관을 극복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기 바쁜데 자기 연민에나 빠져 있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타로이야기』의 주인공 타로는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 수많은 동생과 경제적 민폐 그 자체인 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지며 살고 있지만, 자신의 처지를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모멸감에 빠지는 경우가 없다. 그렇다고 애써 괴로움을 잊기 위해 허세를 부리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머리 속에 항상 생활비 수지타산 맞추는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뭐 워낙 귀티 나는 미소년인데다가 학교에서는 사실과 다르게 부자라고 소문이 나서(본인은 그런 소문이 있는 줄 모른다) 주변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할 일이 없다는 것도 작용하겠지만 말이다. 주눅들어 궁상을 떠는 것은 오로지, 노리던 반찬거리 할인품목을 다른 아줌마에게 먼저 빼앗겼을 때 뿐이다. 우울해하거나 엉뚱한 방향의 분노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여하튼 살아가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은 중요하다.
협력은 받아들여라
누가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대가를 명백하게 요구하는 ‘거래’가 아니라면,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물론 세상사라는 것이 공짜가 없기에 결국은 어떤 방식으로든 주고받는 관계가 되겠지만, 지금 필요한 상태에서 지금 손해를 보지 않는 협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고마워하고, 또 반대급부로 보답할 일이 있으면 능력 한도 내에서 해주면 된다. 필요 이상으로 여러 가지 숨겨진 음모를 생각하며 머뭇거리다가 거절해서 돌아오는 것은 없다. 타로의 절친한 친구 녀석은 정통 다도 명가의 후계자로, 잘사는 집안이다. 그런데 그는 타로의 집안을 일으켜 세워준다거나 하는 식의 개입은 하지 않는다. 혹은 매일 밥을 사준다거나 수학여행비를 대신 내준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돈으로 무언가를 하기보다, 그저 친구로서 같이 행동할 따름이다. 그런데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그런 친구가 한 명 있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되고, 훌륭한 협력자다. 그런 식의 도움은 크게 잴 것 없이 그냥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물론 줄거리상 나중에는 타로의 (미소녀인) 여동생을 노리는 듯한 방향으로 슬쩍 흘러가지만 말이다.
재활용이 살 길이다
흥부가족 마냥 남매들이 주렁주렁 있는 타로의 가족이 살아가는 핵심적인 수단은 바로 재활용이다. 교복과 교과서를 계속 수선하고 물려주기 때문에 그 많은 인원이 어떻게든 버틴다. 교복 천이든 음식물이든 책이든, 필요한 것은 재활용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바느질 솜씨는 천의무봉의 경지에 올라가고 짜투리 요리에 대한 재주도 비상해진다. 그 결과 즐거운 오해가 생길 정도로 말이다. 교복 재봉이 약간 다르다는 급우의 지적에 타로는 “아, 손으로 바느질해서 그래”라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학급에는 ‘역시 타로네는 부자라서 장인의 수제품을 쓰는구나’라는 소문이 돌아 전설은 한층 강력해진다. 여튼 재활용의 경험에서 축적되는 재주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어서, 연극이든 숲속 조난 상황이든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무엇보다 경제가 쫄딱 망한 상태에서의 일상생활이라는 커다란 난관에서 가장 큰 힘이 된다.
필요한 곳에 잘 배분하라
경제가 망한 상황이라면, 돈이 생기면 빨리 필요한 곳에 배분해서 쓰는 것이 중요하다. 저축이나 재투자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상황이니 공평하고 필요에 따라서 생활의 여러 요소에 투여하라는 것이다. 가족의 특정 성원들에게만 허리를 졸라메도록 한다든지, 당장 필요한 부분이 있는데 그런 부분들을 무시하거나 눌러버리고 저축한다든지 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전체적으로 검소하게 운영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메꾸고 그리고 남는 여유분을 비상금으로 축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타로의 집은 가족성원들도 많고 필요한 곳도 많으니 일을 해서 돈이 타오면 대부분은 교복이든 교과서든 밥이든 바로 다시 써야 한다. 또한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평하게 –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몫에 우선권을 두지 않는다 – 사용처를 분배하기 때문에, 한쪽에 모아줄 때 생기는 가족성원간의 불화가 없다. 고통분담은 구호나 호소가 아니라 솔선수범하는 행위고, 고통이 아닌 부분도 공평하게 분배를 할 때에 비로소 설득력이 생기니까.
안 되는 이들을 계속 쓰지 말라
『타로이야기』의 긴 연재 과정 내내 타로네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아니어서, 한 두 번 정도는 꽤 큰 돈이 행운으로 찾아오는 에피소드도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매번 타로의 경제 마인드가 재앙급인 엄마가 홀라당 말아먹는다. 잠시라도 주의를 소홀히 하여 다시 엄마를 믿고 뭘 맡기는 상황이 되면, 통째로 숨겨둔 비상금까지 까먹는 패턴이다. 교훈은 간단하다. 되지도 않는 사람들, 되지도 않는 패턴의 경제운용은 과감히 힘을 다해 막아야 한다는 것. 인정 때문이든, 그래도 학습경험이 있으니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겠지 하는 순진한 가정 때문이든, 잘못을 망각하고 다시 맡기는 순간,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타로 엄마가 무개념으로 가산을 탕진하는 모골이 송연한 대목들을 읽다 보면, 이 작품의 장르가 코미디인 것을 주인공 타로는 무척 감사해야할 것이다.
코미디보다 웃기기는 하지만, 이야기 속이 아니라 이야기 바깥의 현실이라면 유감스럽게도 좀 골치가 아파진다. 하지만 아마도 기본 교훈들 정도는 그대로 기억하고 어떻게든 우리네 현실에 맞는 방향으로 적용시켜볼 수 있지 않을까. 세계 차원이든 국가 차원이든 개인과 가족의 차원이든, 자고로 경제가 망했을 때 현명하게 대처해야 그럭저럭 잘 살아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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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팝툰>. 씨네21 발간. ‘만화로 보는 생존법’ 칼럼: 험난하고 이상한 세상의 어떤 괴이한 조건에서라도 여하튼 그럭저럭 살아가보기 위한 지혜를 만화에서 빌려보자는 컨셉.)
— Copyleft 2009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오오…타로엄마에 대한 항목에서 아주 글이 빛나는군요. 해묵은 만화가 아주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 느낌.
코미디가 아니었다면 호러&잔혹극이 되었을 겁니다. -_-;;
마지막 타로엄마에 대한 부분을 보면서 뭔가 찡한게…orz
그런 의미에서 신간 “가난뱅이의 역습” 추천글 하나. ㄳㄳ
그나저나 마쓰모토 타이요씨와 아마미야 가린씨가 4월 중에 한국에 온다는군요.
눈물 없인 볼 수 없는(응?) 지요…OTL 전세계 가난뱅이들의 귀감입니다(미소년과 오해 빼고;;).
조금 진지한 이야기 : 지난 시대-미국발 금융위기 이전을 ‘지난 시대’라고 말하는 것이 좀 성급할 순 있지만-의 고민이 ‘고용 없는 성장’ 이었다면, 지금 시대의 고민은 성장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가 아닌가 싶습니다(물론 녹색성장이란 대안(?)이 있고, 경제성장/발전론의 믿음이 강한만큼 쉽게 포기하기 어려움에도.).
타로 가족의 살림살이가 가격과 이기심으로 결정되는 수요-공급의 터전이 아니라는 점이 새삼 흥미로워지네요(요즘 폴라니를 기웃거리고 있어서 그런 듯 합니다;).
!@#… nomodem님/ 만화를 읽던 당시, 이 모든 것은 자녀들에 대한 독점적 권력욕이 넘치는 엄마의 음모가 아닐까 0.5초동안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 (…)
지나가던이님/ 작가의 성향으로 보건데, 본격 야오이물이나 TS쪽으로 갔을지도 모르죠…;;;
언럭키즈님/ 사실 그 앞의 ‘없을 수록 배분하라’ 논의도 찡해주시면 감사… OTL
모과님/ 아 출간되었더군요. 표지가 좀 상당 훌륭. (핫핫) 4월중에 방한이라, 기자들에게 소문 좀 퍼트려야겠네요.
leopord님/ 대안이라… “정신적 성장”을 하는 겁니다! (핫핫) 저야 개그틱하게 꺼낸 말이지만, 클린턴 시절 미국 엘리트들의 ZEN 열풍은 의외로 꽤 진지했어요. // 확실히 요새 폴라니가 상당히 주목을 받고 있던데, 그쪽의 방법론은 현실적으로는 생활 커뮤니티적 응집력이 높을 때에만 작동할 수 있다보니 결국 작은 공동체 단위들이 효과적으로 구성되고 또 그런 집합들 사이에서 연결망이 만들어지는 연방제(…) 사회구조가 필요하죠. 뭐, 한국용 솔루션을 만들려면 아직 난관이 많습…;;;
타로네 형제들이 애완용 토끼를 잡아먹으려던 에피소드가 있지 않았던가요? 기억이 가물가물..
쓸데없는 감상은 버리고, 먹을 것에는 동정하지 않는 현실주의는 초큼 무섭지요;;;
엄마는 버릴 수 없지만 지도자는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드물게도 만화보다 현실이 낙관적인 케이스네요. 사실 이렇게 가족 생계를 위협하도록 살림을 거덜내면 바로 금치산 선고를 받아둬야 하는 건데-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는 시스템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곰곰님/ 다만 엄마는 항상 그 엄마라서 나름대로 적응할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에서의 지도자는 매번 새롭게 더 문제 많은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기에 리스크가 있죠 (핫핫).
Zen 유행이여, 다시 한 번! …올까요?-_-;;; 자칫하면 폴라니가 그저 그런 조합주의자 정도로 무시될 수 있을텐데, 사실 그가 이야기한 노동조합-소비자협동조합-사회주의적 자치단체-사회주의 정당의 연결고리는 당시에 이미 존재하던 노동세력 주체의 의미를 다시 짚어보는 정도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말씀하신 한국형 솔루션이 잡히려면 연방제 내지는 적절한 지역자치가 바탕으로 깔려야 할테지만, 조합 간의 연계는 민주적 감시·견제와 병행하는 참여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폴라니는 이 문제를 ‘소외’와 ‘조망’이라는 개념을 통해 접근하고 있더군요-하는 고민이 발현된 한 가지 사례 정도로 보는 게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시장 신화가 어떻게 사람들의 머릿속을 장악했는지, 사회에 묻어가던 시장이 어떻게 뛰쳐나와 사회를 시장에 파묻어버렸는지에 더 주목하고 있어서 금융위기의 시대에 어떤 영감(응?)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는 정도가 되겠지요.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겠지요.ㅎ
!@#… leopord님/ 비물질성을 새로운 쿨함으로서 추구했던 첫 얼리어댑터들이 히트를 치자, 점점 ZEN한 스타일의 용품과 서비스들을 열심히 소비하는 방식으로 변질되는 아이러니를 낳았더랬죠. -_-;;; // “사회에 묻어가던 시장이 어떻게 뛰쳐나와 사회를 시장에 파묻어버렸는지” 가 확실히 핵심이죠… 저는 물론 시장은 묻어간다기보다는 사회의 내장 중 하나라고 봅니다만(내재적이고 필수적이지만, 혼자 비대해지면 대략 온몸이 사망). 그런 의미에서, 폴라니 아이디어들의 한국형 실험에 대한 후속 고민들, 눈 초롱초롱하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