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범죄에서 광인의 시대로 – 배트맨: 롱 할로윈 [기획회의 308호]

!@#… 이 작품에 대한 국내 독자들의 ‘칭찬’ 태반이 결국 영화 다크나이트 이야기라서 좀 씁쓸한 구석도 있다. 그냥 이 작품 자체가 재밌구먼.

 

조직 범죄에서 광인의 시대로 – [배트맨: 롱 할로윈]

김낙호(만화연구가)

장수 슈퍼히어로물 가운데 ‘배트맨’만큼 만화 장르 자체에서는 물론이고 영화 등 기타 매체로 이식되어서도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기 소재를 제공해온 시리즈도 드물다. 그런데 그것에는 단지 히어로의 힘이 아니라, 그에게 맞서는 악인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의 역할이 크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자세히 강조할 때 더욱 매력적인 작품이 완성된다.

우선 다른 히어로물의 공간 배경과 달리, 배트맨이 활약하는 가상의 현대 도시인 ‘고담 시티’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며 독자들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뉴욕을 모델로 하지만 마피아 전성기의 시카고를 연상시키기도 하며, 작품 속성상 번성하는 도시로서의 위용보다는 뒷골목의 약육강식이 더 자주 묘사된다. 즉 도시가 히어로의 활약을 위한 장식 벽화가 아니라, 비정한 세상 자체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악인들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하다. 모태가 된 탐정수사물에서 생각할만한 현실적 범죄로서의 악, 그리고 슈퍼히어로물로서 갖춰야 할 캐릭터적 매력을 담당하는 특수능력을 지닌 악인들이 공존한다. 배트맨은 길거리 강도들을 잡고 조직폭력이나 기업 음모를 분쇄하며, 동시에 독약으로 광기어린 웃음을 전염시키며 무정부상태를 퍼트리는 조커도 상대해야 한다. 현실적 이득을 위한 범죄와 현실을 비틀어버린 광기를 둘 다 다루는 과제를 제대로 풀어나갈 때, 여타 슈퍼히어로물이 주는 활극성 재미를 넘어 선악, 이성과 광기, 도덕과 정의의 경계에 대한 생각까지 자극할 수 있다.

배트맨을 다룬 모든 작품들이 이런 것에 성공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상당히 잘 수행해내는 몇몇 작품들이 있다. [배트맨: 롱할로윈](제프 로브, 팀 세일 / 세미콜론)이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다. 배트맨의 히어로 생활 초기를 다루며 명작으로 꼽히고 있는 ‘배트맨: 이어 원’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이야기는 마피아 조직 팔코네 패밀리와 관련된 이들이 명절마다 살해당하는 연쇄살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자경단 히어로 배트맨, 경찰청의 고든, 검사 덴트의 삼각동맹이 한 편에 있고, 복수를 하고 지배력을 다시 키우려는 팔코네 조직이 있고, 점차 존재감이 커지며 자신들의 광기가 도시에 퍼져나가기를 원하는 조커 등 광인 악당들이 있다. 이들이 ‘홀리데이 킬러’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벌이는 갈등, 음모와 반전이 매달 명절마다 벌어지는 살인과 함께 1년여에 걸쳐 펼쳐진다.

[롱 할로윈]의 가장 큰 매력은 느와르적 세계관에 머무는 것을 넘어, 광기어린 악역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세계관에 있다. 마피아 ‘대부’의 세계와 ‘광인’들의 세계가 겹쳐지는 과도기를 그려내는 것이다. 할로윈 킬러와 팔코네 조직의 마찰은 현실 범죄단간의 마찰이며, 광인 조커는 “이 도시에 미친 살인마가 나 말고 또 있는 것”이 싫어서 할로윈 킬러를 쫒는다. 할로윈 킬러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아캄 수용소에 감금된 스케어크로우 등 광인 범죄자들을 탈출시켜 이용한다. 돈과 권력을 위해 싸우는 마피아, 광기와 무정부를 위해 달리는 광인들, 자경단으로서의 정의를 위해 나선 배트맨, 제도에 의한 정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고든과 덴트가 서로 얽혀 들어간다. 게다가 그 사이에는 도적인지 히어로인지 모를 캣우먼이 때로는 배트맨에게 협력하며 때로는 방해하며 종횡무진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고담시가 팔코네 패밀리의 몰락으로 평범한 범죄도시에서 조직범죄와 광인들의 지배가 함께하는 곳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얄궂게도, 그 과도기를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하비 검사다. 자경단으로서의 사적 정의감으로 움직이되 수련과 재력으로 공권력과 맞먹는 힘을 뿜어내는 배트맨과 대칭되는 인물로, 공권력 시스템의 힘을 통해 고담시를 정비하고자 하는 엘리트다. 조직범죄와 싸우는 과정에서 강직하게 나아가던 덴트지만, 부조리한 배신과 음모를 겪으며 얼굴의 반쪽을 황산에 잃고 광기 범죄자들의 세계로 옮겨간다. 다만 조커가 무정부상태를 전파하고자 한다면, 투페이스는 부조리한 우연의 화신이다. 투페이스가 된 그에게는 정의도 악도, 동전 하나를 던져 나오는 차이다. 투페이스의 탄생 과정을 통해서 윤리적 모호함과 선악 경계의 붕괴를 묘사해내는 이런 접근은 크게 성공한 배트맨 영화 ‘다크나이트’에서도 중요하게 활용된 바 있는데, 좀 더 직접적으로 배트맨의 대척점처럼 그려진 이 작품에서 더 효과적이다.

느와르적 세계와 히어로적 세계의 혼성을 통해서 매력이 극대화된 작품이다보니, 각각으로서는 아무래도 약점이 없지 않다. 예를 들어 느와르로서는 충분히 복선들이 촘촘히 숨겨져 독자들이 확실하게 이마를 치게 만들거나, 독백형 주인공이 주는 제한된 사건 단서를 통해 주관적 왜곡을 심어주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극중 반전은 놀랍기는 하되 통쾌하지 않으며, 도시와 사람들 사이에 심어진 비열함은 사건의 일부라기보다는 설정배경처럼 인식되기 쉽다. 히어로물의 측면에서는 광인 범죄자 캐릭터들의 특수한 성격과 능력이 철저하게 이야기 진행의 요소가 되기 보다는 한번 쇼케이스처럼 선보이는 식으로 낭비되는 측면이 있다. 스케어크로우의 공포가스, 포이즌아이비의 페로몬 등은 물론이고, 조커의 웃으며 죽게 만드는 맹독조차 광기의 정서보다는 권총과 다를 바 없는 단순한 살인수단에 머문다. 오히려 홀리데이 킬러가 권총 소음기로 사용하는 아기 젖병 꼭지가 더 의미심장해 보일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일 수 있는 요소들을 하나의 세계 속에 효과적으로 섞은 이야기로 버무리는 솜씨 때문에 작품은 페이지를 놓지 못하게 만든다. 비행기에 매달려 조커와 배트맨이 광기 살인에 대해 나누는 대화 시퀀스, 투페이스가 된 하비와 배트맨이 대치하는 갈등 등의 대목은, 히어로적 상상력의 쾌감을 담은 느와르이자 현실적 깊이를 담아낸 히어로물의 미덕이 되어준다.

이런 혼성이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장르 요소들을 섞어넣는 제프 로브의 스토리 솜씨와 함께, 팀 세일의 강렬한 그림 스타일의 공이 크다. 거친 턱수염과 긴 귀가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는 배트맨 정도를 제외하면, 그가 시각화한 캐릭터들은 모두 매력이 넘친다. 캣우먼은 고혹적 팜므파탈이고, 조커의 미소는 사악하기 그지없다. 팔코네 패밀리의 모두는 ‘M’ 같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와 ‘대부’ 같은 마피아물의 시각적 특징들을 고루 구현한다. 그리고 그 스타일은, 광인범죄자들이 한 군데 모여 자신들의 세상을 선포하는 양면 칸이 주는 묘한 쾌감에서 극대화된다.

이번에 출시된 한국어판은 일종의 완전판으로, 작가진 인터뷰와 연재시 표지, 일부 대본, 스케치 등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매력적인 부록은 시리즈 기획서로, 연재를 배분하고 시놉시스를 사전 설계하는 사례를 보여주어 창작자들에게 참조 가치가 높다.

배트맨 롱 할로윈 1
제프 로브 지음, 박중서 옮김, 팀 세일 그림, 리치먼드 루이스 채색/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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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초속 5천 킬로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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