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무슨 자연보호 캠페인 내지 수돗물 절약 구호 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래 물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기이한 매력으로 가득한 물질이다. 특히 아주 약간의 예술적 상상력만 동원해보면 더욱 그렇다. 자, 그럼 상상해보자. 물은 기존의 공간을 채우면서 동시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물로 인하여 생겨난 그 곳은 공기의 공간과는 다른, 아니 숫제 상반되는 듯한 장소가 된다. 물과 물이 아닌 공간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생명이라는 현상을 위해서는 서로 섞여들어가야하는 곳이다. 공간, 분리, 혼합, 흐름의 일체형,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매개체. 어떤가, 깊숙이 묻어두었던 예술혼이 마구 불타오르지 않는가? (…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최근 출시된 <워터보이>(아이완 作 / 아트북스)는, 물의 공간적 속성이 지니는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만화다. 아닌게 아니라, 이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물로 가득하다. 우선 주인공인 ‘워터보이’를 살펴보자. 항상 발이 물에 잠겨있고 그 물이 몸의 절반쯤까지 올라와있는, 살아있는 물주머니 같은 존재다.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의 방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곳은 항상 물로 반쯤 차있다. 그리고 어느날 물고기 아저씨가 와서 어항을 주고 가는데, 그 속은 물로 차있으며 물고기가 살고 있다. 그리고 물고기들은 어항, 주인공의 방, 나아가 워터보이의 몸까지도 물을 통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헤엄치며 논다. 그런 방식으로 물은 공간과 공간, 나아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이 작품 속에서 물은 더 이상 하나의 소재나 소품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다.
하지만 말로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소 난해한 작업이다. 그 점을 잘 인지하고 있는 듯, <워터보이>는 시각적 표현력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물이 만들어내는 열린 공간이 주는 매력을 잘 살려내는 커다란 가로판형, 일관되게 한 페이지에 한 칸씩만 담겨진 담담한 이미지의 흐름 등이 이러한 노력의 일부다. 또한 연필화 질감의 푸른 화면 속에 흑백 또는 단색톤의 캐릭터들이 펼치는 작가 특유의 연필화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환상적인 느낌을 한층 배가시켜준다. 특히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물은 험난한 파도라기보다는 공간을 채우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묘사 전략은 더욱 더 효과적이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물은 마치 작품의 주인공 그 자체라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워터보이>는 줄거리의 재미를 즐기는 만화가 아니다. 확실히 이 작품은 전통적인 기승전결, 주인공이 난관을 극복해나가면서 결국 성장하고 강해져서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와는 무척이나 멀리 떨어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단순한 그림 구경에 머무르지 않고 나름대로 독자들을 몰입시키며 다음 페이지를 넘기도록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묘사로서의 이야기’라는 힘 덕분이다. 워터보이의 세계는 하나의 그림 속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간을 옮겨가며 헤엄치는 물고기,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갔다가 사막으로 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어 간다. 마치 수백년전에 단테의 <신곡>이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그러하였듯이, 나름대로 장구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묘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워터보이의 시각에서 보자면) 나름대로 평범하고 소소한 행동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스며나오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묘한 일상성을 공감하도록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만화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즉 묘사로서의 이야기의 매력과, 실제로 매력적인 시각적 묘사를 결합시켜서 워터보이가 사는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상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만화라… 여담이지만, <워터보이>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레이블로 출간되었다(아마도 마케팅 상의 이유에서 내려진 명칭 선택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곁들인 그림의 연속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하는 예술양식이라는 속성에서 조금도 위배될 것이 없기에, 좋은 ‘만화’ 작품으로 칭함에 거부감이 없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용감한 동시에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미지의 흐름이나 경계선 없는 환상세계를 즐기는 것은 좋지만, 동시에 독자들로 하여금 낯선 독법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 작품 감상인양 개별적인 그림의 묘사에 완전히 빠져서도,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오락만화인양 줄거리 진행에 집착한 나머지 답답해 해서도 안된다. 즉 <워터보이>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즐기기 위해서는 기존의 독법이나 줄거리의 재미를 버리고 새로운 균형점을 찾으라고 독자들을 종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둘 사이의 간극은 결코 좁지 않다. 보통은 작가가 그런 새로운 비젼을 고집스럽게 내세울 때, 독자와의 균형관계를 생각해서 접점을 마련해주고 타협책을 찾아 나서는 것이 편집자/기획자의 몫이다. 즉 첫 번째 독자로서 ‘좀 더 편한’ 독법이나 구성으로 다듬어달라고 조르는 – 혹은 직접 다듬는 역할이다. 가장 구차한 차원에서라면, “이 책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즐길수 있다”는 식의 홍보 카피나 해설 칼럼 따위를 첨부하는 식으로라도 말이다. <워터보이>의 경우, 그러한 노력이 부족해보인다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불평은 이 정도다. 만약 충분히 오래 서가에서 밀려나지 않고, 넓은 층의 사람들에게 제대로 소개가 된다면 결국은 안정된 독자층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매력과 완성도를 갖춘 작품임에는 틀림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전히, 이 작가의 홈페이지(http://www.iwanroom.com)에서 봤던 예전의 온라인 작품 <점핑4>를 더 선호한다. 이야기라는 표현법에서 줄거리의 재미는 쉽게 포기하거나 가볍게 여길만한 지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입장인데다가, 작가가 그 것에 결코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독자로서, 작가의 다음 책에 대해서 바라는 한가지 소망이다.
2004. 10. 5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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