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의 미덕 – <바보>
통상적인 의미와 실제 대상의 괴리를 느끼도록 하는 호칭들이 가끔 있다. 예를 들어서 ‘미친년’은 어떨까. 통상적으로는 어떤 여자가 뭔가 황당한 짓을 했을 경우 그냥 피식 웃으며 내뱉는 호칭이다. 하지만 원래 이 단어가 진짜로 대상으로 하고 있던 것은, 무언가 엄청난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 그 충격으로 인하여 실성, 진짜로 정신병리학적으로 큰 문제가 생겨서 동네를 배회하던 그 사람들이다. ‘지랄한다’, ‘병신 삽질한다’ 등 일련의 비속어들이, 다들 훨씬 더 비극적이고 끔찍한 상태인 무언가를 일상의 친근한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바꾸어 놓는다.
<바보>(강풀(강도영) / 문학세계사)의 첫 머리는 바로 이 지점을 한번 긁어주면서 시작한다. “어린 시절 어느 동네에나 하나쯤 있었던 바보.” 어라, 생각해보니 필자가 어렸을 때도 동네에 바보가 하나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할 때의 바보가 아니라, 진짜 바보 말이다. 아니 더 자세히 생각해보니 이사 다니던 어느 동네에나 하나씩은 있었던 것 같다. 놀림 받고, 애들이랑 어울리는 어른.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면서, 어떤 애들보다도 더 애들 같았던 사람들.
<바보>는 ‘<순정만화 씨즌2>’라는 다소 안전한 선택의 부제를 달고 미디어 다음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이야기는 동네 바보 승룡이, 미국에 유학가서 피아노를 치다가 좌절해서 돌아온 지호, 승룡이의 친구이자 동네 양아치인 진수 등 여러 주인공들의 과거 사연과 현재의 응어리가 점차 풀려나가는 식이다. 그 방식은 무척이나 고전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엇나간 애정, 끈끈한 우정, 조건없는 희생 같은 구식의 감성은, 선천적 유전병, 어린 시절의 사고, 어린 시절의 약속 등 구식의 소재들과 만나면서 하나의 전형을 이룬다. 그런데 그것이 ‘지겹다’기 보다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재미로 녹아들어가는 자연스러움을 보이고 있다.
<바보>는 만화가 강풀(강도영)을 대중적 스타로 만들어준 <순정만화>,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연재했던 <미스테리 심리 썰렁물>(출간시에는 ‘아파트’로 제목 변경)과 마찬가지로 2권짜리로 묶여 나왔다. 항상 사전에 스토리를 완성하여 4개월 동안 집중 연재를 하고 수개월 휴식을 취하는 이 작가의 방식은, 무한 연재 속에서 스스로 망가지는 많은 연재만화들의 함정에서 의연하게 벗어나 잘 구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좋은 작품 발표 방식이기도 하다. 전작의 인기에 버금가는 호응을 불러일으켰다느니, 곧바로 영화화 판권이 팔려나갔다느니 하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들은 대충 넘어가더라도, 여하튼 이 작품의 특징과 미덕은 무척 분명하다. 형식적 특성인 칸 경계선을 흐리게 처리하고 그 대신 독백 대사로 연결하는 주관적 서술, 간혹 등장하는 스크롤 넘김 효과의 표현력을 활용하는 한 화면 이상 길이의 세로로 긴 칸(이것은 마치 책 만화의 경우 한 칸으로 두 페이지를 가득 채워서 시선을 제압하는 것과 비슷한, 아니 그 이상의 효과를 지닌다)은 이제는 굳이 다시 이야기하기도 뭣할 정도로 완전한 스타일로 완성되고 있다. 여러 주인공의 심리적 엇갈림에 의한 다중 시점 전개 역시 인간사의 감성적 면을 강조하는 이 작품에서 강한 효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어떤 형식적인 실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결국 그 형식을 통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전달하여 독자를 휘어잡는가 하는 측면인데, 능란한 이야기 페이스 조절과 무엇보다 여전한 – 아니 한층 더 강력해진 신파 정서가 <바보>의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작품에서는 누구하나 내심 순수함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 없고, 다양한 인간관계의 엇갈림 속에서 모든 문제는 정서적인 방식으로 해결된다. 항상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개연성 없이 몰려오는 여러 비극 속에서 주인공들은 사랑과 우정 말고는 기댈 곳이 없다.
이런 각박한 현실 세상에서 그런 것이 가능하겠냐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현실과 떨어져 있는 순수와 서정의 전도사가 필요하다. 바로, 바보 말이다. 바보 승룡이는 기본적으로 과거의 존재다. 정확히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성장을 그만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잊어버린 여러 가치들, 어릴 적의 어떤 빛나는 순간을 계속 현재진행형으로 기억한다. 작은별 행진곡이든, 동생을 돌봐줘야 한다는 단 하나의 약속이든 뭐든 말이다. 승룡이라는 바보라는 존재는 현실에서 잊어버린 소중한 무엇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나 다름없고, 그를 낙오자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거울로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그것은 과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끌어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우화처럼 포장된다. 누구나 순수한 삶에 대한 애정을 되찾는 이 따뜻한 작품에서 (나름대로 사연은 있지만) 유일한 악역이자 삶의 회복에 실패하는 ‘사’장이라는 자가 이 작품의 매개체인 바보 승룡이와 유일하게 교류하지 않은 캐릭터라는 점이 가정을 뒷받침해준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는 완성된다.
이 말은 반대로 하면 고스란히 작품의 약점이 된다. 기본적으로 과거와 순수를 매개로 해야 현실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한다는 것, 무조건적인 – 따라서 비현실적인 – 감상주의를 통해서 인간사가 진행된다는 것은 지나치게 달콤한 환상이다. 심지어 비극이라 할지라도, 달콤한 비극적 환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작 <순정만화>가 다양한 남녀 간 사랑을 통해서 나름대로 사람 사이 현재에 충실한 솔직한 소통의 중요함을 자연스럽게 강조한 것에 비해서, <바보>는 작품의 줄거리에서 진행되는 감동 이상의 지속적인 무언가가 부족한 측면이 있다. 애초에 사회파 만화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작가의 이력으로 볼 때 아쉬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미와 감동을 부인하거나, 심지어 약간이라도 덜 즐겨야할 필요는 없다. 능란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따뜻한 감성의 완성된 이야기의 매력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부당하다. <바보>는 재미있는 작품이고, 따뜻한 이야기가 그리운 모든 이들을 위한 멋진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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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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