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의 현장 – <나라가 불탄다> 필화 사건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역사를 다루는 만화, 아니 모든 창작물의 앞에는 지뢰밭이 놓여있다. 그 지뢰의 이름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라고 하는데, 덕분에 이러한 장르에서는 허구의 창작과 역사적 사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과제가 되어버렸다. 확실히, 사람들은 픽션 개입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은근히 민감하게 반응할 때가 종종 있다.

이러한 패턴은 얼핏 볼 때는 결국 창작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좋고 훌륭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 내막은 약간 더 노골적이다. 사람들은 실제와 다를 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든 아니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묘사될 때” 싫어함을 표명하기 때문이다. ‘임나본부설’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감을 표명하면서도, 한민족이 아예 대륙 중국의 절반 쯤은 먹고 들어갔다는 식의 <천국의 신화>에 대해서는 ‘픽션이니까’라고 대범하게 넘어갈 줄 아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적인 모습인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한 역사(?)만화가 필화 사건에 휘말렸다. <나라가 불탄다>라는 작품인데, <멋진 남자 김태랑> 등 ‘근성과 노력으로 출세하고 성공하는 남자’ 시리즈로 수십년간 정상급 인기 만화가로 군림해온 모토미야 히로시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중반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당연히 만주국, 관동군 등 당시의 역사적 배경들이 중요하게 펼쳐지고 있다(물론 이번 작품 역시 성공의 길을 걷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최근의 연재분에서 남경대학살이 소재로 다루어진 것이다. 일본군이 남경에서 양민을 대량 학살한 이 역사적 사건은, 일본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부분적 기억상실의 대상이다. 그런 일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소위 우파라고 불리우며 일본이라는 시스템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자들. 단순한 신인작가가 아니라 충분한 고정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중견 인기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아마도 더욱 위기의식을 느끼며 발끈했으리라. 그리고 출판사에는 항의전화가 쇄도하고, 급기야 출판사는 ‘단행본에서는 수정하겠습니다’라고 선언을 했다가, 얼마 후 아예 연재중단 선언을 했다. 나라가 불타지는 않았지만, 지면은 필화 속에서 불타 없어져버린 셈이다.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자는, 교훈을 얻을 때까지 그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는 격언이 있다. 그런데, 그 역사를 지금 현재보다 훨씬 좋았다고 생각하면서 의도적으로 다시 불러들여 오려는 세력이라면 어떨까. 애써 얻어낸 교훈마저도 부정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의 픽션을 역사로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괴이한 차선위반 역주행을 우리는 ‘수구’라고 부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바다 건너 나라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10. 22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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