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억은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도구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을, 그것도 지금 순간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살짝 바꾸어서 기억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방향은 대체적으로 ‘미화’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과거는 현재의 고난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이상적인(즉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안식처로 활용되기 때문에 아름다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덕분에 쓰리디 쓰렸을 젊은날의 고뇌는 청춘의 열정으로, 가슴찢어지는 실연은 성숙을 위한 디딤돌로 재해석되곤 한다. 실제로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기억해두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뇌세포들을 엉뚱한 조합으로 새로 이어붙이는 것이다.
군대 생활, 일명 ‘한국 남자들의 궁극적인 집단적 공유기억’이라고도 부르는 것이 있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병영생활은 뭐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당시의 가학/피학적인 고통은 최고의 안주거리로 즐거움의 대상이 되고, 심한 경우 심지어 전우애를 다질 수 있었던 뜻깊은 시절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마치 당연하다는듯이, 군대를 다루는 만화들 역시 대부분 과거의 턱없는 미화라는 함정에 깊숙이 빠져있다. <빤빠라 선착순>이나 <굳세월아 군바리> 같은 작품들이 묘사하는 인간적인 군대 생활의 이면에 담겨있는 원칙인 셈이다. 보다 흥미로운 경우는 마재권의 4칸 만화 <돌격! 앞으로>(잡지 <부킹>에서 99-02년까지 연재, 단행본 전 4권 발간)의 경우다. 이 작품은 처음 시작 부분에서는 군대에서 어처구니 없는 결정 때문에 이어지는 황당한 결과를 핵심으로 하는 짤막한 개그로 신선한 웃음을 선사했다. 즉 군대라는 기형적인 폐쇄사회의 모순을 제대로 웃음꺼리로 삼아주는 통렬한 블랙코미디로 첫 단추를 끼운 것이다.
하지만 연재가 진행됨에 따라서 점차 이야기는 주인공들 – 즉 내무반 성원들끼리의 캐릭터 드라마로 변해갔다. 그리고 캐릭터 드라마로 변하면서 다시금 군대만화가 흔히 빠지는 그 함정 – 아름다운 전우애와 추억 – 속으로 급속하게 빨려들어갔다. 그것이 당시 통신 게시판에서 다수 올라왔던 “군대를 희화화하다니! 너 방위 출신이지?” 따위 독자 반응들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작가 스스로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한계 때문인지는 사실 알 길이 없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여전히 군대라는 기억을 ‘더럽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려는 미묘한 습성을 조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현 풍속도 속으로 결국 돌아와버렸다는 점 뿐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9. 4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토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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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믹도치 – 오호~ 한번 봐야겠군요! 2004/09/15 21:40
– 玄武 – 그냥 더러운 추억으로 내다버리기엔 너무 아까우니까요..;
(돌이켜보면 즐겁기도 하고…) 2004/09/25 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