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만든 역사 – 『야후』[전자신문 091218]

!@#… 이상하게 전자신문 연재는 마가 끼곤 한다. 이번에는 랩탑님이 장렬하게 가사 상태에 빠진 때에 이번 주 마감임을 잊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마감전날의 독촉메일조차 배송사고로 소실. 그리고 실로 마감 코앞임을 강조하며 곧바로 원고가 안오면 지난달의 악몽을 되풀이하게 된다는 담당기자님의 엄포와 함께 급히 마무리… 미리 토픽들을 몇 회차 뽑아놨기에 천만다행. 여하튼 전자신문 게재본은 여기로.

 

아버지가 만든 역사 – 『야후』

김낙호(만화연구가)

역사라는 묵직한 주제를 마주할 때 당연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잊기 쉬운 것은, 역사는 사람이 만든다는 것이다.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이 있고 개인들은 그저 그것에 휩쌓여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인들이 만들어나가는 수많은 선택과 서로 주고 받는 영향들이 일련의 사건들을 일으키며 그 흐름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당대에 사회적으로 영향을 크게 행사하는 어떤 특정한 계층이나 역할을 맡은 평범한 사람들의 속성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 흐름을 읽기 위한 어떤 큰 맥락을 재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속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 하나가 바로 ‘아버지’다. 역시 한국현대사는 단순히 개인들의 자아실현이나 국가의 부국강병 같은 이미지와 거리가 있다. 그보다 사람들이 사회에 투신하고 적응해온 어떤 패턴 속에는, 수많은 아버지들이 가족을 구성해서 지키고, 다음 세대에게 그 룰을 훈육시키는 모습이 가장 두드러지는 첫인상 중 하나다. 복지도 이데올로기도 성장도 아버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그 와중에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어머니’가 그림자에 가려질 정도로). 아버지가 만든 세상에 적응하고 반항하고 그것을 닮아가는 모습은 이문열이든 김훈이든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한 역사물에서 넘쳐나게 등장하고 또한 독자들의 큰 호응을 받아 왔다. 하지만 가장 그 주제를 노골적으로, 뼈아프게 등장시킨 지난 십수년의 작품 가운데 하나는 바로 만화 『야후』(윤태호 저)다.

90년대의 굵직한 사건사고들을 관통하며 장중하게 내달리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묶여있는 두 아들들이다. 그 중 하나인 청년 김현은 빌딩붕괴의 참사 속에 아버지를 눈 앞에서 잃어서 계속 아버지에 대한 풀지 못한 저항과 화해의 감정 속에 괴로워한다. 그의 아버지는 겉으로 권위를 내세우고 엄하지만 내면은 그저 약한 사회의 소시민 구성원일 뿐인 보일러공이었다. 그 결여감 속에 학교를 자퇴하여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도 해보지만 결국 또다른 아버지 역할을 해줄 사람을 쫒아 수도경비대라는 가상의 특수부대에 입대하여 대테러작전을 빙자한 정권 유지 폭력 활동을 하게 된다. 다른 주인공인 신무학은 잘 나가는 기업회장 아버지의 밑에서 그의 의도에 따라 자라나지만 그것에 대한 막연한 불만으로 방탕한 탈선을 하고 있다가, 김현의 모습에 자극받아 주어진 레일을 벗어난다. 즉 기업의 2세 승계, 권력과의 유착, 병역사기로 점철된 아버지가 만든 길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김현과 함께 수도경비대에 입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듯, 아버지들이 만들어온 그 90년대의 한국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바로 민주적 상식과 물리적 안전이 갖추어진 사회 기반이라는 것 말이다.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열린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전두환이 물러난 자리에 자발적으로 노태우를 뽑아주었으며, 정경유착의 시대보다 더욱 재벌 위주의 산업체계 독점력이 강화되고, 나아가 사회 전반의 안전불감증이 그 무서운 “결실”을 터트리는 세상이었다. 거의 상징적 이미지를 획득한 그 유명한 삼풍백화점 붕괴의 와중에, 결국 사고 현장의 끔찍함 속에서 김현은 억누르고 있던 모든 감정이 폭발한다. 죽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분노, 그것이 세상의 모습 그 자체임을 일거에 깨닫고는 괴상하게 무감각해진 위선으로 가득한 한국사회를 대상으로 테러리스트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전투장비를 모두 갖추고 탈영, 사회의 취약한 부분을 꼬집으며 도심 연쇄 테러를 감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물들은 예정된 파국을 향하여 거침없이 달려간다.

『야후』의 미덕은 개인 가족사의 작은 차원과 선 굵은 시대적 비유를 오가는 이야기 솜씨다.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 반항과 어느틈에 그의 모습을 닮아가며 갈등하는 모습은 자신들을 억압하던 사회에서 권력자의 충복으로 기능하는 물리적 공권력이 되어 사회의 다른 내몰린 자들을 탄압하는 모습과 오버랩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성장을 이루기도, 다시 저항의 길로 나서다가 파멸을 향하기도 한다. 그 과정은 수도경비대의 장비가 sf적 상상력이 가미되었다고 해도 너무나 현실적이고, 실제 사건들에 기계적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는 개인과 조직을 그리고 있으나 너무나 격정적이다. 아버지의 세상과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그것을 바꾸고자 싸우는 모습에는 그런 모순과 애증이 가득할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주인공 이외의 사람들이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무덤덤한 구경꾼들도 구경꾼들이지만, 작품을 읽고 있는 지금의 독자들 말이다. 작품이 묘사하는 그 한국 90년대사의 모습들을 과연 00년대의 마무리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제대로 성찰하고 직면한 적이 있을까. 아버지들이 만든 세상의 패턴과 싸우고 화해하고 넘어서는 선택을 과연 지금 얼만큼 해내가고 있는 것인가. 깊은 질문들을 끌어올려주는 매력이 있는 잘 만든 가상 역사물을 접하며, 단순한 역사오락물로 받아들일 것인지 그 이상의 효용을 발견할 것인지 자문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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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전자신문의 ‘만화로 보는 세상’ 연재칼럼. 필자들이 돌아가면서 ‘만화의 사회참여’, ‘만화 속 역사’, ‘만화와 여성’, ‘웹툰트렌드’ 등의 소재를 다룬다. 제일 무겁고 재미없어지기 쉬운 파트인 ‘역사’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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