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산을 넘어가기 – <태백산맥>(박산하) [으뜸과 버금 0501]

!@#…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재미있게 잘 만든 경우. 아직 1권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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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산을 넘어가기 – <태백산맥>(박산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원작으로 만화로 만든다, 라는 기사를 처음 보았을 때는 기대감보다 걱정이 앞섰다. 태백산맥이 어떤 작품인가. 사람과 시대를 관통하면서 재미와 깊이를 두루 갖춘, 자타공인의 최강급 현대사 대하소설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것을 학원폭력물 <진짜사나이>이래로는 중급 히트는 있지만 확실한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것은 못만들어낸 박산하 작가가 만화로 만든다니… 그렇고 그런 보통의 아동 학습만화가 나와버렸다가 금방 잊혀지겠군, 이라고 속단했다. 사실 그 작가의 그쪽 계열 전작인 <칼의 노래>도 무난하기는 했지만 별로 특별히 볼만한 구석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태백산맥이라는 작품은 무려 임권택 감독이 영화화에 달려들었으나 미적지근한 결과물만을 내버린 전력도 있고.

그런데, 1권을 펼쳐들고 보니… 이것 의외로 재미있다. 아니, 사실 꽤 잘 만들었다. 처음 등장하는 수많은 주연급 캐릭터들부터가 벌써 엇비슷하고 밋밋한 미소년미소녀가 아니라 강단이 있고 표정 풍부한 ‘한국 아이들’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공간 역시 적당히 무국적화한 가상공간이 아니라, 한국식 시골 풍경이다. 페이지 연출 역시 무난한 클로즈업으로 점철하지 않고, 역동적이지만 현란하지 않도록 적절하게 칸 배분을 조율해 나아가고 있다. 한눈에 봐도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다고나 할까, 말이 되는 ‘작품’으로서 완성 짓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쓸데없는 해설자도, 귀여움 떠는 억지 조연도, 남녀관계를 맞추기 위한 무의미한 미소녀도 아직 투입된 바 없다. 줄거리의 압축 역시 이전에 임권택 감독의 극장 영화보다 훨씬 페이스의 배분이 좋다. 염씨 형제, 하대치, 김씨 형제, 명자… 주요 등장인물들의 어린시절이 모자람 없이 촘촘히 배치되어 이후 극의 긴장감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해방후 성장한 염상구의 귀환에서 1권을 마무리 짓는 노련함까지. 뭐랄까, 만약 아이에게 단순히 ‘좋은 만화책’ 정도가 아니라, ‘좋은 책인 것은 기본이고, 만화로서 좋은 책’을 골라줘야 한다면 별 망설임 없이 골라줄만한 책으로 나와 주었다. 

물론 문제는 과연 필자가 재미있어한 만큼, 이 책이 원래 목표로 하고 있는 독자층인 아이들도 좋아할 것인지다. 1권은 그나마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입할 구석이라도 있었겠지만, 이들이 모조리 성인이 되어 정치적 싸움에 휘말리는 이후 이야기들에 어떤 재미를 느낄지, 모르겠다. 온몸에서 빔이 나가는 마법 필살기로 상대를 쓰러트리거나, 화려한 주먹다짐을 하거나, 아니면 스펙타클한 폭발으로 수놓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전체적 색조를 포함한 시각연출 역시, 아이들이 흔히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셀 방식의 감각과는 거리가 있다. 나아가 줄거리 전개 면에서도, 염상구 정도를 제외하자면 명쾌하게 승부를 가릴 수 있는 대결+성장구도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의 취향에 맞추기 쉽지 않다. 사실 이 작품을 보면서 가장 의외였던 점이기도 한데, 작품을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억지로 그런 요소들을 넣어서 적극적인 자기 타겟 공략에 나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원작의 품격을 존중해주는 쪽으로 기운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은 다시 말하자면 정작 쓸만한 작품을 만들어 놓고서도, 원래의 독자층에게 외면 받아서 묻혀버리는 아쉬운 일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만화 <태백산맥>은, 문학작품을 적당히 만화로 옮기기만 한 것에서 의미를 찾는 여러 “명작만화”류 들과는 다행히도 스스로 차별화를 꽤하면서 1권을 시작했다. 부디 보다 본격적으로 펼쳐질 이후 전개에서 원작의 무게에 눌리거나 나태하게 기대어 버리지 않고 본격적으로 만화 <태백산맥>으로서의 매력을 발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으뜸과 버금 2005. 01.]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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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thought on “커다란 산을 넘어가기 – <태백산맥>(박산하) [으뜸과 버금 0501]

Comments


  1. [네이버덧글 백업]
    – 오무비씨 – 이 글을 읽고 한번 봐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05/01/28 2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