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진행형 – 『26년』[기획회의 070601]

!@#… 하지만 따지고보면 지금은 27년. ‘서평’이라는 것은 종이책으로 단행본 출간된 후에야 쓸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좀 불편하다. 이 정도 레벨의 물건을 정작 작년에는 한국만화 전반 추천이나, 그냥 개인 포스팅에서 밖에 다뤄주지 못했으니 원… 연재중인 웹만화를 바로 평가하고 추천할 수 있는 공식 지면도 하나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결국, 없던걸 새로 만들어내야겠지만.

현재진행형 – 『26년』

김낙호(만화연구가)

“역사는 현재와의 대화”라는 오래된 명언을 다시 인용할 필요도 없이, 지나간 일이라는 것은 결국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의 양분이 되어주기에 비로소 의미가 있다. 과거에 배운 것은 현재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주고, 과거에 겪었던 어려움은 현재의 조건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게 해준다. 그리고 과거의 정리되지 않은 사건은 현재 우리의 발목을 잡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세우도록 종용하곤 한다. 만약 그것이 개인사의 문제가 아니라 좀 더 큰 차원 – 사실 국민이니 민족이니 나라니 하는 범주들을 동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 이라면, 한 사회의 현재를 가늠하는 지표가 되어준다. 특히 한국의 경우 온통 해방 후 현대사가 워낙 인과응보를 깨끗하게 무시한 닥치고 전력질주를 일삼아온지라, 그 결과 참 사회체제에 대한 신뢰가 턱없이 부족한 현재를 살고 있다. 이제는 잘 알려지다시피, 그런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대표적 사건 중 하나가 바로 5.18 광주민주화항쟁이다. 물론 법적인 평가도 끝났고 책임자 처벌과 사면도 이루어졌다지만, 가해자의 반성도 자숙도 없는 이상은 역사적 교훈이 아니라 그저 ‘비극’으로 치부되고 끝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희미해져가기 때문에, 역사로부터 교훈을 도출해낼 마감시간은 점점 임박해온다.

『26년』(강도영/전3권/문학세계사)은 바로 5.18 광주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재의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당시 광주민주화항쟁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그 26년 후인 오늘날을 다루고 있다. 역사가 아니라 그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재의 모습인 것이다. 작가의 전작들에서 선보인 바처럼, 이번 작품 역시 무언가 공통점이 있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한다. 그 공통점이란, 바로 ‘광주의 자식들’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그날의 총칼에 부모를 잃었고, 어떤 이는 친구를 잃었고, 어떤 이는 그저 도망쳐 나와서 평생 한이 되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가해자의 입장을 강요당했던 것에 괴로워하며 후회하고, 다른 이는 그것을 스스로 정당화시키기 위해 권력의 개가 된다. 지금은 사격선수가 되어 있건, 조각가가 되어 있건 기업 회장이 되어 있건 그들에게 정리되지 않은 5.18의 역사는 현재를 짓누른다. 그리고 전두환 암살 작전은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의도적이든 우발적이든 수많은 현실 속의 모순들을 건드린다. 전두환 암살이라는 소재 자체부터가 당장 사적 복수와 공공적 법 집행에 대한 질문이다. 충분히 청산되지 않은 역사적 사건의 괴수에 대한 사적인 복수는 정의로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혹은 정의는 아니더라도 피해자의 평생 한이기에 용납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청산되어야 하는가.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또 어떤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강요에 의한 가해자는 어디까지 가해의 책임을 져야 할까. 여기에서 이어지는 강요된 참회와 용서의 문제 역시 결코 단순하게 해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작품 속에서 작가는 용서해줄 용의는 있으니 용서를 진심으로 제발 좀 빌어다오, 라는 식의 소결을 내리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무거운 발상만으로 작품이 만들어진다면 마치 수많은 ‘진상위 보고서’들처럼, 아무도 안 읽고 끝날 가능성이 더 크다. 작품의 팽팽한 긴장감은 이전에 영화 『꽃잎』이나 드라마 『모래시계』처럼 5.18을 억울한 사연이 있는 한 때의 비극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무엇으로 다루기에 비로소 가능하다. 살풀이가 아니라, 여전히 이것을 기억하고 또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는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소재 자체의 무게에 억눌리지 않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26년』은 단순히 역사공부와 사명을 이야기하기보다, 스릴러의 문법으로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재미와 융화를 꾀하고 있다. 역사책도 사진전도 아니라, 오락적 재미를 갖춘 웰메이드 대중 서사문화 작품인 것이다. 이미 하나의 완성 단계에 이른 이야기 완급 조절 능력, 다중 시점의 교차, 결정적인 순간을 접어내는 칸 연출 등 높은 기술적 완성도는 독자들에 대한 거침없는 흡입력으로 돌아온다. 주제의식의 깊이, 그것을 표현해내는 구사력, 대중과의 긴밀한 호흡 등 모든 요소들이 이 작품을 오늘날의 한국만화계는 물론 대중 서사문화 일반이 내놓을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 시키는 것에 부족함이 없다. 시쳇말로, 감동과 재미, 문제제기와 극적 카타르시스가 모두 확실하게 구비된 명작이다.

하지만 거꾸로, 작품의 한계 역시 명확하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최대한 궁극적인 피해자로 설정했기에, 그럼에도 그런 아픈 일이 일어났고 남아있는 이유로서 하나의 ‘절대악’ – 전두환 – 을 상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제거한다고 해서 과연 5.18의 지난 26년간 세월과 사연이 크게 달라질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과연 어떤 대답이 가능할까.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하나의 절대악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작은 악업들이 쌓여온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두환이 5.18일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모든 공범들에 대한 문제제기가 부재하다. 그 중에는 그의 심복들이나 관료들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광주를 빨갱이 폭동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그것이 거짓말로 드러난 후에도 애써 잊어버리려고 했던 평범하고 비겁한 수많은 ‘시민들’도 포함되어 있다. 작가는 사람들의 근본적 선함에 대한 지나친 애정을 표현한 나머지, 바로 그들의 다른 일면 속에 담겨있던 비겁함과 몰염치의 조각들이 모여서 현재의 문제들을 만들어냈음은 애써 외면한다 (그러니까 아직도 그 때 그 사람들이 민주적 선거에 의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있는 것 아니던가). 주인공들이 모두 결국은 광주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설정을 통해서 이 지점을 넘기는 면이 있지만, 진정한 성찰은 자기 자신들의 속에까지 메스를 들이댈 때 가능하다는 진리를 담아내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세로 스크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온라인 연재작을 책으로 만들기 위한 고심은 작가의 전작들을 계속 내온 출판사답게 어느 정도 안착했다. 세로로 긴 칸구성을 페이지 당 세로2단으로 배열한 것. 책의 형식으로 읽기에 그다지 작품의 매력을 잘 살려주는 구도는 아니지만, 아예 종이 페이지용으로 완전히 재편집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선택인 듯 하다. 3권의 분량으로 묶어낸 것 역시 구입 편의를 생각할 때 좋은 방식이다. 다만 5.18에 대한 배경설명 등 젊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는 서플먼트가 좀 더 보강되었더라면 하는 기획측면의 소극성을 추후 2판에서라도 넘어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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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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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1
강도영 지음/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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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어차피 26년에서 사용된 긴 컷들을 보면 안될일이긴 하지만
    횡 스크롤은 왜 사용안하는지 모르겠어요. 책으로 만들기엔 그게 더 편리할텐데 말이죠.

  2. !@#… ulll님/ 사실 서양쪽 웹만화들은 초기부터 횡스크롤을 꽤 자주 쓰고 있죠. 횡으로 읽는 4칸만화에 익숙한 동네니까요. 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책으로 만들기에 쉽지 않은 건 마찬가지더군요. 아예 종이용으로 재편집 재연출을 하지 않는 한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3. 절대악을 상정하고 수많은 공범들을 숨기기때문에 바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인 대중적으로 성공한 서사가 가능한 거 아닐까요? 진실의 본질에 근접하는 것과 대중적으로 성공하는 서사는(스펙터클과 카타르시스의 면에서) 처음부터 다른 길 위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혹시 이 두가지가 매우 잘 어우러진 작품이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한국말만 할줄 아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걸로요.(매우 절실한 부탁임)

  4. !@#… 모과님/ 하지만 강풀 만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달라고 절로 욕심을 내게 되지요. :-) 카타르시스와는 거리가 멀지만, 나름대로 대중적 재미를 주면서도 일상적 개인들의 ‘공범’ 측면을 잘 부각시킨 작품으로는 영화 ‘박하사탕’을 꼽고 있기는 합니다. 사실 고전 사회파 영화들이 은근히 그런 쪽이 잘 들어있기는 한데 (라쇼몽이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든), 역시 호쾌한 오락성과는 거리가 다소 있죠. 음… 좀 더 기억을 잘 가다듬어봐야할 것 같군요. 멋진 화두 감사.

  5. 그게 글쓰기용 욕심이 아니라 진심어린 욕심이었다니 좀 놀랐네요. ㅎㅎ 제 기억으로는 파업전야나 켄로치의 몇몇 작품이 그런 느낌이었는데 그것들 또한 폭발적인 반응은 없었지요.
    꼭 역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사태의 본질을 명확하게 전달하면서 폭발적인 오락성을 가진 작품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