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드하고 긴 글의 연타. 하기야 나중에 내 개인페이지 capcold.net으로 블로그를 이전하면, 네이버분점은 주로 하드한 글 백업용으로만 쓰게 될터이지만. 그게 언젠지는 나도 모른다니깐.
!@#… 여튼. 지난달에 발간된 계간만화 2005 봄호에 실린 글이다. 이로써 다섯계절째 계간만화 커버스토리 개근. 종종 해왔듯이, 이번에도 “지면상 다 못한 이야기들이 담긴 풀버젼”. 단, 제목은 편집부에서 달아준게 꽤 마음에 들어버려서 그걸로 간다(부제가 원제였다). 이건 일종의 맛보기라 생각하고, 잡지에 들어있는 전체 커버스토리를 다 읽으면 대략 교양 수준이 100배 상승하리라 사료된다. 아님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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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 묻힌 만화, 게임을 넘어서는 만화
– 만화와 게임의 행복한 이중나선을 위하여
김낙호 (본지편집위원/만화연구가)
만화의 ‘위기’를 논하는 거의 모든 자리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청소년들이 다들 게임 하느라고 만화를 안 본다”. 그만큼 게임, 정확히 말하자면 컴퓨터 게임은 불과 수십년 동안 빠르게 대중문화의 화려한 승부사로 급부상했다. 만화 <리니지>를 기억하지 못해도 온라인 게임 <리니지>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앞의 이야기는 도대체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참 묘한 울림을 주는 패배주의적 발언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함의는 얻어낼 수 있다. 바로, 만화가 게임에게 무언가를 뺏겼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 두 가지는 지금껏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속에서 원소스멀티유즈니 하는 식으로 협력을 구가하든지(라그나로크 온라인, 열혈강호…뭐 끝도 없다), 아니면 만화의 뜻을 접고 게임업계로 투신하든지(여튼 월급으로 수입이 지불되니까 말이다) 나름대로 현실은 움직이고 있다. 그 호환성의 정체,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는 만화, 게임은 게임으로서 특별한 매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아니, 하이퍼 어쩌고 하는 현학적인 이론과 낯선 용어들로 치장하기보다는 그냥 단순하게 질문해보자. 왜 나는 아직도 만화가 여전히 즐겁고, 게임도 즐거운가. 더 즐겁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표현의 호환성
만화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시각적인 속성일 것이다. 속칭 ‘만화(체 그림)’이라고 일컫어지는 일련의 약호화된 그림양식, 즉 카툰화법 말이다. 만화가 게임에 대해서 가장 먼저 행사한 영향 또는 연계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컴퓨터 게임이 단순한 화면상의 신호 점멸에 가까웠던 <핑퐁>의 시대를 넘어서 캐릭터와 줄거리가 있는 문화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그 이미지는 카툰화법이라는 틀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만화와 이웃을 자처했다. <팩맨>의 둥그런 주인공이든, <스페이스 인베이터>의 귀여운 곤충형 외계인들이든, 만화의 특기분야로 널리 인정받은 카툰화법의 형상을 취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 역시 명확하다. 카툰화법은 무척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카툰화법으로 만들어진 형상들은 정해진 적은 정보용량 안에서, 수용자의 상상력으로 전체를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도록 유도한다. 점 두 개와 곡선 하나만으로 구성된 추상적인 형체 속에서 미소 짓는 얼굴을 연상시키도록 하는 기술이 바로 만화라는 장르에서 그토록 갈고 닦아온 카툰화법이며, 항상 정보 저장/처리 용량의 한계와 싸울 수 밖에 없는 컴퓨터 게임이라는 장르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가 되어주는 것이다. 사실 적극적으로 실사풍의 화면을 만들고 싶은 의도로 시작한다 할지라도, 굵은 입자(픽셀)과 한정된 움직임만이 부여된다면 수용자들은 그것을 ‘만화적’ 느낌으로 바라보게 된다. 닌텐도 왕국의 일등공신인 <슈퍼 마리오 형제>의 사례는 너무도 유명하다. 역동적인 배경화면을 구사하면서도 한정된 용량을 극복하기 위해서, 구름 그림과 수풀 그림을 같은 형상에 색만 바꿔서 처리한 것이다. 둥근 돌기들이 평면적으로 부풀어 올라있는 전형적인 카툰화법 특유의 표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아가 용량문제가 기술의 발전으로 상당부분 해소된 현재도, 캐릭터에 대한 수용자의 적극적인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서 카툰화법을 채용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또한 만화는 컴퓨터 게임에게 왕좌를 뺏기기 전까지 잡식성 복합매체의 모범으로 군림해왔다. 만화와 게임의 호환성에 어떤 ‘기질’적인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그 복합성이다. 만화는 각각 따로 추구되기 십상이었던 그림과 글을 마음대로 합쳐버렸고, 여러 그림들과 공간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해버린다. 오감과 감정의 흐름을 시각이라는 틀로 공감각적 재구성을 해버리며, 단행본과 잡지, 신문 등 지면 속성의 경계선을 지워왔다. 멀티미디어라는 것은 컴퓨터에서 동영상 굴러갈 때에만 쓰는 용어가 아니라, 바로 이런 속성들 일반을 나타내는 말인 것이다. 만화가 현재의 컴퓨터 게임 양식에 미친 영향력은 바로 이런 잡식성이다. 글로 설명하는 것이 효율적일 때는 화면에 글자로 표시되고, 연속되어 보여지는 그림들이 필요할 때는 그렇게 표현한다. 특정 캐릭터의 발언은 말풍선 또는 이에 준하는 박스 구조물로 연결한다. 캐릭터들의 대사와 줄거리 진행 개념이 중요한 RPG 계열 게임의 경우 특히 이러한 진행방식을 중용하고 있다. 고전적인 진행형인 <울티마>든, 온라인 생활 커뮤니티에 가까운 <마비노기>든 마찬가지다. 이것 역시 초창기에는 게임 콘솔에서 음성 구현 문제라든지 하는 기술적 한계가 작용했지만, 그 이상으로 표현 자체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 기대고 있다.
상호작용성도 마찬가지다. 만화의 독서를 위한 독자 자신의 역할은 지대하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길어지겠지만, 요약하자면 만화독자는 만화 속 사건의 과정과 시간의 흐름을 직접 통제하면서 읽는다(여기에 대해서는 <만화의 이해>(맥클루드 저)라는 고전 이론서를 펼쳐볼 것을 권한다). 추상적인 문자코드의 덩어리를 독자가 완전히 혼자 재구성해야하는 대부분의 문자문학과는 달리, 만화는 작가가 ‘보여주는’ 방식과 독자가 ‘보는’ 방식이 밀접하게 상호작용해야 비로소 제대로 감상될 수 있다. 수용자의 노력이 사건을 진행시키는 이러한 상호작용성의 기본 아이디어는 컴퓨터 게임에 있어서는 아예 기본 존재기반이 된다. 특히 미연시(미소녀 연예 시뮬레이션) 장르는 대부분 아예 만화식의 페이지 넘김 효과를 그대로 이식해 넣기도 한다. 하지만 물론 만화가 게임의 아버지라고 친자확인소송을 걸 생각인 것은 아니며, 복합매체적인 표현시도가 모두 다 만화만의 고유한 것이었다고 거짓된 소유증명을 하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은 짓이다. 다만 만화에서 중점적으로 연마해온 여러 기법들이, 컴퓨터 게임의 가장 근본적인 보여지는 방식에 일정 부분 흡수되어 있다는 것은 이 두 장르의 호환성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가 되어준다.
문화의 호환성
표현적 기반만큼이나, 문화적 속성 역시 중요하다. 만화는 대중문화 부흥의 시대 속에서, 가장 대중적인 대중문화로서 탄탄한 지위를 쌓아올렸다. 쉽고 효율적인 독해, 저렴한 대량생산, 창작과 수용 사이의 상대적으로 낮은 진입장벽 등 매체 자체의 장점을 십분 살리며 자기 자리를 잡아나간 것이다. 미국만화 황금기의 수많은 하드보일드 수사물과 슈퍼히어로물의 권선징악에서 <공포의 외인구단>이 표현하는 한국 80년대의 가장 대중적 정서의 시대정신까지, 대중성과 장르성이라는 키워드의 대표격을 만화가 일임해왔다. 대중음악보다 구체적이며, 대중영화보다 제작이 쉽다는 점을 무기삼아 대중만화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대중들과 호흡하며 장르문화의 정수를 쉽게 점할 수 있었다. 가장 탄탄한(또는 나쁘게 말하자면 뻔한) 장르적 속성들은 대중만화 속에서 대중적으로 대량으로 재생산되었다. 가장 소란스러운 개그는 개그만화에 있었으며, 가장 황당한 액션은 액션만화에 있었으며, 가장 처연한 비극적 로맨스는 로맨스만화에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만화 같다”는 당혹스러운 폄하가 일상용어가 되기는 했지만, 그만큼 만화의 위력을 반증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대중성을 노리는 다른 대중문화 장르가 만화가 지니고 있는 장르규칙 및 이야기 구조들과 어떤 식으로든 공통분모를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컴퓨터 게임 특유의 단계적 문제 해결과 성장의 서사구조는 대중적인 장기 연재만화의 그것과 맞닿아 있으며, 환타지, SF, 무협 장르에 대한 선호경향 역시 만화와 공유점을 이루고 있다. 나아가 성장에 대한 동경과 미형 캐릭터에 대한 강한 집착은 특정 장르의 만화와 컴퓨터 게임들을 하나의 취향문화로 묶어서 즐길 수 있도록 하기에 충분하며, 특히 아동 및 청소년층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측면에서, 미연시 계열 게임인 <월희>의 일본 성공 사례는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준다. 만화/애니메이션/게임에서 숱하게 사용되어온 장르 클리셰들의 조합 그 자체인데다가 심지어 대중 그 자신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마투어 동인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창적 완성도의 이야기와 주류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규연재만화 및 수많은 동인 만화가 쏟아진 것은 물론이며, 또다른 동인게임들을 잉태하기도 하는 등 대중의 손에 의한 파급력에 대한 상징적 사건인 셈이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하나의 공통 취향시장으로 묶어서 접근하고 원소스멀티유즈를 강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닮으면서 다른
자, 그럼 매체로서 만화가 컴퓨터 게임보다 선배(또는 선조?)이고, 호환성이 있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그 말을 뒤집어보자면, 게임이 그만큼 더 첨단의 무엇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게임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매체적 범용성이다.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현재의 컴퓨터 장비는 모든 기존 미디어의 속성들을 재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음성, 고화질 동영상, 실시간 대화는 물론, 인공지능 시스템 역시 경악스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지금까지 발전했다. 출판매체로서 만화가 지니는 모든 표현기법은 기술적으로 컴퓨터 게임 속에 흡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물론 모니터 해상도 문제라든지 “그래도 침 뭍이며 종이 책장을 넘기는 맛을 어떻게 따라 잡겠는가” 등의 보수적 독서패턴이라는 장벽 등은 있지만, 그것 역시 언젠가는 넘어서게 될 태세다. 그것에 덧붙여 한층 강력해진 상호작용성 – 즉 아예 직접 캐릭터 자체까지도 컨트롤해서 줄거리를 이끌어나간다는 매력이 있기에, 게임은 궁극의 간접체험으로 높은 몰입도를 자랑한다. 덕분에 대중문화 전 분야에서 가장 높은 산업적 성장동력을 인정받고 있는 경지에 이른지 오래다.
그리고 이런 환경이기 때문에 만화가 게임에게 ‘먹혀버린다는’ 공포의식이 범람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만화에서 얻던 대중적 장르문화 오락의 즐거움 가운데 상당부분을 게임이라는 매체에서 더 효과적으로 충족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부분은 솔직히 아쉬워할 것도 애석해할 것도 없는 엄연한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TV가 발명되었다고 영화산업이 망하거나, 혹은 영화가 TV의 하위 분야로 전락했던가? 한탄만 하고 있기에는 오히려 게임이 못하는 부분, 하지만 만화이기 때문에 해내는 부분들이 여전히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다.
어려운 이론은 다 걷어내 버리고 말하자면, 게임 내러티브의 가장 확고한 속성은 “조작성”이다. 높아진 쌍방향성이니 상호작용성이니 하는 이야기는 게임이라는 장르에 있어서는 결국 플레이어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 캐릭터의 선택을 직접 조작한다는 것이다. 버섯을 밟고 점프를 할까 아니면 돌진할까, 여성A를 동물원으로 데리고 갈까 아니면 B와 영화관에 갈까, 투명망토를 쓸까 아니면 불의 검을 살까… 이 조작성이라는 것은 바로 게임의 기본 존재 조건이다. 직접 선택하고 조작을 할 때 그것이 게임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에 다를 바 없다.
“지금껏 당신이 떠나셨던 모든 다양한 휴가 어디든지, 항상 똑같았던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당신입니다! 어딜 가든 당신은 그냥 당신입니다! 이제는 당신 자신으로부터 한번쯤 휴가를 떠나실 때입니다.”
<토탈리콜>이라는 SF영화가 있다. 가상의 기억을 주입시켜서 휴가여행(의 기억)을 다니는 미래의 이야기인데, 그런 ‘여행사’가운데 한 곳의 호객행위 대사다. 그리고 게임 등 가상체험형 이야기와 전통적 서사구조의 공존에 대한 중요한 함의가 바로 여기에 담겨있다. ‘이야기’라는 것의 매력은 무엇일까?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이 행동하는 방식들을 간접적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우리에게 왜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여러 가지 설명이 나올 수 있겠지만, 크게 바라보자면 한 가지는 공감의 재미, 즉 주인공들의 감정과 활동상에 이입을 해서 같이 난관을 극복해 나아가는 듯한 쾌감을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외성의 재미, 즉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과 “나라면 결코 했을 리 없는 선택”을 내리는 주인공을 보면서 자신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얼마나 잘 배합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이야기의 재미가 좌우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게임은 조작성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게임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강점이자, 결정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상상 범위를 벗어나는 초월적인 선택이 불가능한 것이다! 즉 플레이어 자신의 선택이라는 틀에 갖히게 되어 나와 다른 선택을 하는 자에게 몰입해서 세계관을 넓혀나가는 것이 힘든 것이다. 동네 조기축구회에서 직접 운동화를 신고 뛰는 것과, 월드컵 경기를 관전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면 쉽다. 물론 직접 뛰는 것은 즐겁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상적인 의외의 오버헤드킥이 연출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게임은 조작성을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효과적인 완성형 서사연출을 직접 만들어내기가 훨씬 힘들다는 것이다. 거꾸로 서사연출에 더 신경을 쓰면 조작성(속칭 ‘자유도’)이 줄어든다. 완성된 시나리오로 가면 그것에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선택의 폭은 줄어들 수 밖에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게임이기 때문에 선택을 강요받는다. 즉 점점 예시가 줄어드는 객관식 문제처럼 되버리고, 그 균형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깨져서 게임으로서도 이야기 자체로서도 애매한 졸작이라는 비극적 결과로 끝난다. 게임으로서 최소한의 조작만을 남기고는 이야기 진행의 완성도에 힘쓰는 ‘비주얼 노블’ 계열 게임들이 좋은 예다. 이야기의 흐름 뿐만 아니라 시각연출 자체도 마찬가지다. 플레이어의 조작 자체가 최대한 잘 드러나도록 하는 인터페이스 중심의 비주얼이 필요하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직접적 행위에 의하지 않은 이야기 진행에서 다양한 시각표현에 제한을 받는다. <바이오해저드>시리즈처럼 다양한 카메라워크를 구사하는 편에 속한다 할지라도 기본적으로는 플레이어 1인칭 전지적 또는 관찰자 시점일 수 밖에 없다. 만화에서 종종 쓰이는 회상이나 갑작스러운 사건 국면전환 등은 플레이어에 의한 ‘이야기 진행’을 방해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게임에서는 하나의 게임 단계와 다음 단계 사이에 있는 간막극 양식으로 진행할 뿐이다. 즉 완성된 연출의 매력을 발휘하기가 훨씬 힘들다. 아무리 게임이 발전하더라도, 일방향 선형 내러티브의 매력은 감소하지 않는다. 좌절하고 짐을 싸버리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만화와 게임의 동료관계
자, 그렇다면 게임의 존재라는 전제조건 위에서 만화가 걸어가야 할 길은 대략 윤곽이 잡힐 듯 싶다. 게임과의 호환성을 극대화하거나, 게임과의 차별성을 극대화하는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가 소위 말하는 OSMU 중심형 접근일테고, 후자의 경우가 만화 특화형 접근이다. 앞의 것은 이미 수도 없이 논의되고 있으니(심지어 필자도 본 지면의 이전 호에서 논의한 바 있을 정도다) 생략하고 뒤의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
우선 만화가 만화로서 특화된 자기 지분을 점유하고 싶다면, 우선 게임이 스스로 못 만들어내는 내러티브까지 제공해줄 수 있을 정도로 지속적으로 이야기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방향이 필요하다. 알다시피 같은 수준의 깊이를 갖추었다고 볼 때 게임 한편 제작보다는 만화 한편 제작이 더 시간과 비용이 덜 들고, 창작자 개개인이 더 큰 창작지분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게임, 즉 플레이어의 자율적 선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강력한 내러티브로 승부해야 한다. 기독교의 ‘성경’이 컴퓨터 게임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대중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게임으로 이식하기에 워낙 까다로운 내러티브이기 때문이다. 시각적 표현기법 역시 마찬가지다. 만화 특유의 방식인 칸 간 공간배치가 지니는 연출효과의 매력들을 미묘한 부분까지 극대화하는 것이다. 역동적인 다중시점, 그리고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계되는 칸 배치의 묘를 발휘하는 것이다. 단순히 주인공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한 연출이 아닌, 이야기 자체를 가장 효과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한 묘사를 구현해야 한다.
물론 만화의 자체적인 매력에 특화된다고 해서 게임과의 교류 자체를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를 들어 만화 <간츠>의 경우, 게임의 내러티브 구조를 만화로 역수입해왔을 때 어떤 흥미로운 재미를 창조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최적의 텍스트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은 한 ‘판’이 넘어가면 아무리 그 전에 거의 죽어가던 주인공들이라도 다시 처음 수준으로 회복되고, 예측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적을 영문도 모르고 해쳐야 하는 등 아케이드 액션 게임의 문법을 현실로 적용할 때의 험난함을 주인공들의 고군분투를 통해서 실감나게 그려낸다. 그 결과, 오락물로서의 궁극적인 쾌감이 만들어진다. 만화 자체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자세는 바로 만화의 근본적인 정신인 ‘효과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흡수해주마’ 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속에는 당연히 게임도 포함된다.
나가며
게임은 과연 만화를 무너트릴 것인가? 또는 만화는 게임의 원작공급처로 만족해야 할 것인가? 모두, 대답은 ‘아니오’다. 계속 그래왔듯이 만화는 대중오락으로서의 일정 지분을 게임에 잠식당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물론 산업적 수치와 청소년들의 반응에 주눅들 수는 있지만 그것은 게임과 경쟁을 한다고 해서 되찾아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화와 게임이 겹쳐있는 부분에서 게임이 더 적합하기 때문에 그 쪽이 잡아낸 것 뿐이다. 만화로서는, 만화만이 갈 수 있는 길을 더욱 개척하고 추구해서 지분을 다시 넓혀나가는 것이 바로 정공법이다. 그것을 개척하지 않았다면 그게 문제인 것이지, 게임 탓할 일이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더욱 개척하면 된다. 만화 같은 막강한 생명력을 가진 매체가 그 정도 힘을 발휘하는 것은 무척이나 쉬울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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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ckywhite – 좋은글 감사합니다~ 퍼갑니다~ 2005/05/28 2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