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만화, 버린 것인가 버림받은 것인가 [계간만화 2005 여름]

!@#… 계간만화 2005 여름호 원고. (항상 그렇듯이) 커버스토리의 일부. 원래는 본격적으로 에로만화에 대해서 쓰고 싶었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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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만화, 버린 것인가 버림받은 것인가

김낙호 (만화연구가 / 본지 편집위원)

90년대 초 한국만화가 소년만화와 순정만화 전문지의 도입으로 급격한 체질변환을 겪을 때 가장 먼저 도태된 ‘기성 잡지’들은 성인만화잡지였다. 그리고 90년대 말 한국 만화잡지의 불황이 닥쳐왔을 때, 다시금 가장 먼저 판을 접은 것은 성인만화잡지였다. 한국만화판은 도대체 왜 이렇게 성인만화잡지와 궁합이 안 맞는 것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성인만화잡지에 대한 시도는 항상 새롭게 계속되고 있는가. ‘버려진’ 성인만화잡지지만 버림받게 내버려둘 수 없는 매력을 살펴볼 때다.

만화는 원래 성인의 읽을거리다

성인만화. 성인들을 위한 만화라는 의미로 쓰인 단어겠지만, 사실 용어 자체가 사회적 쓰임새는 그렇게 행복하지 않은 듯 하다. 이웃매체인 영화를 놓고 보더라도, 성인들은 보통 그냥 ‘영화’를 즐긴다. 오히려 아동들에게 ‘어린이영화’가 있을 뿐.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냥 소설, 그리고 어린이 소설이 있다. 그에 비해서 성인영화, 성인소설 이라고 부를 때 지칭하는 대상은 사뭇 달라진다. 다른 모든 존재이유를 버리고, 말초적인 에로 쾌락에 승부를 거는 어떤 좁은 장르와 연결되는 것이다. 성인만화 역시 좋든 싫든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한껏 짊어져야 하는데, 문제는 이쪽 분야에서는 어째서인지 그냥 만화라고 하면 어린이 만화를 떠올리고 성인들이 오히려 특별한 취급을 받는 이상한 관행이 통용된다는 점이다. 이것 참, 난감하다.

이상한 통념과는 달리 사실 애초부터, 만화는 성인의 오락이었다. 굳이 무슨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식의 딱지를 붙였다기보다(사실 미성년자라는 개념, 어린이라는 구분 자체가 근현대적 발명품이다), 만화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여러 장르적 선조들은 어디까지나 성인 독자를 상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양만화의 근간이라고 여겨지는 중세 필사본들은 종교의 교리를 일반 성인들에게 글과 그림을 섞어가며 알기 쉽게 전달해주기 위한 도구였다. 현대만화의 좀 더 직접적인 흐름을 형성해준 풍자문화 역시, 어디까지나 성인들의 사회를 비판하고 조롱하여 즐기기 위해서다. 로돌페 퇴퍼의 풍자물들부터, 현대 서양만화의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인 영국의 풍자잡지 <펀치>까지 만화는 경박하고 떠들썩하지만 엄연한 성인취향이었던 셈이다. 동양에서 역시 일본의 우키요에가 되었든 중국의 연환화가 되었든 간에 굳이 어린이용이라는 편견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의 성인만화, 성인만화지

한국에서도 역시, 현대적인 만화개념은 성인을 먼저 만났다. 이도형의 한칸 만화들도 노수현의 멍텅구리 시리즈도 보통의 성인들이 읽는 신문에 연재된 것이었고, 따라서 성인 독자층을 염두에 두는 것이었다. 해방 후 <만화세계>등의 시사만화잡지가 이러한 맥락을 계승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점차 성인들은 신문의 짧은 카툰만화로, 그리고 보다 긴 형식의 이야기 만화는 아동 지향으로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잠깐 반짝했던 양장본들이 사라지고 만화방 체계가 확고해지면서 이야기 만화에서 성인의 영역은 점차 사라졌다; 그런데 잡지로서 존재의의를 필요로 하는 것은 결국 연재 이야기 만화이고 말이다. 결국 성인만화잡지는 꽃피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았다. 또한 표현수위에 대한 극심한 통제 역시 성인 취향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에 결정적인 방해를 했다.

하지만 잡지형 성인만화가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바로 정치적 암울함이 극에 이르렀던 70년대인데, 스포츠신문과 성인 주간지의 탄생이 바로 그 계기였다. 고우영의 <임꺽정>이 스포츠신문에서 신화를 창조하고 있을 무렵, 성인 주간지 <선데이서울> 역시 성인 취향의 만화를 중용하며 개가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80년대에 들어서자 문화적 부흥과 정치적 좌절, 대중문화와 민중문화의 갈등 사이에서 리얼리즘 성향의 만화들 또는 선 굵은 극화들이 꽃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감수성이란 독자들로 하여금 성인의 안목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성인만화 잡지는 물론 만화잡지사 일반에 가장 중요한 지면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 <만화광장>을 탄생시켰다. 6-70년대에 어린이들의 공간이었던 만화방 역시 80년대로 들어서면서 청년 룸펜 – 즉 성인들의 성지로 변모했다. 90년대의 시작과 함께 한풀 꺾인 성인만화잡지들은 90년대 중반 다시금 <미스터블루>, <트웬티세븐>, <빅점프>라는 모습으로 부활했고, 성인 순정지를 표방한 <나인> 역시 가세했다. 이들은 80년대 만화의 선굵은 극화들과 90년대적 감수성을 동시에 포용하고자 각각 나름의 노력을 했고, 실제로 당대를 대표할만한 여러 명작들을 배출시켰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어제의 이야기다. 하지만 음란 파동을 위시한 제도적인 문제점과 독자층의 취향변화에 따른 수익성 악화 등에 차례대로 KO당했다. 그러자 90년대식 만화 향유를 경험해온 성인 독자층을 공략하는 성인지들이 다시금 발을 내딛었다. 그래서 2000년대에는 소년만화 취향의 성인층을 노리고자 출범한 <웁스>, 성인순정지 <나인>의 명성을 되살리고자 했던 <오후>가 명멸했다. 그리고 2005년 현재, 17종의 만화잡지 가운데 순정지 <허브>만이 성인독자 취향임을 명백하게 표방하고 있다.

성인은 무슨 만화를 원하는가

왜 성인만화 잡지는 변화의 과정에서 쉽게 사라지고, 무엇보다 현재 이렇게 심한 퇴조를 보이고 있는가. 모든 심층적인 이유를 뒤로 하고서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한가지 있다. 바로, 성인들이 만화 잡지를 사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화잡지를 사보지 않아도 계속 만화잡지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성인들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독자들이 만화잡지를 안사보기에 침체기에 이르렀다고는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적자를 보더라도 계속 내는 소년지나 일부 순정지와 달리 성인지는 좀 더 정직한 반응이 온 것이다. 성인들이 만화잡지를 사지 않는 이유는,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의 만족을 충분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인들은 무슨 만화를 원하는가, 즉 성인만화의 가치는 무엇인가? 우선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인에게 허용된 쾌락’이다. 사회적으로 성인들에게 부여된, 아니 미성년자에게 일정 제한을 가해놓은 쾌락의 소재인 성과 폭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만큼 확실하게 성인용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성인 오락은 성과 폭력을 애용해왔다. 특히 한국에서 아동친화적인 특성이 아동 전용인 듯한 오해로 번져갔던 만화라는 장르에서, 성과 폭력의 여부와 강도는 성인만화를 특정 짓는 중요한 잣대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하지만 전제되어야 할 것이, 단순히 ‘리얼한 묘사’ 자체에 머무르면 타 매체에 밀려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확한 데셍을 한들, 만화에서 묘사하는 인체들의 성과 폭력은 실사로 찍어서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영화 매체를 따라가기 힘들다. 그리고 그쪽 분야의 표현 강도는 나날이 증가하여, 예를 들자면 도색잡지 정도에 열광하다가 16mm 에로비디오를 넘어서 무삭제 하드코어 인터넷 야동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는 다른 길, 즉 성과 폭력의 환타지를 그려내는 방식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 <미스터블루>에 연재되어 큰 화제를 일으키며 성인만화의 새로운 틀을 제시했던 양영순의 <누들누드>를 생각해보자. 물론 충실한 데셍력이 뒷받침되기는 했지만, 이 작품의 매력은 리얼한 육체의 묘사가 아니라 과장된 상상력이다. 소위 만화적 상상력이라고 폄하받는 허황되고 우스운 ‘뻥’을 극단까지 밀고나가서 유쾌한 음담패설을 만들어내는 힘이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폭력 역시 무협이라는 극단적인 폭력 환타지, 그것의 현대적인 왜곡변형 버전인 조폭물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리얼한 사회고발을 표방하며 시작했던 김성모의 <대털>이 연재 후 이내 조폭 환타지물로 변모하여 오히려 더욱 큰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던 사건이 좋은 예다.

하지만 너무 말초적인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좀 더 성인만화의 좀 더 고상한 두 번째 매력요인, ‘성인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가치’ 를 들 수 있다. 어느 정도 성인으로서 사회생활과 교양을 쌓아왔기에 이해할 수 있는 섬세 미묘한 세상 바라보기의 맛을 포함할 때 비로소 성인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나 그 안에 담긴 캐릭터들의 행동패턴, 이야기 전개의 방식 등 복합적인 부분에서 작용한다. <뽀뽀뽀>의 동화풍 인형극에서 등장하는 아이들의 삼각관계는 유치하다고 안보지만, 그날 저녁에 하는 일일드라마의 현실적 가정에서 주연들이 벌이는 삼각관계는 몰입해서 공감하며 보는 것의 이치다. 실제로 고우영의 <일지매>, <삼국지> 등 일련의 성인 만화들은 특별히 극단적인 말초적 성과 폭력으로 자기 매력을 가꾸기 보다는, 성인적인 인간관계와 그것을 풀어나가는 성인적인 섬세한 입담으로 자리를 확고하게 했다. 이 작품들은 미성년자 관람불가로 묶어놓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성인에게 성인만이 느낄 수 있는 재미를 준다.

물론 이것은 앞의 경우와는 달리, ‘성인용’ 구분이 훨씬 애매하다. 단순한 표현수위라면 검열기구들의 임의적인 잣대라도 적용하고 빨간 미성년자 독서불가 딱지로 성인용을 구분할 수 있겠지만(물론 그것은 종종 부당하게 이루어지지만), 성인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가치는 제도적으로 갈라놓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작품 자체가 읽히는 방식으로 승부할 뿐이다. 성과 폭력이 뒤범벅이 되어있는데도 그 속에서 이야기하는 주제나 가치는 유치원생 수준에서도 100% 다 즐길 수 있는 수준의 작품들이 오늘날의 대본소 서가에 얼마나 넘쳐나는가. 거꾸로, 표현은 아동만화에 가까워 보이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철학적 깊이를 알 수 없는 만화 역시 적지 않다. 그 경우 만화의 ‘아동지향적’ 대중성이나 사회적 이미지를 오히려 역이용해서 더욱 깊은 성인적인 성찰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트 슈피겔만의 <쥐>가 홀로코스트의 유태인들을 의인화된 쥐로 묘사한 것 역시 이런 측면에 착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재미를 추구하는 성인들은 말초 자극을 원하는 성인보다는 더 소수일 수 밖에 없지만, 확실히 성인의 가치라고 칭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성인만화의 ‘올바른’ 성장과 장기적인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명백하게 후자다. 그리고 말초적 쾌락의 영역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기 위해서 도구로서 동원될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초적 쾌락 자체만을 위한 만화를 폄하하는 것 역시 올바르지 못한 처사다. 성찰을 배제한 성과 폭력의 장르들이 주는 날것 그대로의 오락성은 대중문화 발달의 정직한 지표가 되어준다. 중요한 것은 고상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악으로 치부하고 박멸하는 것이 아니라, 넓고 자연스러운 장르의 스펙트럼을 확보하는 것이다. 성인만화가 아주 극단적으로 말초적인 것부터 극단적으로 심오한 것까지 넓은 범주로 다양하게 퍼져있는 상황이 가장 이상적이다. <용주골 블루스>도 <타짜>도 <아색기가>도 모두 넓은 성인만화판을 만들기 위해서 각자의 위치에서 큰 공헌을 하는 것이다. 만약 성인만화잡지의 부활을 꿈꾼다면,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고 말초에 집중하거나 고상함에 치우치면 분명히 곤란해질 것이다.

성인만화의 부흥을 위한 조건들

너무나 뻔한 이야기라서 오히려 질문이 늦었다. 과연 성인만화 잡지는 현재의 침체로부터 다시 일어나 부활할 필요가 있는가? 당연하다. 왜냐하면 성인들도, 아니 성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만화를 즐길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만화를 즐기기 위해서 청소년 취향으로 스스로의 수준을 낮추는 상태도 좋지 않고, 자신의 취향을 충족 받지 못해서 만화라는 매력덩어리를 포기하게 되는 상태도 좋지 않다. 잡지라는 형식은 긴 이야기의 상시 연재와 가벼운 독서라는 방식을 통해서 만화를 접하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해준다. 시간을 내고 집중해서 단행본을 고르고 읽어내는 것과는 다르게, 만화를 일상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잡지 안에서 여러 장르와 취향을 보여주며 특정 작품이 아닌 만화문화를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대중문화의 시대에서 성인취향이 주류에서 밀려나고 있는 현상은 비단 만화뿐만은 아니다. 10대 위주로 편성되어 어느덧 성인가요가 고속도로 테이프로 격하되는 대중가요의 현장에 비하면 만화는 양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들의 취향을 충족시켜주는 구조를 확보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 밖에 없다: 소비하라. 자신이 계속 즐기고 싶은 장르라면, 끊임없이 보고, 사야한다. 잡지는 안사지만 잡지가 없어져서 안타깝다는 말은 애석할 따름이다. 대중가요에서 성인들이 밀려나고 10대들이 치고 올라왔던 90년대의 특징은, 10대들은 사고 성인들은 안 샀기 때문이다. 당연히 돈이 몰리는 쪽으로 생산도 몰리고, 그것은 경제규모나 취향의 폭에 비해서 지나치게 문화시장의 규모가 큰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승자독식과 몰아주기 유행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성인만화 잡지 역시 아무리 제도적인 탄압을 이야기해도, 결국 경제성의 논리에서 밀려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인만화의 부흥은 소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소비는, 취향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성인만화를 즐기는 것은 조금도 어두운 일도, 부끄러운 일도, 이상한 일도 아니다. 말초적 쾌락을 즐기는 것이 비단 만화에서만 어색할 필요도 없으며, 고급스러운 감동을 받는 것이 만화에서 이상하게 취급받을 이유도 없다. 포르노 만화가 잡지로서 양성화되며, 계간 문학지들의 역할과 비슷한 순수문학성 만화잡지가 자리 잡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음에 들면, 숨기지 말고 사서 지하철에서 읽어야 한다.
창작 역시 마찬가지다. 취향을 받아들여야 한다. 취향은 ‘좋고 나쁨’의 영역이 아니라, ‘충족 성공 실패’의 영역이다. 포르노를 그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포르노를 그리려고 했는데 충분히 재미있지 않을 경우가 부끄러운 것이다. 데셍이나 나름의 철학적 고민에 집착하느라고 포르노 만화 본연의 막나가는 상상력과 환타지가 어정쩡해서 독자들을 실망시키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 가명으로 포르노를 그리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도덕적 비난을 받을 일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취향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소비를 하는 판을 만드는 것이 바로 성인만화 잡지 – 아니 따지고 보면 모든 종류의 만화잡지를 부흥시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히트작이 나올 때까지 하늘만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도, 잡지 시장이 어둡다고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것도 부흥을 위한 걸음과는 거리가 멀다. 만화를, 특히 성인만화를 당당하게 즐겨라 라고 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필요하다. 작품으로서, 구호로서, 마케팅 전략으로서, 향유문화로서 이 담론을 집요하게 심어 넣어야 한다. 성인만화 잡지가 죽었다고 칭얼거리기 이전에, 성인만화가 얼마나 재밌는지, 독자 당신들이 지금 성인만화잡지를 못 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아까운 일인지 자극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성인만화는 버리지도, 버림받지도 않았다. 단지 그것을 즐기는 문화가 표면적으로 잠시 잠잠해 보일 뿐이다. 만화잡지의 새로운 부흥이 일어날 때, 다시금 그 선봉장에 서는 것은 성인만화지일 것이라고 작은 확신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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