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 더 열성적이었던 시절(…), 대패질로 한국어판 샘플을 만들어 몇몇 출판사분들에게 보여주고 출간하라고 뽐뿌를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결국 나와주었는데, 개별 작품에 대한 적극적 홍보캠페인과는 유감스럽게도 거리가 멀더라는;;; 최소한 봉준호 감독의 추천사라도 받아낼 줄 알았는데.
사회를 돌아보는 정치적 살인 멜로드라마 – [프롬 헬]
김낙호(만화연구가)
90년대에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인기를 끌었던 파트릭 쥐스킨트의 [향수]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이 궁극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연쇄살인마의 길을 걷는 것이 줄거리지만, 사실은 줄거리보다 그 과정의 배경에 있는 디테일이 만들어내는 세계와 그 속을 사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감성이 핵심이다. 파리라는 도시의 공간적 맥락 및 그곳의 평범하게 비루한 노동자 생활상에 대한 집요한 디테일 속에 고독한 자아, 속된 인간관계의 교차와 그것을 넘어서는 신성함에 대한 추구 등이 담겨있다. 이렇듯 충격적 사건과 범속한 세상에 대한 세밀한 디테일 탐구의 결합은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매력적 감성을 담아내기에 유용하며, [향수]나 영화 [살인의 추억]처럼 잘 구사했을 경우 명작을 만들어내곤 한다. 당연히 제대로 해내기 매우 어려운 방식이기도 하다.
[프롬헬](앨런무어, 에디캠벨 / 시공사)은 19세기말 런던 화이트채플 지역의 미해결 연쇄살인사건 “잭 더 리퍼” 사건에 관한 작품이다. 그리고 [향수]가 그랬듯,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지만 그것을 매개로 하여 당대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다시금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를 풍자한다. 당대 런던의 공간, 노동자들의 삶과 그에 대비되는 귀족들의 생활상 등을 세밀한 디테일로 그려내며, 그 안에 교차하는 허영과 잘못된 믿음, 사회모순과 그것에 자발적으로 눈감는 풍경을 쏟아낸다. 그런데 이 작품이 가설로 내세우는 잭 더 리퍼 사건의 전모는 흥미롭게도 영국왕실의 치정극이다. 분탕한 왕자가 몰래 노동계급의 여인과 사귀어 아이를 낳게 되고 왕실이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주치의를 통해서 그 여인은 물론 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까지 처리하고 미스테리 연쇄살인사건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작품의 부제가 말해주듯,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멜로드라마다. 함께하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는 입장의 사람들이 벌이는 사랑이야기가 모든 것의 발단이고, 그것을 드러내려는 이들과 숨기려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 여러 소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지극히 통속적인 뼈대 위에 벌어지는 이야기임을 느낄 때, 작품 속에 묘사되는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음울한 섬뜩함을 준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범인이 누구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과정에서 사회의 모습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는 것에 있다. 왕실에 대한 충성 및 비밀결사에 대한 신의와 근대적 과학지식 사이에 서 있는 왕실 주치의가 중심에 놓여있고, 그를 추적하는 수사기관 역시 과학적 수사와 유사과학 신비주의의 사이에 있다. 거리의 노동자들은 중세 백성의 사고방식과 근대 시민으로서의 자각의 혼란스러운 전환기에 있다.
[프롬헬]은 19세기와 20세기가 바톤터치하는 세기말을 통해서, 21세기를 앞두었던 세기말을 이야기했던 작품이다. 원래 90년대에 처음 작업했을 때의 제목은 ‘금기(Taboo)’였고, 중단되었다가 결국 96년에 ‘프롬 헬’로 다시 시작한 바 있다(정정: ‘금기’라는 제목의 앤솔로지에 연재되었으며, 96년 본 스토리가 완결되고 이후에 작업한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99년에 단행본화되었음). 스토리를 쓴 앨런 무어는 80년대 냉전시대의 불안을 [왓치맨]이라는 걸작을 통해 음울하고 통렬하게 공격한 바 있는데, 세기말의 한층 일상화된 갈등과 불안 및 그것을 잊는 사회적 방식들을 [프롬헬]로 다시금 건드린 셈이다. 살인마 잭의 범행들은 광기와 폭력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사회가 소비하는 방식도 결코 덜 섬뜩하지 않다. 연쇄살인마라는 현상에 대한 대중적 매혹이 타블로이드 언론으로 증폭되고, 피살자들이 창녀라는 이유로 종교/도덕적 해석을 포함해서 온갖 억측들이 화자되며 불안이 사회의 일상적 일부로 자리 잡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경찰에는 자신이 잭 더 리퍼임을 주장하는 각종 제보 편지들이 들어온다. 살인범은 사건에 연계된 사람 한 명 한 명을 살해하지만, 사회 속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여성 전체를, 자신보다 좀 더 못사는 계급의 노동자 전반을 적극적으로 탄압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이 작품보다 100년 후 오늘날 세상에 대한 캐리커쳐임을 알아채지 못할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혹 알아채지 못했다면, 작품 안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상기시켜줄 시퀀스도 기다리고 있다). 모호한 믿음, 정치적 술수, 담론의 오락적 소비 같은 오늘날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조건들이 광기어린 연쇄살인 사건으로 표출되고, 우리 자신들도 그런 식으로 세상이 돌아가도록 하는 일부다.
작품의 어두운 내용을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강렬한 시각스타일이다. 에디 캠벨은 절대로 그가 그려내는 공간이 조금이라도 빅토리아조 양식에 대한 향수어린 감성을 불러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음울하고 신경질적인 날카로운 펜선을 구사한다. 런던의 안개만큼이나 흐릿한 형상인 듯하다가도, 길거리의 삶을 보여주기 위한 각종 시각적 디테일은 항상 넘쳐난다. 성애 장면은 노골적임에도 에로틱하기보다는 동물적이며, 폭력장면은 잔인하지만 엿보는 스플래터의 쾌감이 배제된 건조함이 있다. 앨런무어 작품 답게 연출력 또한 강렬한데, 다양한 사람들이 경찰에 편지를 쓰는 시퀀스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범인이 자신의 조수를 대필시켜서 작품의 제목이 된 “지옥에서”라고 서명된 편지를 쓰는 장면, 전혀 관계 없는 다른 신분과 위치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고백편지를 쓰는 장면들이 교차 편집되는 모습은 사회적으로 어떤 정신이 연결되고 퍼지는 모습에 대한 더없이 강력한 묘사다. 그리고 작품 전체적으로 정돈된 3단 9칸 페이지 구도를 통해서 이 이야기는 독자에게 과도한 이입보다 차가운 시각을 강요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작품에 투여된 집요한 디테일은, 실제 화이트채플 사건의 기록들을 끼워 맞춘 치밀함에서 십분 드러난다. 런던의 도시공간과 그 사용 방식은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로 구체적이다. 그런 부분들은 작품 자체는 물론이며 두터운 권말 주석에서도 엿보이는데, 덕분에 주석을 단순한 보충설명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해설편으로 읽히도록 만든다. 고풍스러우나 정중한 말투와 용어들이 만드는 빅토리아조의 뉘앙스는 어떤 번역판이라도 온전히 재현하기 힘들겠지만, 한국어판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을 해준 출판사의 노력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프롬헬]은 만약 적당히 오락적으로 포장되지 않은 음울한 잔인함, 우리 자신들에 대해 불편할 정도로 노골적인 직면시키기, “문학적” 접근법으로 가득한 만화에 대한 난독증 등에 결정적인 거부감이 없다면 필히 구비해둘 만한 명작이다.
프롬 헬 앨런 무어.에디 캄벨 지음, 정지욱 옮김/시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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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즉 현 발간호 게재중인 글): 킬링조크. 뜻하지 않게, 앨런무어 연타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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