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월간 인문 만화 잡지 ‘싱크’ 연재. 매번 너무 무거운 이야기로만 갈 생각은 없는데, 약간씩은 진지하지 않을 수 없는 성격의 지면인지라…
가난을 이야기하는 만화들
김낙호(만화연구가)
사회에 통용되는 여러 가치들을 돈으로 계량화하는 것에 능숙해진 세상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제한이 된다. 고전맑시즘에서 이야기하는 생산수단으로서의 계급이든 계층이론의 사회경제지위든 시장 관계 속 지대 배분의 결과 발생하는 베버적 계급성이든 뭐든, 결국은 돈이 없어서 무언가를 갖추지 못하고 그것이 족쇄가 되어 사회생활 속 위치가 낮아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저 남들보다 좀 불편한 정도로, 아니면 아예 남들에게 노골적으로 자신이 정당하게 누려야할 권리까지 수탈당하면서 말이다. 더 잘 구축된 사회일수록 돈이 없는 성원들이 누리는 생활이 전자에 가깝고, 허우대만 멀쩡하지 속 빈 강정인 엉터리 후진 사회일수록 그 집단 전체의 평균 자산은 얼마가 되었든 간에 결국 후자에 가깝다. 가난이라는 상황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본주의 이상주의자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 있다”를 손쉽게 주장하곤 하지만, 현실세계의 복잡 미묘함을 좀 더 정면에서 직시하는 사람들은 조세/분배 정의 강화의 필요성, 기본복지와 보편교육을 통한 안전망, 특히 특정 지역, 성별, 인종 등등의 범주적 요인이 거의 필연적일 정도로 가난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체계적 정책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
그만큼 ‘가난’이라는 것은 사회적 삶, 그리고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이상 개인의 삶 자체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변인이 되어준다. 이미 가난하거나,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거나, 가난을 모르기에 철이 없거나, 가난을 물리치고자 노력하거나, 가난의 기준 자체에 의문을 품거나 말이다. 그렇기에 가난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 가난을 통해 펼쳐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바로 가장 개인적 드라마이자 사회적 질문이 되어줄 수 있다. 가난을 이야기하는 만화들을 한 번 몇 가지 펼쳐본다.
해학의 장르 코드
작품에서 가난을 다루는 가장 쉽고 가벼운 방식은, 가난의 의미를 파고 들어가기보다는 가난 그 자체를 하나의 장르 요소처럼 활용하는 것이다. 이렇듯 표피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비극적 상황에 한 줄기 해학을 줌으로써 이야기를 더 쉽게 받아들이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고, 지나친 희화화에 빠지지 않고 매우 적절하게 사용될 경우에는 가난을 무겁고 필연적 약점이 아니라 사소한 것으로 포장하여 현실 속의 가난한 이들에게 좀 더 열린 자세를 가지게 만들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전래이야기인 흥부전을 생각해보라. 흥부 가족의 대책 없이 처절한 가난을 해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남을 돌볼 줄 아는 착한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그리고 적절한 가족계획의 중요성도).
가난을 개그코드로 사용한 대표적 만화 가운데 하나는 [타로이야기]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꽃미남 고교생인 야마다 타로인데, 수많은 형제남매와 금전감각이 캄캄한 철없는 어머니와 함께 폭삭 무너질 것 같은 가건물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다. 구김살 없는 귀족적 외모와 출중한 능력 덕분에 딱히 가난을 비밀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는 부유한 집 자제로 소문이 났으나, 사실은 교복을 직접 지어 만들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알바를 여러 개씩 뛰며 각종 절약을 일삼는 소년가장이다. 귀족적 이미지와 가난한 실상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주변인들의 오해와 각종 상황들이 폭발적 유머의 원동력이 되어준다. 유머로서의 파급력은 덜하더라도, 사람 사이의 온정을 강조하기 위한 조건 요소로 활용하는 [빈곤자매이야기] 같은 작품도 있다. 어린 동생과 가난한 소녀가장 생활을 하면서, 없는 형편에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그럭저럭 절약하는 생활을 해나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이 작품 역시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너무 구차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기발하게 절약하는 생활을 하는 모습을 유머로 활용할 줄 안다.
혹은 [꽃보다 남자]나 [하야테처럼]의 경우처럼 주인공의 가난이 상대역의 엄청나게 과장된 부유함을 강조하기 위한 코드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경제적 조건에서 비롯된 여러 차이들을 차이들을 넘어서서 서로 함께 복작거리는 드라마적 설정을 만들기 위한 장치인데, 역시 지나치게 무겁게 들어감으로써 사람들의 드라마 자체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만 동원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각에 들어간 세상을 재발견하기
하지만 사실 가난은 그렇게 과장된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늘 우리 사회에 함께 있다. 그렇기에 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다른 일면들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작품 속의 가난은 늘 여기 있는데도 애써 숨긴 듯 지나간 것들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실종일기]는 관심 받고 일에 시달리는 인기 만화가로서의 스트레스가 폭발하여, 갑자기 가출을 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돈 없이 숲과 공원에서 노숙을 하며 쓰레기를 뒤져 주워먹는 생활을 한다. 같은 세상이지만 사회 속 안락의 조건들을 버린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이상하게 처절하면서도 평온하다.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위생과 건강은 문제가 많고 결국 경찰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지만, 작가의 기이한 극단적 가난 체험은 우리가 아등바등 매일 쫒고 있는 것을 한번쯤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혹은 서울이라는 도시생활에 스스로 부적응자가 된 어떤 만화가가 주인공인 [아날로그맨]은 어떨까. 전기, 가스 같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문명의 이기, 사회적 재산을 더 이상 유지하지 않고 ‘아날로그’ 삶을 시작하며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랬더니 공사장 일용직 인부, 지나가는 여행객들 등 늘 있었지만 무언가를 위해 달려가는 와중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듯 넘어갔던 이들이 각자의 사연과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로 재발견된다.
사회적 작용으로서의 가난
장르 코드로서의 가난은, 이야기 속에 이미 관례적으로 주어진 조건이다 보니 가난 자체에 대한 별다른 탐구를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런 가난은 쉽게 개인화, 즉 사회적으로 구성된 작용이 아니라 특수한 개별 사례로 포장된다. 그렇다면 그 정반대에서 접근해보면 어떨까. 가난은 개인의 탓이 아니라 모두 사회의 잘못이다, 뭐 그런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가난이라는 것이 어떻게 사회적 지위가 되어버리는지, 그것이 얼마나 개인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호작용 속에 굳어버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접근에서는 가난은 도피성 판타지로 어떻게 덮을 수 없는 사회적 조건이며, 그런 것을 직면하는 과정이 바로 작품의 재미가 된다. 현실비판적인 메시지는 필연적으로 들어가게 되고, 한번 웃고 넘어가기보다는 갑갑한 뒷맛을 남긴다. 삶의 조건의 디테일을 얼마나 잘 살려내는가에 따라서 작품의 우수함이 판가름난다.
한국 민속과 불교의 저승관을 바탕으로 저승사자들과 신령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신과함께] 시리즈 중 ‘이승편’으로 명명된 작품은, 재해석된 사후세계의 여정이 작품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던 전작 ‘저승편’과 달리 대부분의 이야기가 현세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현세란 가난한 철거촌이다. 파지 줍는 노인과 손자가 사는 달동네 사람들, 수명이 다한 그 노인을 데리러 오는 저승차사, 집이 헐리지 않도록 돕고 싶은 가택신들, 그리고 동네를 밀어버리고 재개발을 하려는 철거용역들이 이야기를 엮어간다. 주인공 할아버지와 달동네 사람들이야 물론 가난하고, 그 손주도 학교에 진학하며 가난이 주는 차이를 차별로 경험하기 시작하고, 용역에서 알바를 뛰는 어느 체육대생도 등록금을 마련하겠다며 스스로의 양심을 접어버리는 처지다. 죽음이라는 추상같이 공평한 결말을 집행하기 위해 오는 저승차사들이 오히려 인정을 발휘하고, 재개발 철거라는 일방적 이해관계를 위해 밀어붙이는 개발조합과 용역들은 가차 없다. “가난한 자를 위한 나라”는 적어도 지금 우리들의 이승 사회에서는 찾기 힘든 셈이다.
사회적 조건이 되어있는 가난을 극복하는 것은 과연 자본이상주의자들의 꿈처럼 개인이 노력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 벗어나는 사례도 없지 않겠지만, 다들 서로를 밀치며 전력질주하는 사회의 실로 부실한 노동권 보장 수준 위에서는 지나치게 어렵다. [야옹이와 흰둥이]는 집을 나간 주인의 사채빛을 갚기 위해 말하는 고양이와 말 못하는 강아지가 각종 일을 하는 이야기다. 시식코너, 청소, 배달, 공사판, 식당 서빙 등 각종 서비스업 비정규직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비정규 노동의 열악한 현실들을 가차 없이 보여준다. 비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업신여김, 서로 일을 얻기 위한 은근한 다툼들, 법정 기준에도 못미치는 열악한 노동조건, 불안정한 고용 상태와 그것을 이용해먹는 고용주들, 욕심 없이 착한 동네가게를 하려는 이들이 가장 먼저 밀려나는 현실 등이 겹겹이 펼쳐진다. 고양이와 강아지라는 낯선 관찰자이기에 인간세상은 원래 그들에게 다소 이상해 보일 수 있다는 전제로 살짝 희석해줄 뿐, 현실에 대한 쓰디 쓴 디테일이 넘친다.
사회적 작용으로서의 가난을 그려낼 때 더 우수한 작품의 기준이라면, 그런 곳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이들을 얼마나 현실에 가깝게 그려내는가에 있다. 현실에서는 자본이라는 무슨 음모론적 주체가 존재해서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속에 있는 수많은 이들이 그런 현실에 애써 눈을 감는 만큼씩 각자 한 웅큼씩 보태며 만들어낸다. 촌민들의 재산을 수탈하여 가난에 허덕이게 한 탐관오리의 창고를 털어서 모두들 가난을 벗어났다는 판타지에 머무는가, 아니면 가난이 큰 일이 되도록 하는 크고 작게 엮여 있는 공범들을 직면시키느냐의 차이다.
그리고 아마도 최고의 작품이란 모든 것을 함께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경우다. 장르요소로서 가난을 동원하여 해학적 흥미를 돋구며, 그 안에서 현실 속 다른 일면들을 발굴해주고, 결국 그 바탕에 사회적 작용이 있음을 보여주어 현실 사회속 각자의 역할들을 직면시켜주는 방식 말이다. 가난이라는 소재를 제대로 바라보는 더 많은 창작이 이루어지고 독자들이 반응을 보내다 보면, 결국 그 경지에 충분히 도달하는 작품들이 늘어날 것으로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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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만화잡지 격월간 [싱크]. 이미지프레임 발간. 테마별 만화들을 소개하며 인문사회적 화두를 넌즈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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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적인 작품이지만 얼마 전에 본최규석 씨의 [대한민국 원주민]도 인상적이었어요. RT @capcold: [캡콜닷넷업뎃] 가난을 이야기하는 만화들 http://t.co/2RHypCr | 인문만화잡지 '싱크'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