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툰이 월간으로 바뀐 후의 첫 원고…지만 이 코너는 포맷 변화가 전혀 없다. 그런데 문득 이번 호를 쓰다가 문득 다시 생각난 것이, 왜 미디어 관련으로는 지금껏 간간히 투고는 해왔어도 정식 칼럼 연재는 한 적이 없는걸까. 지면찾기를 게을리했다;;;
언론이 못미더워도 살아가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신문보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오늘날, 가장 급격하게 신뢰를 상실하고 있는 직종이 있다면 바로 언론인일 듯하다. 뉴스를 소비하는 창구가 넓어지면서, 이전에는 경로의 희소성 덕분에 적당히 숨겨졌던 언론보도의 약점들이 쉽게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사람들이 뉴스를 더욱 많이 소비하고 또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와중에서, 저널리스트로서의 전문적 실력이 턱도 없이 미비한 어중이 떠중이들까지도 기자 직함을 달고 있는 경우들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다. 나아가 어떤 절대적 점유율의 대형 언론사들이 상업적 생존과 정치적 영향력을 보전하기 위해 언론으로서의 자존심 따위는 청와대 앞마당과 삼성 본관 뒷마당에 반씩 나눠서 묻어버린 듯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판 전체에 대한 냉소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니, 언론을 못미더워하는 것은 가히 시대정신이라 할 만 하다. 언론이 못미더우니 세상에 대한 온갖 소식이 못미덥고, 세상에 대한 소식이 못미더우니 세상이 못미덥다. 그 빈 자리를 노리고 온갖 헛소문들이 카더라 통신을 타고 공감대라는 애매한 기준으로 설득력을 행사하며 퍼지는 난감한 상황도 빈번해진다. 확실히, 언론이 못미더운 세상은 그리 살아가기 편리한 곳이 아니다.
뭐 당연히도 각 언론매체와 언론인들이 다시 믿을만하게 개선이 되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겠지만, 그리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혹은 그렇게 되기는 할지 장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 시민들이 알아서 언론이 못미더워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뉴스를 접할 때, 몇 가지 기본적인 인식을 갖추기만 해도 된다. 누구나 머리를 싸매고 언론학개론을 공부하는 것은 좀 무리니까, 스포츠신문의 연예부 기자들의 일상을 주인공으로 하는 개그만화 『주르날라이아』 정도로 시작해보자.
어차피 뉴스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아무리 소재가 다양한 듯해도, 인간세상에서 언론을 통해서 뉴스라고 보도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다. 광물에 관한 과학적인 사실을 발견한 소식이라고 할지라도, 언론의 뉴스에서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그 발견이 사람들의 세상에 미칠 영향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애초에 대부분의 뉴스는 사람들을 취재하는 것이고, 그 취재 대상들이 하고 다니는 행태는 가끔 좀 특별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그러니까 뉴스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대단히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연예부 기자들인 『주르날라리아』의 주인공들이 취재하는 대상인 연예인들과 기획사 사람들 역시 누구하나 사람이 아닌 경우가 없고, 그렇기에 보도하게 되는 내용도 사람 사는 이야기다. 누가 누구와 사귄다더라, 헤어졌다더라, 일을 벌였다더라, 사고를 치고 잠적했다더라 등등. 실제로 취재 대상들의 생활은 비인격화된 공공재가 아니라, 거래관계성 정사를 벌이는 광고모델과 기획사 간부라든지, 언론을 이용해먹어서 스타성을 유지하려는 꼼수를 구사하는 그저 그런 사람들이다. 취재하는 내용 역시 무슨 엄청난 트렌드 분석이 아니라, 술을 대작하며 캐내는 시시콜콜한 개인사(하지만 술 먹고 취재노트를 해서, 다음날에 알아볼 수 없다는 개그로 마무리한다) 같이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접할 법한 것들이다. 언론의 뉴스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대단한 진리라기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어차피 뉴스도 사람들이 만드는 것
뉴스를 만드는 이들도 결국 사람이다. 언론사도 기본적으로 회사이며, 사회 속에서 회사와 그 구성원들이 지니는 논리와 찌질함을 고루 갖추고 있다(이런 인식을 언론학 전문 용어로는 폼 나게 “정치경제학적 접근”이라고 부른다). 언론사라는 조직에서 성공을 평가하고 출세를 할 수 있는 잣대 가운데 하나가 강력한 뉴스가치를 지닌 사건을 다른 언론사가 포착하기 전에 혼자 빨리 터트리는 것, 즉 ‘특종’이다. 심지어 인터넷을 통한 실시간 뉴스 업데이트와 서로 기사 인용하기(베끼기)가 차고 넘쳐서 특종의 가치가 사실은 바닥에 떨어진 오늘날에도, 언론계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좀 강력한 척도다. 덕분에 『주르날라리아』의 주인공들은 취재대상과 실랑이를 하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도 그의 결혼식 날짜 하나를 먼저 터트리기 위해 매달린다. 상식적인 논리도 특종에 대한 탐욕 앞에서는 살짝 휘어져서, 기획사 홍보팀장이 이야기하는 “**씨의 드라마 하차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을까 생각 되네요”하는 발언은 몇 가지 생각의 단계를 거쳐서 “사실은 드라마 하차”가 된다. 혹은 조직 내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필터링되는 기사들이라든지, 기자의 개인적 원한이 들어가서 악의적 기사가 만들어지는 패턴도 잔뜩 선보인다. 개그만화다보니 나름대로의 희화화와 권선징악(?) 메시지가 들어가지만 말이다. 여하튼, 뉴스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니 만드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되겠다.
어차피 뉴스도 사람들 세상의 일부
한 걸음 더 나아가, 뉴스라는 것 자체가 결국 사람들 세상의 일부다. 사람들이 만드는 사람들 세상의 이야기인 만큼, 뉴스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에서 유통되는 정보라는 형식의 매개체다. 그 매개를 통해서 사람들이 맺어지고 끊어지며, 일이 돌아가고 실패한다. 어떤 뉴스가 왜 어떤 상황에서 더 설득력을 가지고 널리 퍼지는지, 어떤 타이밍의 어떤 뉴스로 사람들이 신세를 망치는지, 모든 것은 뉴스를 단독적이고 독립된 무엇이 아니라 사람들 세상의 일부로 볼 때 의미를 알 수 있다. 아니 의미를 알 수 없어도, 최소한 너무 그것에 휘둘리거나 반대로 무용지물로 버리지 않고 뉴스를 의미있게 수용할 수 있다. 사실 『주르날라리아』가 표방하는 하나의 정서가 있다면, 바로 언론에서 만드는 뉴스를 매개로 사람들이 만나고 오락거리를 얻고 뭔가를 해내는 세상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작품의 마무리마저도 신문사 내, 연예기획사, 기타 등등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는 연애와 결혼을 통해 낙천적으로 맺고 있을 정도다. 뉴스를 세상을 바라보는 별도의 객관적 잣대로 생각하지 않고, 뉴스 자체가 사회의 일부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아마 언론을 좀 더 유용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이 못미더워도 살아가겠다면, 적당히 못 믿어가면서도 적절한 수준까지는 수용하며 그 이상의 부분에 대해서는 멍청해지지 않는 선에서 즐기면 된다. 물론 언론 보도가 넘치는 세상이다 보니, 말만 쉽다. 하지만 그래도 살짝 그렇게 해보고 싶다면, 한 가지 전제만 기억하자. 언론이 만드는 뉴스는 무슨 대단한 진리 혹은 엄청난 사회적 음모라기보다, 그저 사람들에 관한 무언가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사람 세상 속에 섞여 들어간 것이라는 점이다. 못미더운 느낌이 감소하지는 않겠지만, 그 속에서 살아갈 지혜는 약간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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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팝툰>. 씨네21 발간. ‘만화로 보는 생존법’ 칼럼: 험난하고 이상한 세상의 어떤 괴이한 조건에서라도 여하튼 그럭저럭 살아가보기 위한 지혜를 만화에서 빌려보자는 컨셉.)
— Copyleft 2009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설마 4월엔 블랙데이를 맞아 [연애를 못해도 살아가기] (…?!)
뭐 사실 딱히 안/못해도 살아가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다는 건 진리입니다만…
!@#… 시바우치님/ 헉 그런 좋은 아이디어가;;; 다른 걸로 이미 넘겨버렸지만.
많은 것들이 사람들의 연장입니다만 만들어 놓구선 처치 곤란인 것들이 꽤 많긴 하죠. 돈이나 종교나 정치나 명예나.. 기타나.. 등등이나..
!@#… 의리님/ 그런 시스템들도 언론보도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각종 에러 패턴들을 오롯이 담아낸다는 것을 인식하면 좀 더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죠. 라기보다 결국 대부분의 ‘학문’에서 하는 게 결국 그런거지만.
4월이니..혹시 거짓말 특집이실지도.
!@#… nomodem님/ 그냥 평범하게, “경제가 망해도 살아가기”로 써서 넘겼습니다;;;
기사가 나오기까지 뒷얘기들 들어보면, 사실 굉장히 ‘인간적인’ 요소들에 의해 특종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특종을 키운 건 8할이 인간관계’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언론이 못 미덥다고 느낄 정도로 각성을 한 분들이라면, 행간을 읽는 스킬을 그 다음 단계로 익히게 되지 않을까요?
전, 못 미더운 것보다도, 모든 걸 무감각하게 만들어버리는 게 현대 언론의 가장 큰 폐해라고 생각합니다.
활자화된 모든 기사, 영상화된 모든 장면들이 그저 ‘타인의 고통’으로 소비되고, 무력감만 학습시키는 것 말입니다.
인권, 연민, 정의.. 이런 것들에 대한 감수성과 분노를 무디지 않게 지켜가며 살아가기가 정말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 곰곰님/ 언론이 못미덥지만 행간은 읽지 않거나, 아니면 행간에서 너무 많이 읽어서 엉뚱하게도 근거박약한 음모론으로 빠지는 분들도 많으니까요. // 무감각하게 만들기는, 사실 별다른 대단한 타자화 기술 같은 것도 필요 없이, 그저 양으로 지지기만 해도 됩니…;;; 여튼 미디어 정보 ‘수용’의 기술을 초등학교에서부터 제대로 가르칠 필요가 있죠. 당국자들이 정신을 좀 차린다면, 입시공식 말고 공교육이 해야할 진짜 역할은 차고 넘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