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하는 부부생활 – 어쿠스틱라이프 [기획회의 305호]

!@#… 요새 웹 연재도 시즌4 끝내고 휴식에 들어간 김에.

 

협상하는 부부생활 – 어쿠스틱라이프

김낙호(만화연구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류가 나름대로 오랫동안 여러 문명권에서 도달한 비슷한 사회제도인 ‘가족’이라는 것은 참 절묘하다. 하나의 군집 생활 단위에서, 비슷한 유전자의 소유자들을 통해 응집력을, 다른 유전자의 소유자의 유입을 통해 발전 가능성을 가꾸며 균형을 잡는다. 여기서 전자는 혈연이나 양육을 통해서, 후자는 바로 결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결혼생활이란, 어떤 균형점을 찾기 위한 끝없는 협상의 과정이다. 애초에 ‘외부인’을 가족이라는 친밀한 유대관계로 끌어들이는 관습이기 때문이다. 부부가 자신들이 선택한 그 관계를 정밀하게 관찰하고 그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서로 조율하며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면, 그 결합은 성공한다. 게다가 그 성공은 어느 마라톤 골 지점이 있어서 테이프를 끊으면 트로피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재발견해나가고, 익숙해져가는 그 조율이 계속되는 그 과정이 바로 성공적인 관계다.

[어쿠스틱 라이프](난다 / 애니북스 / 1권 발매중)는 포털사이트 미디어다음에 연재중인 인기 웹툰의 단행본으로, 30대에 막 진입한 젊은 부부의 일상을 다루는 생활만화다. 주인공들은 오랜 기간 서로 알았고 연애도 오래 했고 결혼생활 또한 3년 이상 된 관계다. 주인공 부부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자 프리랜서 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인 난다, 그리고 게임회사에서 캐릭터 3D 그래픽 작업을 담당하는 한군이다. 칼 같은 자기관리를 하는 프리랜서와도 전업주부의 전형과도 거리가 먼 자신에 대한 관찰, 게임에 대해 오타쿠적으로 심취하는 – 예를 들어, 어렵게 구하는 한정판의 가치를 아는 – 남편에 대한 관찰, 그리고 둘이 생활 속 여러 상황을 헤쳐나가며 보여주는 차이와 합의가 수많은 에피소드 속에 촘촘히 펼쳐진다.

이 작품이 부부가 주인공인 여타 생활만화보다 뚜렷하게 돋보이는 지점은 바로 관계에 대한 관찰이다. 대중문화에 심취하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이야 오늘날 2-30대 독자들을 노리는 인기 생활만화에서는 거의 필수요소가 되어버렸고, 소소한 상황에서 유머를 동원하고 적당한 가족 화해형 교훈을 양념 삼는 것 또한 손쉬운 표준이다. 하지만 [어쿠스틱 라이프]만큼 두 사람이 서로의 다름을 지적하면서도 받아들여가는 협상의 디테일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드물다. 물론 인기 TV코너 ‘남녀탐구생활’을 연상시킬 정도로 관찰자 유머코드를 멋지게 구사한다든지, 자잘한 일상의 귀찮음과 소심함을 탁월한 심리 개그로 그려내는 솜씨가 가장 먼저 독자들을 끌어들일 만하다. 그러나 모든 우스운 상황들을 더 길게 가도록, 그리고 나중에 다시 기억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협상의 요소들이다.

평범한 생활만화라면, 명절 때 차롓상 일에 동원되어 피곤한 며느리에게 공감과 그런 부인의 눈치를 보는 남편을 적당히 유머로 버무려 그려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시댁 노동을 하고 돌아온 날에는 상대에게 ‘왕’ 행세를 할 수 있다는 암묵적 합의가 등장한다. 그런데, 자기 생일이면 왕 행세를 할 수 있다. 그 두 가지가 하필이면 서로 겹쳐서, 부부가 서로 제사왕과 생일왕으로서 맞서는 상황이 발생한다. 충분히 어처구니가 없지만 얼마든지 공감이 갈 만한 갈등상황에서, 어떻게 둘은 협상을 하고 합의를 볼 것인가. 혹은 생일선물로 주는, 서로에게 무언가를 강제로 시킬 수 있는 쿠폰도 그렇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상대에게 집안일을 시킬 수 있는 흔한 ‘설거지 강제 쿠폰’이 아니다. 이들이 활용하는 것은 설거지 거부 쿠폰으로, 자신이 설거지를 해야 할 때 그것을 거부할 권한을 얻는다.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쓸 수 있을까 서로의 수를 읽는 잔머리가 굴러가기 마련이다(이것을 비롯한 비슷한 발상의 쿠폰 10종 세트가 단행본 부록으로 함께 나온다). 남편은 무엇을 하고 부인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역할 스테레오타입 또는 그것의 전복에 집착하기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치열하게 협상하는 과정이다.

그런 수많은 협상 속에서, 서로의 다른 모습들을 자연스럽게 수용한다. 그저 서로 닮아간다는 식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것을 고수하면서도 말이다. 한때 게임용어를 하나도 못 알아듣고 이상하게 여겼던 난다는 어느덧 한정판 게임패키지 출시현장에 대신 줄을 서 줄 정도가 되었다 – 그렇다고 자신이 게임 오타쿠가 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각자 미소녀 애니와 스릴러 미국드라마를 즐겨 보는 두 사람이, 나란히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도 어느덧 서로 보는 내용도 얼추 파악하고 줄거리 진행을 물어보게 된다. 마트에 쇼핑을 나가서 남편을 어느 코너로 보내면 여유를 가지고 방해받지 않고 다른 분야를 둘러볼 수 있는지 파악하고 있다. 그 안에서 그들은 서로를 무시하지 않고, 상대를 파악하여 전략적 대처를 한다. 인간 관계에 대해서 냉철하게 바라보면 까칠해지기 쉽고, 마냥 따뜻한 결론을 지향하면 피상적이 되기 쉽다(00년대 초반 큰 인기를 끌었던 그 수많은 ‘에세이툰’들을 상기해보자). 하지만 [어쿠스틱 라이프]는 둘 다 피해나가며, 날카롭되 차갑지 않고 낙천적이지만 깊이 있는 관계 관찰을 해나간다.

협상 관계를 바라보는 기본 얼개의 깊이, 즉 속 깊은 관찰이라는 생활만화가 갖춰야할 기본 뼈대가 탄탄하기에, 다른 재미 요소들 역시 무리 없이 온전하게 힘을 발휘한다. 우선, 유머를 패러디 코드에 의존하는 경우가 무척 적다. 오타쿠적 지식으로 패러디를 깨닫고 웃게 만들기보다는 오타쿠 성향이 있는 사람의 생활 관찰,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여가는 자신을 유머로 삼는다. 대화식 만담도 언어유희보다는 사고방식의 충돌만으로 충분히 굴러나가며, 에피소드들 역시 특이한 사건보다는 무언가에 대처하는 그들의 모습 자체로 재미를 준다. 낙서체 그림 또한 토마 같은 작가들이 지향하는 스타일리쉬한 감수성이나 이우일 같은 이들의 키치적 재미를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자신의 생활을 바라보는 묘한 낙천적 경쾌함을 강조해준다. 특히 적은 선 만으로도 확실하게 스타일화된 여러 표정, 드롭킥 같은 정형화된 유머 상황들은 효과적인 코미디를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예전 명랑만화 장르의 매력마저 상기시켜주고 있다.

물론 [어쿠스틱 라이프]에서 그려내는 협상으로 가득한 부부관계가 모든 이들에게 실제로 재현 가능하지는 않다. 어떤 이들에게는 “신혼이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단행본 출판사에서 낸 보도자료에도 ‘신혼’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한국사회에서는 결혼 생활의 기간이나 내용과 무관하게 아이를 낳아 키우지 않고만 있으면 대충 그렇게 부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떤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든 간에, 다른 사람 둘이서 함께 가족으로 자리매김하고자 서로 협상하는 것이 애초에 부부생활의 근간이자 재미다. 그 점을 잊어버렸다면, 더욱 이 작품을 틈틈이 다시 펼쳐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쿠스틱 라이프 1
난다 지음/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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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Y 더 라스트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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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마조앤새디, 어쿠스틱라이프… 기혼부부 생활툰계의 양대산맥이죠 ‘ㅅ’)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