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부작 극장판으로 만든다는건 잘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세상은 돌아간다 – Y 더 라스트 맨
김낙호(만화연구가)
가장 “사춘기 남자청소년”다운 상상가운데 하나는 바로 어떤 환경에 수많은 여자와 단 한명의 남자가 있는데 그 남자가 바로 나라는 것이다. 수많은 여성들에게 경쟁적으로 구애를 받으며, 난처한 척하면서도 선택권자로서의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으리라는 유치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그렇게 해서 소위 ‘하렘물’이라고 일컫어지는 하위장르가 인기를 끌기도 하고, 아예 그냥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온 지구에서 통째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남자주인공이 모든 여성들과 잠자리를 하는 [잠자는 혹성] 같은 작품도 등장했다. 하지만 여성이 압도적으로 더 많은 집단 – 예를 들어 대학의 특정 학과라든지 -에서 실제로 보이는 모습은, 결코 그런 상상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말이다. 남성으로서의 우월함은 남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사회에서 많은 경우 남성들이 지배세력(!)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주도하는 집단에서 남성은 동경을 모으는 존재가 아니라, 그냥 소수자다. 주체성을 가볍게 무시당하고 도구화, 객체화되기 딱 좋다. 우리 사회에서 성별이란 다른 많은 관계와 다를 바 없이, 권력 관계다. 다만 하도 늘 주변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아도 크게 이상하게 느끼지 못할 뿐이다. 적어도, 권력관계의 수혜자 쪽에서는 말이다.
극단적인 여대남소 상황을 만들되, 사춘기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모습들을 풍자하고, 그러면서도 단순히 소재 설정에 파묻히지 않고 잘 만든 서사적 재미를 주는 방법이 있을까. 나아가 아예 삶의 방식에 관한 인간드라마도 만들고 말이다. [Y: 더 라스트 맨](브라이언 K 본, 피아 구에라 외 / 시공사)은 그런 목표를 거의 완전하게 이뤄내는 작품이다. 00년대 초,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에 모든 포유류 수컷이(XY염색체) 정체불명의 괴질로 죽어버리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남자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각국은 주요 국가 행정 관료들이 대부분 공석이 되어버린다. 군사 균형도 깨져서, 여성도 전투부대에서 의무복무를 하는 이스라엘이 미국에 군사작전을 하러 침입한다. 그 와중에 오로지 살아남은 수컷은, 미국의 젊은 탈출 마술사 요릭과 그의 수컷 애완원숭이 앰퍼샌드다. 그리고 그의 존재가 일부에 알려지며 쟁탈전이 벌어지는데, 로맨틱 코미디와는 거리가 멀다. 요릭을 지키며 안전하게 연구시설 등 목적지로 데려가는 역할을 맡은 우직한 비밀기관요원 355, 유전공학자 앨리슨과 함께 긴 여정이 시작된다.
주인공들이 미국 전역을 누비며 목격하게 되는 풍경들은, 결국은 묵시록적 멸망의 세계가 아니다. 그냥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에 혼란에 빠졌지만, 결국 나름대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인간세상이다. 다만 남자들이 사라짐으로써 그간 얼마나 자연스럽게 남성 위주의 사회 권력체계가 짜여 있었는지를 종종 재발견할 뿐이다. 미국에서 권력 서열이 원래 두자리수 순위였던 농림부장관이 대통령 대행이 된다든지 말이다(작품의 무대에서 고작 10년쯤 지난 지금이야 여성이 국무장관도 하지만). 많은 것이 뒤집히고 불편한 것도 많지만 – 병뚜껑을 열 때라든지 – 그렇다고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성적인 측면 포함).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슬픔은 시간이 흘러가며 진정되고, 인구 절반에 대한 시체 청소도 결국 꾸준히 하다보면 진전이 있다.
반면 유일한 생존 남성이라는 희귀한 자원을 둘러싼 욕망은 살벌하다. 어떤 이들에게, 그는 괴질에 대한 면역 개발을 위한 귀중한 샘플이다. 다른 이들에게 그는 하늘이 내린 남성사회에 대한 천벌을 완성시키려면 마저 멸종시켜야 할 방해물이다. 또 다른 이들에게 그는 국가권력균형을 뒤흔들어놓기 위해 확보해야할 최중요 자원이다. 이스라엘의 특공대가 그를 납치하기 위해 미국에 침투하여 추격해오고, 사회적 보수성과 맹목적 종교성이 불타오른 과격 시민단인 ‘아마존의 딸들’은 그를 희생물로 삼아 천벌의 상징을 완성하고자 한다. 그들의 추격을 피하며, 그리고 남성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숨기며, 주인공들은 연구시설로, 요릭의 약혼자를 찾아, 괴질의 비밀을 밝힐 수 있을 과학자를 찾아 미국 전역 그리고 세계를 누비게 된다. 이런 주요 사건의 흐름에서 볼 때 요릭은 엄청난 희소성이 있되, 객체로서의 가치일 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와중에서도, 결국 인간의 이야기를 한다. 가벼운 청년 요릭이 355와 앨리슨과 함께하며 점차 세상 속 관계를 직면해나간다. 주어진 임무를 칼같이 수행하는 것에만 집중한 강직한 외톨이 355가 요릭의 느긋한 자세를 배워간다. 자신의 몸조차 연구용으로 생각한 앨리슨도 소중한 동료로 성장한다. 요릭 남매의 애증이 극단적 대립을 거치며 성숙해진다. 행복한 결말도 있지만,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열어놓는 후회도 많다. 기존 성별에 기반한 권력구조가 완전히 붕괴되었지만 서서히 새로운 질서 상태를 회복해가는 세계 속에서, 원래 사람들의 모습이어야 마땅할 부분들을 다시 끄집어내는 셈이다. 바로,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를 성숙시키는 것이다(그 과정에 원숭이도 한 마리 있지만).
무거운 설정과 진지한 스릴러, 묵직한 성장드라마를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며 독자들을 이입시키는 것은 바로 매력적인 캐릭터들이다. 순간판단력이 빠르고 대중문화를 늘 인용하며 경쾌한 유머로 입담을 과시하는 요릭이지만, 속으로는 성숙을 주저하고 탈출을 꿈꾸는 마음이 가득하여 적잖은 사고를 부른다. 지적이고 강한 프로페셔널 355 역시 근래 작품들 가운데 손 꼽을 정도의 ‘멋진 언니’형 캐릭터다. 악역인 이스라엘 특공대장 알터 역시 그 집요함과 결단력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이런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팽팽한 인간 관계는 최고 수준의 미국 미니시리즈 TV드라마의 느낌을 준다. 이야기 솜씨로 만화계 뿐만 아니라 TV드라마계에서도 러브콜을 받아 [로스트] 집필에 동참했던 브라이언 K. 본의 실력이 십분 발휘된다. 그림 역시 무조건 멋진 과장된 슈퍼히어로식 구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전개될 수 있을 정도의 평온한 극화체를 유지한다. 물론 매 챕터의 끝 부분에 ‘Y’라는 시각적 모티브를 담아내는 등 사실은 시각적 요소들을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있는데도, 스타일보다는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도록 만든다. 수많은 캐릭터들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비현실적 과장에 기대지 않는 캐릭터디자인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미국만화에 대해서는 바로 스타일리쉬한 그림체를 바라는 독자들에게는 바로 그점이 단점이 되겠지만 말이다.
인류의 절반이 죽어도 여하튼 세상은 돌아간다. 세상의 권력틀이 무너져도, 다시 무언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은 서로 함께 성장할 수 있다.
Y : 와이 더 라스트 맨 디럭스 에디션 01 브라이언 K. 본 지음, 박재용 옮김, 피아 구에라 그림/시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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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암흑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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