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 구멍, 그리고 명품 성장물 -『블랙홀』[기획회의 246호]

!@#… 하필이면 이번 글을 캡콜닷넷에 백업올리는 시점에, 돼지플루 창궐이라니;;;

 

전염, 구멍, 그리고 명품 성장물 -『블랙홀』

김낙호(만화연구가)

성장은 전염성이다. 흔히 떠올릴 법한 개인이 사회와 부딪히며 차츰 무디어져가고 철이 든다는 식의 그런 관점이 아니라, 어느 한 명의 성장이 특정한 조건을 거치면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전염되고 확산된다는 것이다. 각자의 학창시절들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성장에 대한 욕구든 아니면 별반 생각도 없었는데 성장의 길로 내몰리는 것이든, 항상 주변에 누군가가 성장의 모습을 보인 후 압박이 확산되어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장통을 겪는 또 다른 이들의 사연이 매혹 또는 공포 속에 내 생활에 침투하고, 그 속에서 내 방식의 성장을 겪고 나면 다시금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전파될 것이다. 또래집단 위주로 전염되곤 하는 성장이라는 전염병은, 결국 그 집단 전체가 ‘감염’될 때 즈음 이상하고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생활조건이 된다. 심지어 그 성장의 결과로 이전의 시각으로 보자면 무척 괴상한 존재들이 되어 있더라도 말이다.

『블랙홀』(찰스 번스 / 조재형 옮김 / 비즈앤비즈)는 특이한 전염병을 소재로 하고 있는 만화다. 작품 속에서 벌레병이라고도 부르는 이 증상은, 신체의 변형이라는 큰 맥락 외에는 감염된 각자에게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다만 신체의 변형이라는 것이 상당히 극단적이어서, 꼬리가 생긴다든지, 목 주위에 입이 하나 더 생긴다든지, 뱀처럼 주기적으로 전신 탈피를 한다든지, 그저 끊임없이 추한 괴물의 몰골이 된다든지 하는 식이다. 벌레병이 어디에서 생겨났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다만 성행위를 통해서 전염이 된다는 것은 알고, 그 비상식적인 이질성에 대해서 아무도 굳이 과학적으로 탐구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의 무대는 70년대 미국 시애틀의 10대 문화권으로, 히피적 자유의지의 시대는 살짝 지나갔지만 80년대적인 사회적 압박은 덜 했다보니 애매한 방종의 분위기가 풍겨났던 시기다. 그런 환경 속에서, 벌레병에 걸리고 서로에게 전염시키는 여러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다양한 에피소드 속에서 촘촘히 펼쳐진다. 병의 모체를 찾아 박멸하는 모험담이나, 병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감동드라마, 서로의 감염여부를 놓고 온 동네가 광기에 휩싸이는 싸이코스릴러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질적 비밀을 가지게 된 이들이 자신들과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과 상호작용하며 인간관계의 여러 측면들을 겪어 나가고 정신적 성장을 하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의식적으로 7-80년대 미국의 10대 소재 호러 영화의 분위기를 재현하곤 하는데, 섹스와 마약같은 장르화된 ‘탈선’ 코드를 듬뿍 사용한다든지 도시 청소년들이 숲 속에서 방종을 즐기다가 이상한 단서를 발견하고 초자연적인 변을 당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특징이다.

하지만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모티브는 좀 더 시각적인 상징으로, 무언가가 갈라져서 생기는 구멍이다. 이것은 무척 매혹적인 모티브인데, 구멍 속의 어두움 속에 무엇이 있을지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궁금해서 미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런 구멍이 있다면 종종 엿보고, 찔러보고, 파헤쳐본다. 때로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치 피할 길 없는 필연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피하면서도 동시에 갈구하게 되는 그 기묘한 형상은, 성장통의 과정과도 어쩐지 닮아있다.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벌이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험해나가고, 때로는 그것이 오래도록 남을 큰 고통을 낳더라도 어쩔 수 없이 달려들고 만다. 결국 작품 제목에까지 쓰인 그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구멍은, 작품 첫 페이지의 개구리 해부씬부터 노골적인 여성 성기의 연상 작용, 무언가를 밟고 다친 발이나 마지막의 검은 밤하늘까지 촘촘히 다양한 형식으로 반복된다. 구멍의 상징이 이야기 과정 속에서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고 뻗어나가는 것 역시 전염이라는 중요한 소재와 섞여들어가면서 힘을 발휘한다. 즉 내용적으로는 변신을 전제로 하는 전염병의 확산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시각적으로는 구멍이라는 모티브를 통해서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셈이다.

『블랙홀』은 잔인할 정도로 강렬하다. 이야기 측면에서는 “방탕한 10대들”의 성행위를 통해서 전염되는 신체 변형병을 중심소재로 하는 이야기인 만큼, 이야기에는 섹스와 마약이 난무한다. 하지만 그런 액면상의 소재보다 진정으로 자극적인 것은 그런 사건들의 와중에서 인간들이 자신과 서로에게 멸시를 안겨주는 모습들이다. 주인공들은 부모나 기타 일반 사회와 떨어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불안과 공포를 다룬다. 따돌림, 질투, 시기, 폭력, 그리고 모든 갈등을 몽롱하게 만들어주는 술과 마약… 어찌보면, 굳이 신체의 기이한 변형을 가져오는 병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좀 더 낮은 수준에서 보통 구사하는 것들일 수 있기에 더욱 실감나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강렬한 매력을 완성시키는 일등공신은 바로 시각적 표현력이다. 강렬한 흑백대비로 만들어진 풍경 속에 담아내는 미국 고전 만화를 연상시키는 그림체의 캐릭터들을 통해서 작품은 기이하게 불편한 느낌을 준다. 작가 찰스 번스는 여러 시사 잡지 칼럼에 일러스트를 그리며 미국 현대 생활의 일상적이면서도 뒤틀어진 모습을 묘사하는 실력을 발휘해왔는데, 그것을 좀 더 극단적으로 밀고 간 느낌이다. 여기에 풍부하게 등장하는 성이나 폭력, 엽기적 신체변형의 모습들을 역시 별다른 충격효과 없이 가감 없이 묘사하여 작품 속 세계에 이상한 현실감을 부여한다. 반면 환각이나 꿈 장면에서 다양한 서로 연결된 원형적 상상의 이미지들이 어지럽게 혼합되는 것이라든지, 주인공들의 대화 장면에서 각자의 생각과 구도를 드러내는 어지러운 칸 연출 기법이나 면밀하게 이전의 시각 구도를 변형하고 차용하는 페이지 구성들은 만화라는 양식이기에 추구할 수 있는 표현력의 극치를 보여주며 본격적으로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섬세한 나레이션과 디자인적으로 잘 계산된 강렬한 그림들이 엮이며, 작품에서 추구하는 성장통의 불안과 혼란의 감정은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블랙홀』은 원래 10여 년간 비정기적으로 얇은 코믹북 책자 형식으로 출판되어 연재되었다가 미국에서 2005년에야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고, 당연하다는 듯 평단의 찬사가 이어졌다. 그 관심에 힘입어 현재는 데이빗 핀처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영화화가 진행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용의 낯선 강렬함이 연상시키는 낮은 상업성 때문인지, 한국어판이 나오는 것은 좀 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행히도 한국어판은 번역도 제작도 (항상 아쉬움을 남기곤 하는 손글씨 글꼴의 부재 문제를 제외하자면) 영어 원판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높은 품질로 출판되어, 강렬한 그래픽과 섬세한 언어를 무리 없이 즐길 수 있다. 다만 남은 문제는 한국의 관련법이나 일선 서점들의 마인드로 받아들이기에는 묘사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인데, 이 책이 작품성으로 평가되어 적극적으로 지지받을 것인지 아니면 액면상의 표현 수위에 위축되어 묻혀버릴 것인지 이제 업자와 독자들이 판단을 내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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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블랙홀
찰스 번즈 지음, 조재형 옮김/비즈앤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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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thoughts on “전염, 구멍, 그리고 명품 성장물 -『블랙홀』[기획회의 246호]

Comments


  1. 이 작품이 한국에서 출판될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정말 상전벽해라고나 할까…!

    시시한 스크린톤따위 쓰지 않고 강렬한 흑백만으로 만든 지독한 이미지들이 영화로는 어떻게 표현이 가능할지… 역시 흑백으로 찍으려나요?

  2. !@#… 기불이님/ 사장님이 좀 용자;;; 안그래도 책 깔리자 마자 19금문제로 대형서적들에 진열 문제가 생겨 고민하시기에, 작품성에 대한 해외평단의 호평 실적을 강조하는 쪽으로 조언을 드렸더랬죠. 여튼 널리 알려져서 스테디셀러화되고 영화 개봉 타이밍에 더욱 부스트업 받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 영화버전은 저도 흑백이 먼저 생각났는데, 그 감독이 ‘세븐’에서 보여준 칙칙/갑갑한 화면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3. 호옷. 8시35분에 조재형님의 스티븐킹팬블로그에서, 블랙홀 관련 글을 읽다가…여기로 38분에 이동하니 캡콜님의 글이 있으니, 이런 우연이 아닌 필연.

    문제는 책값이다!

  4. 번역 품질은…… 상당히 읽기가 힘들던데요. 만화에서까지 그런 직역체 문장을 읽어야 한다는 게 너무 괴롭더군요.

  5. !@#… nomodem님/ 조재형님을 번역자로 한 것은 누구 아이디언지 몰라도(핫핫)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 책값은… 흑흑. 결국 미국 페이퍼백판과 비등한 수준으로 나온 셈인데, 제작스케쥴을 생각해볼 때 라이센스 비용이나 종이값 등에서 환율 폭등 크리를 제대로 맞았겠다 싶습니다;;;

    ssdd님/ 음… 저는 원문 내용을 최대한 충실하게 가져오는 직역을 선호하는 쪽이라서 무척 만족하고 있습니다만, 취향에 맞지 않는 분들도 확실히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6. Charles Burns는 “너무나 차가운 스타일 때문에 마치 사람이 그리지 않고 기계가 생산해낸 만화라는 느낌을 준다”는 평을 받는 그림에 어울리게 기계적인 Leroy Lettering System에 기반을 둔 글꼴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 작품만큼은 “손글씨 글꼴의 부재”가 다른 만화보다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닐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Harvey Kurtzman의 작품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EC Comics도 Leroy Lettering System을 썼다는 이유도 있을듯.)

    Black Hole 단행본이 나오기 전에 Fantagraphics에서 Black Hole 이전의 Charles Burns 만화 전작을 5권의 책으로 내놓을 예정이었는데… 3권까지만 나오고 그다음부터는 만화가나 출판사나 둘다 포기해버린듯 해서 더이상 나올 기미가 없군요. 본래 장편보다는 단편 위주의 만화가이기때문에 4권-5권에 담을 작품선정의 문제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읽은것 같은데 말이죠.

    최근에 프랑스에서 만든 흑백 애니메이션 영화 “Fear(s) Of The Dark”중 한 에피소드가 약 20년전에 Kitchen Sink Comics의 공포만화 앤솔로지 시리즈 Death Rattle에 실렸던 Burns의 걸작단편 “Ill Bred”를 애니메이션화한것인데, 불행히도 “Ill Bred”는 지금까지 나온 Fantagraphics의 3권 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죠. 아마 4권쯤에 포함될 예정이었을지도. (제가 20여년전에 샀던 Death Rattle은 그당시에 사모았던 다른 만화책들과 함께 제 동생집 차고에 보관해놓았었는데, 몇년전 폭우때문에 훼손되어서 동생이 다 내다버렸다고 하는군요.)

  7. !@#… Dreamlord님/ 헉 가족의 손에 의한 임의 처분;;; 자연재해가 중간에 개입되었다고는 하지만,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군요. ㅜㅜ // 맞는 말씀이시지만, 한글폰트 명조체 계열의 기계적 느낌에 비하면 Leeroy방식으로 입힌 식자의 분방함은 피카소급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