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라디오의 극적 승리 [한겨레21 642호]

!@#… 이번에 나왔던 한겨레21 2007 신년호의 해외소식란에 실린 글. 지면의 글은 짧은 버전, 보통 그렇듯 여기 capcold블로그는 원본 풀버전.

 

지역민들이 일구어낸 좌파 대담 라디오의 극적인 승리

김낙호 (위스콘신대 언론학 박사과정)

“2007년에도 방송은 계속 될 것입니다.” 이 발표는 미국 내에서 가장 진보 성향이 강한 도시 가운데 하나인 위스콘신주 매디슨 시민들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어주었다. 폐쇄 시한이 눈앞에 다가왔던 좌파 성향의 대담프로 전문 라디오채널 ‘더마이크’(theMIC 92.1)가 극적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미국에는 비록 점유율은 바닥권이지만, 에어 아메리카(Air America)라는 좌파적 대담프로에 특화되어있는 라디오 방송 제작사가 하나 있다. 이 곳은 원래는 ‘오레일리 팩터’나 ‘러시 림보우 쑈’ 등 극우 성향의 선동적인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들의 인기에 대항하기 위하여 2004년에 설립되었는데, 짧은 시간동안 빠르게 자기 색깔을 확고하게 각인시키는 것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방송국의 특징은 음악 위주의 프로 같은 것이 전혀 없는 반면, 하루 종일 때로는 정색하고 때로는 만담 풍으로 우익들의 우둔함을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기에 바쁘다는 점이다. 청취자들의 전화 참여를 통한 정치적 소신 피력, 진행자와의 즉석 토론 등 참여적 모습 역시 특징적이다. 이 방송은 나름대로 청취자층이 있는 미국 전역에 진출하여 현지의 가맹 채널을 통해서 프로그램들을 송출하는데, 덕분에 ‘알프랑켄 쑈’ 같은 재기발랄하며 날선 풍자가 돋보이는 유명 논객들의 프로그램을 해당 지역 방송국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2006년 11월 10일에 난데없이, 하필이면 텃밭으로 여겨졌던 매디슨 지역의 가맹 방송 채널인 더마이크가 2006년을 끝으로 사라질 예정이라고 발표가 났다. 샌안토니오에 본부를 두고 있고 이 채널을 소유한 방송국 경영진 측이, 청취자도 적고 경영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이 좌파 대담 전용 채널을 없애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대신 하필이면 우파 성향 뉴스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FOX방송국 산하 스포츠 채널의 가맹 방송을 2007년부터 시작하겠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이어졌다. 에어 아메리카 자체도 2006년 10월에 파산보호처분을 받았을 만큼 경영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인데, 매디슨에서 가장 먼저 이런 일이 터진 것이었다.

하지만 예고된 기일을 불과 10여일 앞둔 아침, 방송국은 극적인 새 발표를 했다. 2007년에도 더마이크 채널을 존속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방송국의 폐쇄를 아쉬워하던 많은 이들은 몇몇 프로그램만이라도 인터넷을 통해서 감상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거나 모금 운동을 통해서 추후에 소규모 방송 채널을 하나 새로 설립하는 것을 한창 논의하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사실, 폐쇄결정이 발표된 후 한달 반 남짓의 기간 동안 매디슨 시민들은 열성적으로 채널을 살리기 위한 지지를 보낸 바 있다. 경영진들에게 메일이나 전화를 통한 항의는 물론, 서명운동 및 주말 시위 역시 진행되었다. 키슬레비츠 시장, 볼드윈 하원의원, 파인골드 상원의원 등 이 지역의 유명 정치가들 역시 한 목소리로 방송사의 결정에 유감을 표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항의 운동이 대부분 발레리 왈라섹이라는 28살의 한 여성 청취자에 의하여 조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 명의 열성적인 개인이 선두에 나서고 모두가 뜻을 모은 방식은 물론, 특히 미국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인 기업 결정사항의 번복이라는 쾌거를 극적으로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벌써 풀뿌리 운동의 새로운 모범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왈라섹이 실천한 운동 방식은 그 자체로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온라인 서명운동을 조직해서 경영진에게 5000명 이상의 의사를 모아 전달하고, 시위를 조직하고 주변에 사안을 널리 홍보하여 자발적인 지지를 구하는 일이었다. 방송사에 대한 로비라든지 같은 기업의 계열 방송에 대한 불청 선동이라든지 하는 식의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매디슨 지역의 건강한 공공 정치의식을 위해서 이 채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홍보하고 뜻을 모아내는 시민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정석을 따랐다. 시민들 역시 뚜렷하고 적극적인 여론으로 화답했고, 그 결과 미국에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사안으로 등극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러한 화려한 조명 뒤에, 이 승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이끌어낸 또 다른 주역은 따로 있었다. 바로 지역의 자영업자들과 기업이다. 방송국의 자료에 따르면 사실 더마이크 채널 경영의 난맥상은 애초부터 청취자 호응의 부족함이 아니었다. 실제로 청취율 자체는 아비트론 표본 조사 결과 항시 3만명 정도의 동시 청취자를 기록했고, 전체 25개 채널 가운데 11위임은 물론 뉴스 대담 전문 방송 가운데는 2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역 특화 채널 14개 가운데 수익이 14위에 그쳤다는 것이었다. 즉 광고가 붙지 않았던 것이다. 하기야 정치적인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불온한’ 토크쑈만 하루 종일 나오는 채널이 광고주들에게 상업적 매력이 클 가능성은 낮다. 미국 역시, 좌파나 진보는 반시장적이라는 고정관념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프 타일러 방송국 대표의 발표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폐쇄 발표 후 한 달 반이라는 기간 동안, 지역의 자영업자들과 기업들이 나서서 너도나도 자신들의 가게에 대한 광고시간을 구매했다. 즉 채널 존속의 명분과 기반을 마련해준 것이다. 그 과정 역시 지극히 풀뿌리적인 발상과 과정을 거친 것으로, 평범한 동네 레스토랑 주인이 인근 상점 주인들을 규합해서 광고주로 나서도록 종용하는가 하면, 가게들이 자발적으로 채널을 수호하자는 홍보 포스터를 매장에 붙이도록 허용해주는 방식의 협력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광고 시장의 호응을 통해서 라디오 채널의 수익성이 개선될 전망이 보이자, 결국 경영진은 지역 시민들의 요구에 응하여 폐쇄 결정을 번복하고 2007년에도 계속 이 좌파 대담 채널을 유지하기로 선언했다.

지금 활동가들은 이러한 성공이 좌파 대담 라디오 채널을 지키고자 하는 다른 지역에도 하나의 중요한 모델이 되어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특히 원래 미국식 민주주의의 근간이었던 지역 공동체 단위의 풀뿌리 시민운동이 아직 충분한 효력이 있다는 증명 사례로 남아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실제로 에어 아메리카는 보스턴과 신시내티 지역에서 최근 가맹 방송국을 잃었고, 이외에도 다수의 지역에서 비슷한 경영난을 겪고 있는 상태다. 매디슨의 사례는 그런 곳의 활동가들과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방송 권한은 스스로 지켜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다는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좌파 대담 라디오 채널의 앞날은 여전히 가시밭길이다. 비록 광고주들이 늘어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기업은 낮은 수익 때문에 더 고생해야 할 것이고, 시민들의 입장에서도 2007년이 지나면 언제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여하튼 지금 당장은 채널을 계속 유지하며 방향을 모색해보자는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듯 이번 사건은 시민운동이 기업을 대상으로 싸워서 성공을 거두기 위한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일반 시민에서 정치 지도자들까지 폭넓은 호응을 바탕으로 하는 명분을 확보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치더라도, 직접적인 상대인 기업의 핵심 목표인 수익성 측면에서도 서로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운동의 방향을 찾아나서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즉 막무가내로 기업의 결정을 비난하기만 하는 안티운동이 아니라, 방송을 살리려면 필요한 조건 역시 같이 지원해주는 포지티브 전략 말이다. 명분이 있는 원칙을 기반으로 하되, 대결과 배제의 운동이 아닌 타협과 상생을 위한 운동이 될 때 결국 성공한다는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인 법칙이 다시금 증명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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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theMIC 라디오채널의 웹사이트. 이곳에서는 현재 각 진행자들이 채널 존속 결정에 환호하며 자기 프로에서 매디슨 시민들의 성공적인 풀뿌리 운동을 축하한 방송 내용을 서비스중이다.)


PS. 한 줄 요약: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과도 마찬가지로, 운동 역시 뭔가 해내려면 당근과 채찍.

PS2. 한겨레21에 실린 초고를 보낸 후 발견한 바, 내가 좋아하는 스테파니 밀러쑈는 알고보니 에어아메리카 제작이 아니었더라는… 워낙 대다수 에어아메리카 가맹채널에서 이 프로를 편성해넣고 있는데다가 성향도 딱이라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뭐, 이런 프로를 만드는 회사가 여럿 있다면 더욱 좋은 일.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가 —
(여튼, 2006년에 써보낸 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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