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생각하게 하는 만화들 [싱크 8호]

!@#… ‘정의란 무엇인가’ 붐을 타고 오히려 정의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린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다(…)

 

정의를 생각하게 하는 만화들

김낙호(만화연구가)

지난 1-2년 동안 대중 교양 담론을 지배한 두 가지 토픽이 있다면, 바로 ‘멘토’와 ‘정의’일 것이다. 그 중 멘토는 낯선 용어에서 모든 좋은 것을 포괄하는 일반적 미덕의 (거품끼가 다분한) 버즈워드로 올라가버린 경우고, 정의는 누구나 흔히 이야기해온 상식적 미덕이 사실은 그리 명쾌한 문제가 아님에 혼란스러워하며 좀 더 세부적인 가이드를 갈구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통치세력이 말하는 국익, 시민들이 느끼는 자유의 박탈, 진지한 진보담론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이들이 이야기하는 인권, 기타 모든 것들 사이의 혼란에서, 정의가 고정된 가치라기보다는 선택과 합의로 정해지는 것임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는 것이다. 너도나도 나름대로 정의를 고민해보거나 혹은 고민하는 분위기를 인지하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조금 관심 기울여보는 분위기다. 센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의 히트가 그런 사례인데, 대부분의 철학적 논제 도입을 선택의 문제로 시작한다. 당신이 기차의 방향을 바꾸면 1명만 죽고 내버려두면 10명이 죽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라든지 말이다.

더우기 사회적으로 합의되는 정의는 늘 더욱 복잡하게 발전하는 사회 속 상황들의 모습보다 한 발짝 뒤처지기 쉽다. 정의를 빙자하여 사회적 권력을 공고하게 독점하려고 하는 권력층의 횡포, 그것을 의심하느라 정의 자체를 부정하는 반대방향의 피해 등이 가득하다. 그 안에서 각 개인과 집단들은 느슨한 자기 해석에 따라서 자신들의 정의를 주장하고, 그것은 자신들의 소망과 달리 그다지 적용범위가 넓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화이트테러를 일삼는 극우 가스통 할아버지 시위대를 떠올려보라. 혹은 시민의 힘으로 정의를 실현한다며 수많은 불특정 다수 온라인 사용자들이, 사소한 분쟁사건의 가해자를 신상추적하고 집단적으로 사생활의 영역까지 침범하여 비난하는 ‘**녀’ 사건들을 생각해보라.

판단은 늘 미묘하고, 교류가 되지 못하는 만큼씩 서로에게 불의가 된다. 그렇기에, 정의에 대한 성찰을 불러오는 이야기들을 충분히 접하면서 평소에 늘 섬세한 고민을 하는 훈련이 되어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를 생각하게 만드는 만화들을 몇 가지 살펴보자. 정의인 줄 알았는데 악이었다, 악의 조직도 나름 정의가 있다 그런 정도는 너무 흔하고 사실 생각거리도 많지 않으니 생략하고, 조금 더 미묘한 내용들로 골라본다.

적응과 저항 사이

[이끼](윤태호)는 한 남자가 지나친 강직함으로 인해 사회에서 밀려난 후, 시골 마을에 사시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갔다가 그 마을에 어떤 수상한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되고, 눌러살며 조사를 하는 이야기다. 마을 이장의 절대적 구심력 아래 외지인을 경계하고 자신들의 무언가를 계속 꾸려내는 주민들의 묘사가 섬뜩하게 전개되고, 그 모든 것의 바탕에 있었던 권력의 속성, 사회적 정당성과 초월적 정의의 충돌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연출 속에 하나씩 음습하게 드러난다. 물론 이장과 주인공의 아버지가 벌였던 힘의 대결과 정의도 눈여겨볼만 하지만, 오히려 먼저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일찌감치 드러난다. 주인공 류해국이 애초에 이야기 시작 부분의 그 모습에 이른 과거 말이다. 회사에서의 비교적 사소한 업무 연관 분쟁 사안에서, 적당히 무마하고 넘어갈 것을 종용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법대로, 논리대로 끝까지 달라붙었다. 그러자 뒷선에서 적당히 묻힐만한 일은 공식화되고, 법정 싸움에 가고, 그것을 다시 적당히 무마하려던 검사도 함께 엮여서 무너진다.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이 소요되고, 그 과정에서 회사에서도 가족에게도 버림 받는다. ‘올바름’을 결국 실현했지만, 남도 자신도 개입한 검사도 모두 불행한 조건으로 떨어졌다. 둥글게 맞추어 가며 수습하지 않고, 끝까지 직선으로 승부를 본 대가다. 불의에 적응을 하지 않고 저항을 하는 것은 정의다. 하지만 그 결과 모두가 불행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슷한 맥락에서, [왓치멘](앨런 무어, 데이브 기본스)에 등장하는 정의도 묶어낼 수 있다. 슈퍼히어로들이 실제 세계에 존재했고, 이제는 법적으로 금지시킨 시대에 옛 동료의 살해사건을 계기로 이전 히어로들이 다시 모여 수사를 하는 걸작 스릴러인데, 스스로 분연히 일어나 정의를 실현한다는 자경단 방식의 ‘정의의 파수꾼’들의 복합적이고 인간적인 결점들을 통해서 정의감의 한계를 논한다. 이 이야기에서 결국 파국적 문제가 되는 것은 거대한 외부의 적을 거짓으로 만들어내어, 인류의 뜻을 하나로 만들어내는 세계 평화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의도적인 무고한 희생들은 세계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거짓 위에 세운 평화는 과연 지켜나갈 가치가 있는가. 기만으로라도 구축한 평화를, 살인과 기만을 용납할 수 없다는 기준에 의해 흔들면 그것은 불의인가. 작가는 모든 질문을 하여 독자를 괴롭히고는, 교조적으로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다. 다만, 그런 상황이 지속될 수 없을 것이라는 힌트를 슬쩍 던져놓을 따름이다.

당신만 가만히 있으면, 조금 둥글게 넘어가면 모두가 그럭저럭 잘 살 수 있다. 이것은 작은 정의와 큰 정의로 재단하여 후자의 손을 들어줄 수 있는 것인가. 도덕 편집증과 노골적 부패 사이의 경계는 너무나 자주, 회색이다. 그 회색을 핑계 삼아 후자로 끌려갈 것인가, 그래도 계속 생각하고 노력할 것인가.

불의를 단죄하는 것

광주민주화항쟁 당시의 학살 피해와 그 상흔 속에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인 [26년](강풀)은 기억과 단죄에 대한 이야기다. 80년 5월 광주의 피바람의 후유증에 고생하던 여러 사람들이 26년 후, 학살명령을 내린 지도자인 당시 대통령 전두환(극중에서는 직접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을 암살하려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하여 각자의 삶에서 그 트라우마틱한 경험이 어떤 식으로 응어리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며, 그것을 계기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수많은 정의에 관한 딜레마가 생긴다. 위로부터의 명령에 따라서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것은 정당한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을 때 말이다. 피해의 상흔을 누르며 어쨌든 훌훌 털고 계속 살아가는 것은 정의가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시스템이 해결해주지 못한 불의에 대한 단죄는 또 누가 해서 정의를 회복하는가. 그런데 원흉인 전두환을 살해해서 복수하는 것이 정의인가 아니면 사적 복수의 살인인가. 생각하기 시작하면, 질문거리가 넘친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점은,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실제로 있었던 이런 식의 아픔을 기억하고 이런 식의 충돌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정신 차리고 체제를 손보는 것 만큼은 명백한 정의라는 점이다.

단죄의 문제라면 [살인자ㅇ난감] (노마비) 역시 금새 떠오른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탕이라는 청년은 일련의 우연한 사고를 통해서 사람을 죽이게 되는데, 알고 보니 쉽게 생각해도 죽어 마땅할 정도의 사회악을 저지르고 다닌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탕이 살인범이라는 증거마저 우연히 없어진다. 그리고 계속 일이 꼬여가면서 그런 식의 살인이 연속되고, 매번 결과는 같다. 나쁜 놈 골라 죽이는 초월적 능력이기에, 내키는 대로 죽이고 나면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결과로 판명된다. 그런데 이것은 정의인 것인가. 이런 질문을 키워내는 것은, 누구나 불의하다 믿으며 우선 죽이고 보는 연쇄살인마 송촌이다. 만약 이탕의 행위에서 그 기막힌 결과론적 우연이 없다면, 자의적 살인마 송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추적하는, 좀 더 주어진 단순한 체제 내 원칙으로 경찰 일을 하고 있는 장난감 형사가 있다. 의도로서의 정의, 결과로서의 정의에 대한 질문이자, 체제가 해결하지 못한 부분에서 초월적 단죄가 이루어지는 식의 정의에 대한 수요를 찔러본다.

집단을 위한 선택

정의에는 본연적으로 사회적 측면이 있고, 결국 집단의 정의와 그것이 개인의 정의를 다루는 방식 사이의 갈등이 생기기 쉽다. [쿄시로 2030] (토쿠히로 마사야)의 세계는 핵전쟁으로 사막화된 땅 위에서, 중앙 통치로 인구 숫자가 통제되는 농장 단위 집단거주 체제로 이뤄진다. 남녀간의 육체적 접촉은 금지되고, 안정된 체제 속에서 병사는 싸우고 농부는 노동하고 권력은 부패한다. 네트워크에서 만난 사랑하는 여성과 실제로 만나기 위해 그 세계에 반기를 들고 싸움에 나서게 된 주인공 쿄시로, 그리고 쿄시로를 만나기 위해 권력층에서 마찬가지로 싸움에 나서는 유리카의 활극이 펼쳐진다. 집단의 개인에 대한 통제의 정당성 여부라는 거시적인 정의의 문제가 전반에 흐르고 있지만, 특히 주목할 에피소드는 쿄시로가 여행하고 싸워가는 도중 한 농장에서 겪는 일이다. 농장 주민들은 쿄시로가 그들을 위해 싸운다는 것을 알지만, 농장의 평화를 위해 그를 배신한다. 그들의 공동체에서 지극히 민주적이고 자발적 합의로 말이다. 단순하게 보면 정의의 주인공과 배은망덕한 나쁜 주민들이지만, 결국은 센델이 즐겨 인용한 기차 방향 바꾸기 문제다. 개인의 정의, 공동체의 정의, 보다 큰 틀의 정의가 서로 하나로 연동되어 합쳐지지 않을 때, 언제라도 발생하는 생각 거리다.

***

정의의 문제는, 늘상 답보다 질문이 많다. 도덕적 옳음에 대한 관념인데, 결국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일이 무엇인가라는 공정한 사회적 규범의 정립, 즉 지키는 것을 장려하고 어기면 처벌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존 롤즈의 말처럼, “진리가 사고의 체계가 되어주듯, 정의가 사회기구의 핵심 가치다”. 역시, 유행으로 인한 것이든 어떻든 이왕 부각된 것을 계기로 삼아,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계속 질문하고 성찰해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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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만화잡지 격월간 [싱크]. 이미지프레임 발간. 테마별 만화들을 소개하며 인문사회적 화두를 넌즈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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