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샌 멘토에서 연장선상으로 ‘힐링’이 또 막 유행하더라(…)
멘토 열풍을 보며 스승을 생각하기
김낙호(만화연구가)
늘 무언가 열풍에 휩싸이는 것이 한국사회의 일상적 풍경이기는 하지만, 지난 1-2년간 불었던 열풍 가운데 가장 특출났던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멘토 열풍이다. 멘토라는 원래 꽤 낯선 느낌의 단어가 어느덧 어디서나 사용되고 있는데, 특히 인생에 무언가 도움이 되어주는데 강압적이지는 않은 무척 훌륭한 미덕을 형상화하곤 한다. 멘토의 원래 의미라고 한다면 – 무슨 오디세이까지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참자 – 상호 동의에 의하여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고 롤모델 역할을 하면서 삶과 일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 뭐 그런 식이다.
사실 모든 열풍들이 그렇듯, 히트를 친 후에는 원래 의미보다 훨씬 확장되어 대충 좋은 이미지를 심고 싶은 것들이 너도나도 달라붙는다. 원래 의미에 가까운 1대1 멘토링 프로그램의 확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교훈 격언 모음집으로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김난도 교수 같은 이를 멘토라고 부를 때는 실제 인격적 친밀함이라기보다는 일련의 소재 선정과 표현법들을 통해서 그런 식의 관계를 맺은 듯한 느낌을 주는 일종의 가상 멘토링 체험 수준을 넘지 않는다(어떤 연예인을 국민 어머니라고 부를 때와 실제 어머니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적당한 위안이 되는 말을 공연장이나 미디어에서 하며 나름대로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 내세울만한 이들의 통칭이 된 것은 물론, 어느덧 유능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얻거나 부여하고 싶을 때 심심하면 쓰는 개념이 오늘날의 ‘멘토’다.
사실 멘토로 어렴풋하게 대표되는 ‘내 처지에 맞춘 감성적이면서도 실제로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지도편달’에 대한 욕구는, 무익한 과잉경쟁 속에서 공교육을 부족한 것으로 치부하며 밀어내버리고는(역설적이게도 다수가 그런 선택을 함으로써 공교육 상황은 더 악화된다) 너도나도 맞춤형 개인과외로 뛰어드는 모습과 상당히 닮았다. 조언과 감동의 수요를 공적 시스템 강화와 무익한 사회적 스트레스를 경감시키는 쪽으로 조직적으로 나서서 대처하는 길보다는 나만을 위한 비법/감동을 택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 실제로 멘토 대중 스타의 경우 모두에게 같은 조언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더 나에게 맞춰져있고 더 나의 모든 것, 즉 내 감성적 성장까지 보듬는 전인적 지도편달이다.
그런데 얄궂게도, 멘토가 유행하기보다 훨씬 전에, 그런 식의 긍정적 함의는 바로 ‘스승’의 몫이었다. 어느덧 모든 선생을 의례껏 스승이라 부르다보니 그 이미지가 무척 낮아졌을 따름이다. ‘스승의 날’이 교육 뇌물(속칭 촌지) 조심 주간이 되어 버린지 오래일 만큼 스승이라는 말이 너무 알맹이 없어졌기에, 전인적 교육자의 긍정적 지향점을 표상하기 위해서는 스승이라는 말이 너무 민망해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버즈워드를 장착하느라 바쁘다보면, 이전에 그런 개념에 관하여 어떤 식으로 사람들이 사고해왔는지를 리셋해버리기 쉽다. 그렇기에 멘토의 열풍 와중에서, 다시 스승을 생각해볼 때다. 만화라는 대중예술 장르에서, 스승이라는 역할은 어떤 식의 상상과 바람을 드러내고 있는가.
무엇을 가르치는가
어떤 미덕이 추가되든, 스승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바로 구체적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다. 숫자를 더하는 방법이든, 마왕을 쓰러트리는 방법이든, 처세술이든 여하튼 무언가 가르치는 것 없이는 스승-제자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좀 더 팬시하게 멘토-멘티 관계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전달되는 바 없이 그냥 감정만 위로하면 멘토가 아니라 상담자일 뿐이다. 기술을 전하고, 훈련을 시키고, 이왕이면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도사랜드](이원익, 두엽/ 발해)는 현대 한국사회를 무대로, 도사와 도깨비, 신선들과 요괴들이 살아가며 싸우는 경쾌한 이야기다. 주인공 용운이는 길거리에서 “도를 믿습니까”라고 접근한 김도사를 어쩌다보니 스승으로 모시며 도술을 배우게 된다. 한국 전통민담속 스승처럼, 스승은 제자에게 비기를 전수하며 엄격하게 훈련을 시키고 양육하는 유사 가족 같은 관계다. 그럼에도 이 작품 속 둘의 관계는 단순히 끈적한 것 이상으로 쿨하고 대등한 유대를 보여주며 현대화된 스승-제자 관계의 바람직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식이 가능한 것은 역시 전수하고 전수받을 확실한 신기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도사와 그의 스승이었던 신선의 과거 사연은 훨씬 전통적 끈적함, 그리고 배신으로 얼룩져있다보니 더욱 두드러진다.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필수지만, 그것에 머물 필요는 물론 없다. 이왕 가깝게 붙어 다니며 가족처럼 지내는데 더 큰 가르침을 덤으로 얹어도 괜찮다.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정도가 어떨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박흥용 / 황매)의 주인공인 서자 출신 견자와 그의 스승 맹인 검사 황정학은 관계가 그렇다. 황정학은 견자에게 검술을 전수하면서도, 작가의 목소리를 거의 직접적으로 대변하듯 자꾸 철학적 화두를 던진다. 아기가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줄로 허리와 나무를 묶어놓았다면, 그 줄은 아기를 지키는 것인가 속박하는 것인가. 이런 것은 검술과 직접적 관계는 없지만, 강맹한 검을 휘두르는 자가 이 세상을 여행하고 사람들의 세상을 바라보기 위한 마음가짐이다. 사실 구체적 기술의 전수 없이 세상을 보는 감상만 전하면 스승이라고 보기에도 좀 더 감상적으로 멘토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만, 그런 것이 갖춰졌다면 단순한 기예가 아닌 좀 더 온전한 능력의 전수가 이루어질 수 있다. 특히 스스로 깨달아 체화해야할 부분에 대해서는 직접 정답을 외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질문과 채근을 통해서 결국 깨닫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을 위해 계속 가깝게 붙어다니는 것이다.
즉 구체적 기술을 전하고, 그 기술이 활용되기 위한 총체적 맥락(세계관 등)을 함께 조성해주는 것이 바로 스승이니 멘토니 하는 일반적 교육거래를 넘어서는 미덕 넘치는 표현에 담겨있는 함의이자 책임이다.누구나 자신만의 김도사나 황정학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개념이 암시하는 미덕과 실제 받고 있는 교육 사이의 간극이 커보일 때 무엇이 부족한지는 알 수 있으리라.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
실제 교육전달 행위 말고도 스승/멘토의 또다른 중요한 기능은 바로 역할모델이다. 존재 자체가 교육 효과를 지닌다는 것인데, 가까이에서 함께 하며 보고 배우는 모습들이 적지 않은 것은 비단 유아기 뿐만이 아닌 셈이다. 그렇기에 스승-제자는 단지 스승의 능력이나 전달되는 내역 뿐만 아니라, 둘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속성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반면 함께 만드는 관계 없이 그냥 일방적으로 던져진 가상의 스승이니 멘토니 하는 경우라면 이 지점에서 한층 피상적이 될 수 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바라보며 나도 나중에 그렇게 되고 싶다는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관계는 기본적으로 흔하니 조금 다른 방식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스승을 좀처럼 닮고 싶지 않다면 어떨까. 격투 코미디 활극 [란마 1/2](타카하시 루미코 / 서울문화사)의 주인공 란마와 언젠가부터 그의 스승처럼 되어버린 팔보채 할아범의 관계가 그렇다. 팔보채는 시도 때도 없이 여색을 밝히며, 비열하기 짝이 없는 엇나간 무술가다. 하지만 그의 무공은 수수께끼인 나이만큼이나 끝을 알 수 없고 각종 이상한 중국 고대의 비기를 알고 있기에, 여러 곤란한 상황에서 그의 도움을 얻어야만 한다. 저주에 걸려서 찬물을 끼얹으면 여자로 변신하는 란마에게 있어서 그런 스승의 존재는 더욱 못마땅하다. 팔보채는 어쩌다보니 계속 가깝게 붙어있고 자의로든 타의로든 배움을 얻게 되는 명실상부한 스승 역할이지만, 바람직한 무도가의 완벽한 반면교사다. 닮고 싶지 않기에 반대 방향의 롤모델로 배움을 주는 격이다.
혹은 넘어서야할 대상이라는 측면을 살펴보는 것도 가능하다. [드래곤퀘스트 – 타이의 대모험](산조 리쿠, 이나다 코지 / 대원CI)에서 주인공 소년 타이의 검술 스승인 아반은, 작품 상에서 정작 실제 스승 노릇을 하며 기술을 전수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그보다는 이야기의 초반에 마물들과의 싸움에서 죽은 것으로 처리되며 타이에게 계속 하나의 빈 자리로 남는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상태에서, 스승은 뛰어넘어야할 하나의 상이 된다. 몇 번 바라본 필살기를 혼자 계속 모험 속에서 완성시키고 강화시켜서, 자신이 기억하는 아반이 보여준 위력보다 훨씬 강한 무언가로 만들어내야 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어준다.
[다크나이트리턴즈](프랭크 밀러)에서는 반면교사도 넘어야 할 벽도 아닌, 동업자로서의 스승 관계가 나타난다. 근미래의 고담시에서 이미 은퇴한 중노년의 배트맨이 각종 범죄의 창궐 속에서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고, 그의 싸움을 동경하던 소녀가 새롭게 그의 조수 로빈을 자처하며 따라나선다.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결국 함께 다니며 싸움법을 알려주는 스승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함께 싸우는 파트너로 점차 인정해준다.
이렇듯 롤모델은 단순히 그대로 닮고 싶은 대상이라기보다, 반면교사로서도, 빈 자리를 남겼기에 뛰어넘어야할 대상으로서도, 대등하게 함께 하는 파트너로서도 범위가 확장될 수 있다. 자신이 스승이라고 생각해볼만한 관계가 맺어져 있는 누군가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보고 배움을 얻을 것인가 좀 더 넓게 성찰해보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그런 배움의 첫 걸음이다. 적당히 착하고 좋은 격언들을 잔뜩 들으며 스스로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스스로 배움에 대해 더 많은 성찰과 고민을 시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스승이니 멘토니 하는 관계들이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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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만화잡지 격월간 [싱크]. 이미지프레임 발간. 테마별 만화들을 소개하며 인문사회적 화두를 넌즈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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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100배. 오늘날의 언론매체는 각 낱말이 가진 의미를 왜곡시키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는 듯하다. 글의 밀도보다 자극의 강도가 우선된 결과일까? RT @capcold:멘토 열풍을 보며 스승을 생각하기 [싱크 9호] http://t.co/UUg8hTF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