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세밀한 잔선들을 고스란히 살려준 인쇄품질관리 등 기술적 만듦새도 더 칭찬해 마땅하지만, 작품이 작품이라서 그 자체만 설명하기도 지면이 모자랐다. 포겟미낫이나 아베노바시 같은 작품보다는 역시 스피릿이나 에마논 같은 다분히 낭만적 SF쪽에서 더 빛을 발하는 작가.
호기심과 경이에 귀 기울이기 – [스피릿 오브 원더]
김낙호(만화연구가)
SF소설의 대가 아서 클라크는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언젠가는 발달된 과학기술로서 구현할 수 있는 어떤 현상이, 그것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볼 때에는 마치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이능처럼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슨 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무지함을 비웃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근간을 두면서도 상상력의 폭을 최대한도까지 끌어올리는 이야기들을 구현하기 위한 기반이다. SF작품을 만들면서 과학적 설정에 대한 세세하고 집요한 탐구에서 재미를 느끼도록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 반대로 자유로운 상상력의 확장을 통해서 오히려 인간됨과 세상에 대한 성찰을 유도해보는 재미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다시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스케일을 통해서 울림을 주는 것이다. 그 반대 지점 어딘가에 있는 것은, 일상적인 생활 풍경인데 그 안에 어떤 다른 자연법칙을 따르는 가상과학이 등장하는 것이다. 증기기관이 동력원인 상태로 기계문명이 급격히 발달한 가상세계를 바탕으로 하는 스팀펑크 장르 같은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양쪽 모두를 아우르는 경쾌한 작품도 가능하다. [스피릿 오브 원더](츠루타 켄지 / 세미콜론)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일상 속의 가상과학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면서, 파급력의 스케일은 키운다. 일상의 소소한 사람들 사이의 크고 작은 관계와 소망들이 있고, 그것을 펼쳐나갈 독특한 상상력의 유사과학이 있고, 그 명백한 유사과학으로 뻔뻔하게도 상상력의 스케일을 키워서 끝까지 내달린다. 이런 조합을 손쉽게 가져가려면 부조리 개그물이 가장 적합할텐데, 그 대신 이 작품은 호기심과 경외심을 선택한다. 제목 그대로, 경이를 찾는 마음이다.
수록된 작품들의 색이 가장 뚜렷하게 압축된 대표적 에피소드는 ‘차이나양’ 3부작이다. 하숙집을 경영하는 젊은 아가씨, 하숙생인 괴짜 과학자, 그의 젊은 조수가 주인공이다. 아가씨는 조수를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지만, 쓸모없는 일에만 매달리는 듯한 과학자와 붙어있는 것이 불만이며 혹시 꽃가게 점원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신경이 쓰인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자가 만들어내는 발명품은 늘 뭔가 이상하고, 종종 부서지곤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늘 새로운 뭔가를 만들면 구경하러 가고, 말려든다. 그리고 조수는 어떻게든 슬쩍 마음을 고백하려고 발명품을 이용하려 하는데, 원하는 대로 깨끗하게 풀리지 않는다. 달로 지구에 토성과 같은 고리를 만들어 그것을 반지 삼아 고백하고자 한다. 그런데 물론 그렇게 하려면 엄청난 작업이 필요하고, 그 결과 발생하는 자연적 문제도 상당하다. 이렇듯 ‘도라에몽’부터 나름대로 전통이 깊은 발명품 소동 장르와 러브 코미디의 틀거리 위에, 우주적 규모로 커지고 시공간을 휘어버리는 큰 스케일의 과학 모험이 합쳐진다. 그리고 그 과학은 우리 세계의 엄격한 물리법칙이 아니라, 상상력이 깃든 살짝 다른 것들이 가능한 세계의 무언가다.
이 책에는 수록된 여러 단편들은 하나 같이 현실의 지구와 닮았지만 종종 약간 다른 자연법칙이 있는 곳이다. 공간을 구성하는 물질이라고 근대과학에서 한동안 탐구되었다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난 ‘에테르’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의 단편도 있고, 물리적 간섭이 가능한 3차원 굴절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단편도 있다. 달로 지구에 토성과 같은 고리를 만들거나 별똥별을 느리게 만드는 것이 가능한 세상의 작품도 있다. 낭만적 몽상을 쫒는 과학자들, 그런데 그 몽상이 실현될 수 있는 세계인 셈이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런 법칙을 이용해서 무언가 신기한 발명품을 만드는 과학자가 등장한다. 그 발명품이 쓸데없는 몽상이라고 구박하며 현실에 발을 딛일 것을 종용하지만, 결국 어떤 식으로든 그 몽상에 참여하게 되는 이들도 있다. 결국 발명은 실현되고, 세상은 무언가 살짝 달라진다.
그런데 이들이 그런 엄청난 과학적 발명으로 이루고 싶어 하는 소망은 늘 지극히 일상적이고 따뜻한 꿈이다. 화성으로 탐험을 가겠다는 노인 과학자들의 소년적인 꿈도 그렇고,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고 싶은 하숙집 주인 아가씨에게 거대한 이벤트를 벌이고자 하는 소망도 그렇다. 낭만적 몽상이 실현되는 (작품 내 자연법칙에 의거한) 과학적 발명품은 거대한 스케일을 열어주지만, 그 쪽에 집중하는 SF단편들이 종종 구사하는 방법인 우주의 거대함과 인간의 작음을 대비시켜서 성찰을 유도하는 그런 방식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주적 스케일과 인간의 소소한 소망 실현이 합쳐지며 결국 일상 속의 몽상적 호기심과 경외심이라는 마음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거대한 크기로 확대되어 은하계를 가로지르고, 달로 지구에 고리를 걸고, 비행선을 타고 에테르 바람을 받아 우주항해를 한다. 사랑하는 이를 찾아,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아니면 그저 낭만적 모험심으로 말이다. 지구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비장함보다는, 호기심으로 탐구하여 만들어진 무언가를 경외심으로 바라보는 그런 정서다.
[스피릿 오브 원더]는 국내 SF팬들에게 꽤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작품이다. 십여년전 잠시 세주문화사에서 발매되었다가 절판되고 해적판으로 한 두 번 다시 등장했는데, 이번에 컬러 페이지 등을 살리고 번역을 새롭게 가다듬은 책으로 다시 나왔다. 작가인 츠루타 켄지는 활동 연수에 비해서 작품 발표가 적은 것으로 유명한 편인데, 잔선이 많고 구도가 꽉 짜여진 그림, 풍부하고 섬세한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 표정, 압축성 뛰어난 칸 연출 등을 보면 확실히 작업 시간이 적게 들어갈 수 없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작가의 성향 자체가 작품 발표를 느리게 만드는데, 이번 한국어판 출판 과정에서도 결정이 느려서 작가 확인 절차 등의 문제로 출간예정을 발표한 후 실제 출간되기까지 2년여가 더 걸렸다. 다행히도 그런 기다림에 걸맞게 제작 품질은 높은 편이며, 자랑스럽게 책장에 꽂아두고 취향을 드러내기에 적합하다.
생각해보면 과학을 그런 경이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었을 법하다. 과학을 입시 도구로 전락시키는 학교 교육이나 이공계 홀대로 상처받고 찌들어버리지 않고, 소년소녀 시절 처음 “아 이렇게 신기한 일이, 마법이 아니구나”라고 처음 느꼈던 마음을 간직할 때 남는 무언가다. 그 마법을 과학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파악하고 스스로 만들어내고 싶었던 그 호기심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한 사람들과 소소하게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과학적 엄밀성이 아닌 과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SF만화의 명작이다.
스피릿 오브 원더 Spirit of Wonder 츠루타 겐지 지음, 오주원 옮김/세미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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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미디어 씹어먹기’. 앞서 썼던 프레시안 서평과 대체로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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