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즈카 오사무 전시회의 한정발매 특별도록(원래는 단행본 예정이었으나 출판사 섭외 실패;;)에 수록되었던 글(관련 소개: 클릭). 보다시피, 테즈카 만화가 일본만화 장르의 여러 줄기에 미친 영향들을 여러가지 꼽아보는 시도.
다양한 줄기, 하나의 원천: 테즈카 만화가 일본만화 장르에 미친 영향
김낙호(만화연구가)
우리가 내용으로서의 ‘장르’를 이야기할 때 흔히 지칭하는 것은, 그 작품의 소재 및 전개방식이 어떤 잘 알려진 공식을 따를 때다. 우주인과 로봇이 나와서 비교적 과학적(이라고 느껴지는) 설정 속에서 모험을 하면 SF라고 여긴다. 등장인물간의 로맨스와 그 과정의 각종 감정묘사가 극을 이끄는 동력이면 한국에서는 순정만화, 일본에서는 그런 부류가 주로 노려왔던 독자층의 이름을 빌려서 소녀만화라고 부르기 쉽다. 물론 그런 식의 장르 규정은 완전히 일관되지 않기에 누군가에게 개그만화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에로만화고, 배타적이지도 않기에 순정SF호러만화가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나아가 장르는 큰 분류, 더 세밀한 분류가 얼마든지 가능하기에 소년만화 중 학원물, 그 중 격투물을 꼽을 수도 있다. 그렇듯 장르의 세계는 하나로 완전히 규정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저 매번 필요한 맥락에 따라서 큰 분류를 나눌 수밖에 없는 복잡한 잔가지들로 가득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게 발전해나간 장르코드들 중 좀 더 원형적인 것들을 찾아나서는 것은 적잖게 유용하다. 계보학적으로 유용하다든지 하는 연구 측면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것이 한 분야의 근원적 재미를 추구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모든 것의 ‘최초’가 되는 작품을 찾아야할 필요는 없다. 어떤 코드들을 확립하여 하나의 정수를 이뤄내었고, 그것이 이후에 나온 여러 다른 작품들에 흘러들어가 더욱 많이 발달하게 되었음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발견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근원성은 단순히 하나의 시대에만 갇히기보다는 시대를 넘어 계속 생명력을 유지하는데, 바로 그런 것을 담아내는 작품을 보통 ‘고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현대 일본만화 여러 주류 장르들의 그런 원형적 장르 코드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거대한 이름과 직접적 간접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이름은 바로 “만화의 신”이라는 별명으로도 익숙한 작가 테즈카 오사무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한 명의 작가가 그 폭 넓기로 널리 알려진 일본만화의 장르 세계 곳곳에 소년모험물, 소녀만화에서 에로와 스릴러까지 자신의 흔적을 뚜렷하게 남길 수 있는가. ‘테즈카월드’(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세계에 대한 애칭)의 다양한 가지, 그리고 뚜렷한 심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남긴 장르적 영향을 봄에 있어서, 다양한 시각적 연출 혁신, 만화제작론의 혁신 같은 것은 별도로 긴 챕터가 필요한 부분이므로 여기서는 대체로 생략하고, 소재요소와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 등 서사적 부분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영향을 받다
완전히 무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딱히 바람직하지도 않다. 바퀴부터 매번 새로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바퀴 위에 새로운 자동차를 얹어야 발전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듯 전후 일본만화를 재발명하다시피한 테즈카 오사무 역시 기존 여러 가지 장르들의 영향을 받아왔다. 우선 본인은 물론 많은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것은 바로 월트디즈니다. 디즈니의 장/단편애니메이션, 모험 만화책 등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테즈카의 스타일에 흡수되어 있다. [철완아톰]의 로봇 주인공 아톰이 미키마우스와 마찬가지로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같은 모습으로 돌출된 머리 윤곽선을 가지고 있다든지, 이제는 일본만화의 가장 대표적인 인식기준처럼 되어버린 커다랗고 둥근 눈의 인간 얼굴을 본격적으로 정착시켰다든지 하는 시각적 요소뿐만이 아니다. 42년작 장편애니메이션 [밤비]가 묘사한, 인간적 감정을 확장하지만 의인화되지 않은 동물들의 모습과 자연에 순응하는 생태는 이후 테즈카의 동물만화들의 기본이 되었다. 후에 [리본의 기사] 등에서 구현한 서구 동화풍 묘사 역시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의 공주물을 쉽게 연상시킨다. 칼 박스의 도널드덕 시리즈로 대표되는 디즈니계열 만화책의 스케일 큰 모험 전개 방식 역시 테즈카의 초기 모험물 작품들에서 쉽게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진지한 작품, 가벼운 작품을 가리지 않고 즐겨 활용했던 슬랩스틱 개그에서 볼 수 있듯, 미국만화/애니메이션의 영향은 디즈니에 한정되지 않는다. 물론 루니툰즈식 가학/피학보다는 디즈니 계열의 과장된 우스꽝스런 몸짓에 훨씬 가깝기는 하지만, 미국식 신문만화의 주류였던 4칸 코믹스트립들의 실없는 유머 전반과 맞닿아있다. 그리고 그런 코믹스트립들의 영향을 받아 이미 일본에 보급되어있던 [노라쿠로] 등의 시리즈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칸을 넘고 부수는 유머 역시 테즈카가 나중에 더욱 세련되고 복합적으로 발전시키기는 했으나 일정부분은 이런 코믹스트립류에서 선보이고 있던 부분이다. 또한 당시 ‘골든에이지’로 불리던 초기 전성기를 누리던 미국 주류 슈퍼히어로물 역시 영향을 준 장르다. 초인적 능력을 지녔으나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건강한 성격의 히어로, 한 에피소드 내에서 강력한 적 또는 기타 위협의 등장과 그것의 해소 등의 기본 얼개가 테즈카의 초기 대표작 [철완 아톰]에서 그대로 구현되는 것이 손쉬운 예다. 다만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만의 발전을 그 위에 붙여 올렸고 그 폭이 너무나 선명하기에 ‘만화의 신’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비단 다른 만화/애니메이션 뿐만이 아니다. 시각연출면에서 찰나간 칸연결, 클로즈업/팬아웃 등 시각적 역동성 혁신을 부추킨 대중영화 역시 모험물, SF, 판타지 등 장르로서 서사적 요소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프리츠 랑의 독일영화 ‘메트로폴리스’(의 포스터)가 테즈카의 초기 명작 SF [메트로폴리스]의 배경과 캐릭터 등에 영감을 주었다든지 하는 식이다. 하지만 특히 흥미로운 것은 헐리웃 뮤지컬인데, 이것은 직접 영향을 주는 것 이상으로 ‘다카라즈카’라는 연극 양식을 통해 전달되었다. 다카라즈카 혹은 여성국극은 일본의 전통연극과 영미식 뮤지컬 전통이 혼성된 공연예술인데, 헐리웃 뮤지컬영화들의 극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며 발전했다. 압축된 드라마틱한 통속성, 다분히 서구지향적 세계관, 화려한 배경과 노래 등이 고루 섞여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테즈카 오사무는 다카라즈카의 본고장에서 성장했고, 그런 연극적 스펙터클이 특히 초기의 소녀만화 계열 작품에 고루 베어있다.
게다가 미술로 치면 파블로 피카소처럼, 테즈카는 자신이 성공시킨 스타일 하나에 몰두하기보다 당대의 조류들을 계속 지켜보고 구현하며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고자 했다. 자신이 더 잘 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이 도전했고, 그 결과 평생 동안 지속적으로 더 많은 장르들을 개척해 나갔다. 이렇듯 장르의 대가란 장르적 영향을 만들 뿐만 아니라, 장르적 영향을 많이 받아 잘 소화해내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계속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것은 당대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골방 속의 고독한 예술가를 자처하기보다는 평생 현역으로 일선에 있고자 한 작가의 모습이다.
장르적 영향의 성립
장르의 성립, 혹은 장르적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그냥 예술적 혁신을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일정한 소재와 전개 규칙이 작가군 및 독자들에게 어떤 일반적 패턴이라고 각인되어야 하기 때문에, 혼자만의 독특한 사례는 무의미하다. 즉 자신의 후속작들 또는 다른 작가들이 그런 요소들을 계승하여 더욱 넓혀야 하며, 가급적이면 최소한 일정한 취향의 독자 집단에게 대중적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슷한 패턴을 담아낸 작품군이 인지될 때 비로소 장르로서 성립하며, 나아가 장르가 죽어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영위되려면 늘 당대의 현재적 요소들을 흡수해야 한다. 단순히 최초로 무언가를 도입한 작품이 장르를 개척한 것이 된다기보다, 상당한 호응을 통해서 그런 방식의 소재와 전개를 나름대로 보편화시키는 촉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조건들을 놓고 볼 때, 다양한 소재와 전개방식에 도전하고, 늘 현재적이려고 노력하며, 수많은 히트작을 양산한 테즈카 오사무만큼 큰 장르적 영향을 행사할 위치에 있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
다양한 소재와 전개방식에 대한 도전은, 만화라는 형식의 모든 것에 애정을 폭발시킨 테즈카의 집착에 기인한다. 전쟁이 끝난 후의 폐허 위에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꿈이 필요했던 시절에는 도피성 판타지로서의 모험물과 SF를 구사하고, 그 안에서 더 저연령층에게 적합한 동물 이야기, 소년들의 관심을 끌 기계문명과 슈퍼히어로, 소녀들의 관심을 끌 동화적 서구와 로맨스 등을 끌어왔다. [신보물섬], [철완 아톰], [리본의 기사], [정글대제] 등이 이 시기의 주요 히트작이자 각각 장르의 기틀이 되어주었다. 그런 접근의 큰 성공이 다양하게 장르화되어 주류가 되자 낙천적 유머와 공상보다 더 진지하고 어두운 이야기를 하겠다는 ‘극화 운동’이 일본 만화계에서 생겨났는데, 그것이 다루어낸 또다른 다양한 소재 부류와 전개법을 다시금 테즈카는 흡수하고자 실험하여 좀 더 험한 분위기의 사극과 인간드라마 등에 도전했다. [도로로], [불새 – 여명편] 같은 작품들이 이런 접근의 산물이며, 이후 여러 방식으로 다른 작품들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야심차게 만든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여러 내부적 문제로 무너져가며(물론 무리한 비용 및 제작 시스템을 세워놓고는 자신의 초인적 만화 노동력으로 버티려고 한 본인의 문제가 가장 컸다) 자신 또한 창작의 슬럼프로 어두운 시절을 겪고는, 그런 요소들마저 결국 자신의 만화에 반영하여 또 한번의 혁신을 이뤄내는 것에 성공했다. 인간 본성의 악에 대한 탐구, 그 반대로 선에 대한 탐구, 성, 폭력, 인간사회의 여러 모순 등 보다 철학적인 주제와 성인 취향의 소재들로 장르적 영향을 확대했다. 그렇게 70년대 초중반에 완성된 ‘다크 테즈카’ 작품들은 고도성장과 사회적 혼란기의 복합적 분위기 속에서 다시금 시대와 긴밀하게 호흡했다. [블랙잭], [MW], [아야코], [붓다] 같은 작품들이 이런 시기의 대표적 명작들이다. 각각의 시대 상황, 장르적 흐름, 자신을 둘러싼 정황들을 새로운 만화로 풀어나갔고, 탁월한 만화 실력과 결합하여 히트를 기록하며 장르적 영향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워낙 작가로서 인기를 많이 끌었기에, 형식으로서의 장르 측면에서도 소설, 그림책, 4칸만화, 1칸 카툰 등 다양한 종류를 남겼다.
비슷한 소재와 전개에 대해 다른 작가들도 영향을 받고 도전하게 만든 기반 중 하나에는 일종의 작가 합숙소격인 토키와장의 역할도 있다. 성공을 꿈꾸는 작가들이 비교적 저렴한 공간에서 함께 살며 자기 작품에 몰두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효과가 있다. [사이보그009], [가면라이더] 등으로 SF전대물 장르를 개척한 이시노모리 쇼타로, [도라에몽]로 발명품 명랑만화를 완성시킨 후지코F후지오 팀이 토키와장을 거쳤으며, 심지어 훗날 안티-테즈카를 표방한 극화운동에 가담하여 현실과 몽상의 경계를 흐리는 예술지향 독립만화의 기둥 중 한 명이 된 츠게 요시하루마저 토키와장을 거쳤다 토키와장 사람들과 적잖은 교류가 있었다(주: 츠게 요시하루가 토키와장에서 살았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로 밝혀졌기에 수정합니다 / 제보: 대산초어님). 각각의 작가들은 테즈카가 펼친 내용들을 흡수하고 계승하거나 반박함으로써 장르를 발전시키며, 자신의 혁혁한 성과를 더하여 각자 자기 세부 장르의 개척자이자 대가로 자리매김했다.
테즈카가 남긴 다양한 작품들을 장르로 분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 대상층별로 저연령향, 소년향, 소녀향, 성인향으로 나눌 수 있고(일본어 위키백과가 이런 분류로 전체 서지사항을 나누고 있다), 시대별, 소재별로도 나눌 수 있다. 어차피 이번 글의 목적은 서지사항 총정리가 아니라 다양한 장르적 영향을 보는 것인 만큼, 하나의 통일된 기준으로 철저하게 분류하기보다는 느슨하게 결합시켜 영향력의 요소들을 서술하고자 한다.
소년모험만화의 문법, 소녀만화의 기반
테즈카 오사무의 첫 주류 히트작은 [신보물섬]으로, 1947년 2차대전 직후의 폐허 속에 출간되었다. 그간 만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코믹스트립식 짧은 개그연작을(물론 [마짱의 일기장]등 테즈카 본인도 그런 장르를 먼저 그리고 있었다) 벗어나 단행본 한 권 분량의 장편을 그려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큰 히트를 쳤는데, 비록 판매통계가 미비하고 출판사와 인세가 아닌 매절계약을 하는 바람에 추정치가 4만부~80만부까지 다양하지만, 만화라는 매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바꾸기 시작할 만큼 큰 사건이었다. 덕분에 대형 주류 출판사들도 만화라는 그간 짧은 유머에만 특화되었다고 여겨진 형식에 대해 본격적으로 진출을 시작하게 되었고, 특히 슈에이샤의 ‘오모시로북’, 아키타 쇼텐의 ‘모험왕’등 만화중심 아동잡지들의 출발을 앞당겼다.
[신보물섬]은 장편 스토리만화라는 형식 속에 담긴 모험물의 장르규칙을 세우고 있다. 보물지도를 찾아 소년들이 모험을 한다는 얼개는 제목에서 풍겨나오듯 기존 대중 모험소설들의 얼개를 따르고 있는데, 여기에 당대 소년들이 관심 있어할 만화적 소재들을 가득 결합시켰다. 과거의 숨겨진 비밀, 혈연 없는 어른 조력자, 동물 조수, 기이한 해적선장, 밀림의 왕자 등이다. 보물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각종 기상천외한 세계를 거치게 되고 특이한 사람들과 조우하는 전개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각각이 하나의 에피소드로 완성되는 신밧드의 모험이나 오디세이의 방식이 아니라 물 흐르듯 더욱 크고 신기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도전적이고 용감한 소년이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이세계를 탐험하게 되는 모험물 양식으로, 캐릭터 배분, 내용전개에 따라서 지속적 재미 확대, 직접적 설교를 배제하고 작품 내적으로 결론을 맞이하는 방식 등이 향후 단행본 분량 모험만화의 기본 전개법이 되었다. 이것은 완급조절의 문법을 새로 세운 79년작 ‘레이더스’가 현대 헐리웃 오락영화에 미친 영향에 비견할 만하다.
전개법의 성립 외에도 당시 일군의 창작지망생들에게 만화에 새로 눈을 뜨게 만들었는데, 그 중에는 결국 토키와장에 들어가게된 후지코 후지오나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물론, 공포만화의 대가로 성장하게 되는 우메즈 카즈오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세계 모험물을 좀 더 발전시켜 아예 다른 세계의 이야기로 뻗어나간 것이 [메트로폴리스]를 위시한 초기 SF명작들이다. [신보물섬]의 성공 이래로 ‘아카혼’이라고 불리우는 오사카 지역 중심으로 제작된 만화 단행본이 넘쳐나게 되자, 주류 출판사들이 아예 좀 더 제대로 된 책을 내보자는 의욕으로 시작된 부류의 작품들이었다. 이런 SF물들 역시 당대에 구해볼 수 있던 SF영화와 소설 등의 요소들을 적극 흡수하되, 테즈카식 발전을 이뤄냈다. 계급갈등을 비유적으로 그려냈던 프리츠 랑의 동명영화와 달리(실제로 당시 테즈카는 이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 다만 포스터 스틸사진들을 보고 영감을 받았을 뿐), 로봇들이 노예인 세상에서 인간에 가까운 로봇 소년/소녀 미치와 인간소년 켄이치의 우정/로맨스를 그려낸다. 그리고 이 작품의 큰 성공을 통해 또다시 여러 성공적 소재와 전개규칙을 만들어낸 셈이 되었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 사이의 진심을 통한 소통, 특히 그것을 이뤄내는 것이 바로 젊은 주인공이라는 것이 그 중 하나다. 그리고 함께 모험을 펼치며 세상의 편견(혹은 독자의 편견)을 무너트린다.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되 차별이 있는 유사 신분제 사회, 그것을 깨는 중간적 존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로봇이기에 초월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메인캐릭터 등의 설정은 이후 가장 유명한 히트 중 하나가 된 [철완 아톰]으로 계승되며 완전히 정착한다.
[철완아톰](52년 연재 시작)은 워낙 일본의 전후 세대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문화현상으로 평가되고 있는 거대한 작품인데(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은 물론, 과학에 대한 관심과 로봇공학까지), 장르물로서 특히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아톰은 일본식으로 재발전시킨 슈퍼히어로만화이며, SF펄프픽션이다. 아톰이 초인적 능력으로 초인적 강적들과 싸우는 것은 미국 슈퍼히어로물에 대응될만한 방식이다. 하지만 아톰은 근육과 초능력이 아니라 과학력으로 움직이며, 더 우월한 과학력으로 강해지기도, 전지가 떨어져 쓰러지기도 한다. 작고 평범한 동양 소년의 체구지만 건강한 정신으로 친구들과 인간세상의 평화를 위해 싸움에 나선다. 그리고 자신이 강력한 병기임에도 불구하고 가급적이면 싸우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SF소설로서의 가치는 로봇의 사회적 신분, 과학발달의 명암, 특히 인간과 가까워진 로봇들에게 생기는 정체성 문제와 권력 문제 등의 단서들이 빼곡이 채워져 있는 지점이다. 게다가 과학을 평화적인 목적으로만 써야한다는 메시지는 일종의 사회참여적 발언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종종 노골적이다.
전개방식에서 [철완아톰]은 향후 소년만화의 또다른 주류로 급부상하게될 ‘대결과 성장’에 대해서도 큰 기여를 했다. 특히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에피소드 중 하나인 ‘지상최강의 로봇’편을 보면 그 장르의 거의 모든 것이 불과 수십 페이지 안에 압축되어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베일에 휩싸인 강적, 각각 특수한 능력을 지녔으나 스러지는 아군의 고수들, 주인공과 악역의 대결과 주인공의 패배, 악역과 주인공측 캐릭터의 우정, 업그레이드한 주인공의 재대결과 승리, 싸움의 승리가 단순한 쾌감이 아닌 어떤 아련함으로 귀결되는 결말 등이 이후 수십년 동안 수도 없이 후배 작가들에 의해 채용되었다.
이렇듯 테즈카 오사무는 초기 작품들을 통해서 소년향 만화의 모험물 전개, 캐릭터 구도, 세계관의 메시지, 히어로 대결 방식까지 수많은 기본 문법을 시도하고 또 성공시켜서 주류화시켰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건 중심의 화려한 모험 자체보다 관계발전과 내적 성장을 중시하는 소녀향 만화 역시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쪽 역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신기한 메루모], [유니코] 등 여러 히트작이 있지만, 그 중 테즈카 소녀만화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큰 성공을 거둔 것은 53년 연재를 시작한 [리본의 기사]다(한국에서는 애니메이션판이 ‘사파이어 왕자’로 방영되어 마찬가지로 큰 인기를 누렸다). 이 작품은 공주로 태어났으나 남장을 하고 왕자라고 속이며 살아가야 하는 주인공을 다루고 있다. 여성으로만 이뤄진 뮤지컬 연극 형식인 다카라즈카의 영향을 받아 양성적 매력을 지닌 주인공을 내세우며, 왕국의 안녕을 둘러싼 여러 모험도 있지만 주인공의 내적 갈등, 로맨스 등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측면으로 다뤄진다. 서구 동화풍의 유사 중세-근대 세계관, 화려한 심리 표현 연출 등이 결합하며 정서적/내적 에너지에 의해 추진력을 얻는 이야기로서 큰 호응을 얻었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는 감성 진행 위주의 흐름, 그 안에서도 굵은 이야기를 해내는 재미 등은 향후 소녀만화의 기본얼개가 되었다. 일본 소녀만화가 오로지 테즈카 오사무에 의하여 발명되었다면 과장이겠지만, 탐미적 근대 대중낭만문학 이상으로 직접적으로 소재선정과 표현방식에서 소녀만화의 근간을 만들어낸 것이 테즈카라고 주장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듯 하다.
소년 소녀 독자를 크게 가리지 않고 한층 저연령층을 공략하는 작품으로는 동물드라마가 있다. 테즈카 동물드라마들은 ‘시튼동물기’와 ‘밤비’의 준리얼리즘 전통과 의인화된 ‘퍼니애니멀’ 카툰 장르 가운데 어딘가에 놓을 수 있는데, 여기에 작가 특유의 인간애를 동물에 적용하는 방식을 취하곤 한다. 이 계열의 대표작은 50년 시작한 [정글대제]인데, 흰 사자 레오의 인생역정이 아프리카 밀림에서 인간사회로 재적응하고 돌아가는 과정에서 타잔을 연상시키면서도, 부모와의 사별이나 사자로 성장하여 겪는 권력 갈등 등에서 문학적 깊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인간사회와는 완전히 구별되게 동물로서 존재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로서 이입할 수 있을 정도의 인간적 내면을 부여한다.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되 인간사회에서 전개되는 모험만화의 기본틀로서 오늘날 독자들에게는 지극히 익숙한 방식이 되어있다.
초기 테즈카 성공의 바탕에는 물론 강력한 연출과 그림실력이 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규칙으로 굳어 장르요소가 되었다. 과장된 커다란 눈을 지닌 인간 캐릭터는 최소한 미국 만화영화 ‘베티 붑’ 시절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그런 캐릭터들을 희화화된 기호가 아니라 내면을 갖춘 주인공들로 소화하여 진지한 극 전개를 만든 것은 큰 수확이었으며 이런 식의 캐릭터 디자인은 이후 일본만화의 대표적 특징처럼 정착했다. 큰 눈 뿐만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캐릭터의 성격 속성들을 거의 기호에 가까울 정도로 효과적으로 단순화 압축하여 시작적으로 디자인에 표현하는 것에 능했는데, 덜렁거리는 캐릭터의 삐침머리, 리본이나 모자 등의 액세서리 등 그 폭도 다양했다. 이것은 캐릭터 속성을 구성요소 단위로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강력하게 열광하는 오늘날 ‘모에’라고 부르는 팬덤문화에서 추구하는 바의 원형이기도 하다. 게다가 건강 활달한 성격, 겉으로 새침하며 뒤로는 챙기는 식의 모습 등 성격의 전개방식 설정 역시 현재의 모에 문화와 그리 거리가 멀지 않다.
캐릭터 설정이라는 측면에서 초기 테즈카가 세워놓은 또다른 중요한 장르적 영향은 바로 스타 시스템이다. 테즈카는 시각적으로 과장된 각종 체형과 기타 생김새 속에 주요 성격 형질을 부여했는데, 사려 깊은 지식인으로서의 오차노미즈 박사, 갈등하는 야망의 소유자로서의 로크, 집요한 형사로서의 히게오야지, 광기의 천재 덴마 박사 등 다양한 유형들이 있다. 이들은 서로 맞물리며 원형적 갈등구조와 서사전개를 기본적으로 확보하는 것에 유용하다. 그들의 성격과 판단방식은 외양으로 기호화되어 표현되기에 매번 그 정도 완성도로 새로 디자인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작품활동 자체를 워낙 많이 하다보니, 결국 같은 외관의 캐릭터를 여러 작품에 걸쳐 다른 인물로 설정하여 재등장시키는 ‘스타시스템’(마치 같은 스타배우를 여러 작품에 출연시키는 방식)을 활용했다. 이런 장르규칙은 일본의 다작 스타작가들은 물론, 80년대까지 한국에서도 이현세의 ‘오혜성’, 허영만의 ‘이강토’등의 사례에서 보듯 흔히 활용되었다.
“극화” 코드의 수용과 재해석
살펴보았듯이 테즈카는 50년대에 이미 여러 히트작들을 통해 소년향, 소녀향 양측으로 여러 기본적 장르틀들을 만들어냈다. 얄궂게도 이런 성공 이상으로 더욱 많은 일을 벌여서 60년대 후반에는 히트작이 줄어드는 장기 슬럼프를 겪게 되었다. 문제 중 하나는 60년대초부터 운영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무시프로덕션이었는데, 방송국으로부터 저가에 제작을 수주받고 살인적인 제작스케쥴을 짠 것이 문제였다. 제작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빠듯한 시간에 더 많은 만화작품으로 만들려다가 결국 소진되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슬럼프가 오히려 더욱 다양한 장르코드의 확대로 이어졌다. 커다란 장기 히트작이 줄어들고 그 대신 이것저것을 새로 시도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장르코드 확대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바로 극화운동이다. 극화운동은 원래 59년에 사이토 다카오, 시라토 산페이, 타츠미 요시히로 등이 ‘극화공방’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선언문을 만든 것에서 시작했다. 테즈카의 히트작들과 그것을 모델로 한 수많은 다른 만화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낙천적 현실도피 모험 소재들을 벗어나, 한층 성인 지향적이며 현실세계의 어두운 정서와 사연들을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그림과 연출 역시 둥근 선과 귀여운 캐릭터로 역동적 명랑함의 활극을 이뤄내는 방식에서 벗어나, 거칠고 날카로운 선과 비정하고 차가운 관찰을 시도했다. 테즈카의 만화들이 오사카 중심의 아카혼 양식을 벗어나 도쿄의 대형출판사들과 잡지로 옮겨 주류화된 빈 자리에, 이들 극화는 다시 대본소 중심의 아카혼에 진출했다. 강력한 표현 때문에 아직 주류 출판사들이 진출하기에는 장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안티 테즈카’ 움직임은 일본만화의 다양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것을 역으로 테즈카 본인이 60년대 후반의 슬럼프기에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꼭 극화운동의 일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간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뻗어간 테즈카답지 않은 작가들은 모두 학습의 대상이었다. 츠게 요시하루의 표현주의적 환상, 시라토 산페이의 비정한 살생이 넘치는 사극 정서, 미즈키 시게루의 캐릭터가 아닌 풍경 위주의 기담, 타츠미 요시히로의 기막힌 인간사의 어두운 아이러니 표현 등이 포함되었다. 이후 작품에서 주인공이 몽롱한 상태에 있을 때는 츠게의 만화에서나 볼 법했던 기이한 악몽의 부조리가 등장하고, 격투 장면에서는 시라토에게 흡수한 박진감 넘치는 유혈이나 계급갈등의 한이 담기고, 풍경을 그림에 있어서 미즈키 만화처럼 캐릭터의 줄거리 전개를 위한 배경이 아니라 작품 속 세계의 전체적 인상을 위한 장치로 한층 적극적으로 동원되었다. 이런 전환기 작품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도로로]다. 한쪽 눈이 없고 가짜 팔 속에 무기를 숨긴 저주받은 무사가 복수를 원하는 소녀와 함께 여행을 하며 요괴와 적대하는 무사 등과 맞서며 여행을 하는 시대극으로, 당시에는 큰 히트를 치지 못하고 그다지 고르지 못한 품질 속에 조기 중단된 작품이다(다만, 이 설명만 보더라도 뚜렷하게 여기에서 영감을 받았을 법한 [베르세르크], [무한의 주인] 등 현대 일본만화의 히트작들이 여럿 떠오르실 독자분들이 많을 것이다). 도로로의 격투장면은 그간 좀처럼 보지 못한 세부적 유혈낭자가 적지 않게 등장하며, 남장소녀 도로로의 사연은 [리본의 기사]보다 훨씬 신분제의 한이 강력하게 박혀있다. 그리고 도로로가 여행하는 강산의 요괴가 스며든 풍경은 미즈키 시게루의 세계묘사에 한층 가깝다.
테즈카는 극화에 맞서면서도 동시에 극화를 흡수해나갔고, 결국 독특한 새로운 코드로 승화시켜 나갔다. 맞서면서 흡수하는 갈등의 정점은 극화의 본산이었던 잡지 ‘가로’에 대응하여 ‘COM’을 창간한 것이었는데, 상업성보다는 작가주의를 고집하여 한층 성숙한 성인 남성/여성향 만화의 장르코드들을 선보이게 된 ’가로‘의 성공에 자극받아 자신만의 대응을 한 것이었다. 특히 시라토 산페이의 히트 닌자사극 [카무이전]을 넘어설 장대한 사극을 시도하려다가, 자신의 필생의 역작으로 구상하고 짧게 원형을 선보인 바 있던 ’불새‘ 연작의 본격적 장편 데뷔인 [불새 – 여명편]을 창간과 함께 게재했다. 이런 일련의 작품들에서, 테즈카는 자신의 둥그런 그림체 캐릭터들을 최대한 고수하면서도 그 안에 한층 어두운 내용이나 세계묘사를 구현하는 방식을 취했다. 동시에 현실의 잔학한 일면들을 다루되 그것의 선정적 쇼크효과로 이목을 끌기보다는 보다 큰 전체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지나가는 소재로 쓰는 식으로 수위를 조절했다. 특히 후자에 있어서, 점차 불교적 순환론과 인생의 거시적 아이러니 같은 내용들이 보다 본격적으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갈수록 더 강렬한 묘사를 강조하게된 극화운동의 시도들이 이후 일본 성인만화 가운데 스릴러 등의 장르로 흡수되었다면, 소년만화적인 캐릭터성의 재미를 버리지 않고도 한층 비정함을 흡수할 수 있음을 보여준 테즈카의 방식은 주류 소년만화를 위시한 폭넓은 장편 서사물 일반에서 수용되었다.
성인전용취향: 전문소재 만화, 스릴러, 에로
무시프로덕션이 몰락한 후 절치부심하여 결국 테즈카는 창작자로서 화려한 재기에 성공했는데, 73년의 [블랙잭]이 확실한 쐐기를 박은 것으로 꼽히곤 한다. 이 작품은 현재는 일본만화의 독특한 장르로 크게 번성한 전문소재 극만화의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현실에 있는 어떤 전문 분야를 중심으로, 그것에 매우 능한 주인공과 최대한 세부적 디테일 묘사를 작품의 강점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그 분야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서 인간사 일반에 대한 교훈을 슬그머니 밀어 넣는다. [블랙잭]은 큰 돈을 받고 엄청나게 어려운 수술을 해내는 무면허의사가 주인공인데, 그가 다루는 의료사건들을 통해 사람들의 헛된 욕망, 순수한 희망, 배신과 믿음, 인간 의지의 한계와 가능성 등을 이야기하는 걸작이다. 이 작품에는 작가 자신의 의학 경력이 반영되어 당대로서는 획기적일 정도의 세부 디테일을 줄거리로도 그림으로도 표현해 넣었다. 전문적 사건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진행하며 주연 캐릭터들의 단면들을 조금씩 풀어내는 연재 전개 방식 역시 이제는 많은 전문소재만화에서 당연한 장르코드가 되어 있다.
본격적으로 성인물 창작을 늘리면서 시도한 것 중 하나는 스릴러다. 사회와 인간 내면의 악을 다루는 히트작 [MW(무우)]가 만들어낸 천재적 절대악 캐릭터와 그를 쫒는 평범하게 선량한 인간의 구도는 이후 여러 스릴러물에 영감을 주었고, 가깝게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의 원형이 되어주기도 했다. 이 작품에는 당대의 금기 소재라는 고려는 아예 무시하기로 작정하고 수간, 정부음모, 동성애, 각종 살인들이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점은 개별 소재의 충격성보다는 그런 것들이 엮여서 만들어내는 인간사의 아이러니,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본성에 대한 질문들이 줄거리의 초점이 되어있다. [키리히토 찬가] 역시 금단의 약물, 동물적 신체 변형, 성과 폭력 등을 가득 담아내는데, 스릴러로서의 쾌감에 의지하기보다 결국 인간드라마로 귀결된다. 성인전용 취향이라면, 에로를 빼놓을 수 없다. [아야코]는 고립된 폐쇄공동체로서의 일본 촌락사회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 관행과 파국적 사건들을 통해서 인간성에 대한 회의, 그리고 나름대로의 희망을 보여준다. 비단 온전한 성인물이 아니라도, 성을 소재로 하되 특유의 시공을 가로지르는 세계관을 결합시킨 [아폴로의 노래] 같은 작품을 통해 인간 속 어두운 측면을 이야기한 바 있다.
대하 인간드라마
소년/소녀향 만화를 일찌감치 정립하고 여러 코드의 섭력 끝에 성인취향 장르들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후, 테즈카가 많은 에너지를 쏟아낸 것은 대하 인간드라마다. 앞서 계속 살펴보았듯, 테즈카가 도전한 여러 장르들에서 일관적으로 흐르는 모습은 바로 소재는 줄거리를 위한 것이고, 줄거리는 전개를 위한 전개가 아닌 인간성에 대한 메시지라는 점이다. 인간성에 대한 질문이 바로 그가 뻗어나간 모든 장르적 재미들의 단 하나의 원천이다. 그의 SF/판타지들은 단순히 멋진 날아다니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로봇이든 동물이든 요괴든 비인간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존재들을 통해 인간됨에 대하여 질문한다. 엄청난 잡식성 장르코드 흡수력과 창작분량 속에서도 테즈카가 거의 유일하게 열혈 스포츠 대결 코드만큼은 적극적으로 흡수하지 않은 것 역시, 이야기 전개를 위해 승부를 넣는 것은 당연하지만 승부 자체가 모든 이야기가 되는 전개방식과 궁합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면 앞뒤가 맞다. 여기에 슬럼프기 이래로 점점 더 몰두하게된 순환적 세계관, 성인전용취향 작품에서 한껏 본격화한 인생사의 아이러니 등이 결합할 때, 테즈카 특유의 인간애 주제가 가장 잘 구현될 수 있다. 바로 그런 것을 담아낸 것이 [붓다], [아돌프에게 고함], [불새 연작] 등 그의 대하 인간 드라마들이다.
[붓다]는 부처의 생애를 기본으로 하되, 그 주변에서 살아가고 운명이 엇갈리고 죽어간 여러 선악이 교차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불도의 가르침을 융화시키고 있다. [아돌프에게 고함]에서는 전쟁과 폭력의 순환을 2차대전 독일에서 팔레스타인까지 가져간다. 그리고 모든 주제의식이 응축되어 있으나 미완의 유작으로 남아버린, 영생을 주는 불새전설을 놓고 고대부터 먼 미래까지 환생과 반복의 여러 이야기들이 엮이는 [불새 연작]이 있다. 이 작품들의 장르적 기여라면, 일본에서 만화가 하위대중문화 뿐만이 아닌 진지한 문화예술분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공헌했다는 점이다. 만화가 서점에서 인문코너에 꼽혔다든지, 오랜 전통과 보수적 권위의 시사문예잡지에 진지한 만화를 연재했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다. 즉 대중하위문화나 전위예술이 아니고도 만화가 진지한 문화적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선례를 남겨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르코드로서 이후 세대 다른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정도로 스케일 크고 진지한 인본적 통찰을 가득 채운 (그리고 소재 자체에 함몰되지 않는) 대하드라마가 이후 일본만화에서 등장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주류만화시스템의 노쇄화와 대안만화계의 장기화된 위축상황을 놓고 볼 때, 예측가능한 근미래에 등장할 가능성도 높아 보이지 않는다. 늘 더 많은 이들이 테즈카의 성공요인들을 어떤 식으로든 따라해 보고 그 중 더욱 세분화하며 진화한 이들이 있었기에 장르적 영향이 성립된 것인데, 이것만큼은 아직 도저히 뭐 어떻게 해결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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