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질에 관한 만화들 [학교도서관저널 1207-08합본호]

!@#… 학생들과 선생들이 독자인 도서전문지에 주먹질 이야기를 하는 건 용기인가 악취미인가(…)

 

주먹질에 관한 만화들

김낙호(만화연구가)

주먹질이라는 폭력적 충돌 행위는,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요소라면 재미를 준다. 무엇보다 힘의 우열을 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인데, 승부를 통해 재미를 주는 방식의 대중서사에서 무척 애용되는 소재다. 그리고 그런 접근에서도 상당히 우수한 재미를 주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왕 주먹질이라는 자극적 재미가 있는 소재의 작품을 감상하겠다면, 승부 판가름의 흥미진진함은 물론이지만 그 너머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을 살펴보는 것도 더욱 깊숙한 즐거움을 줄 것이다.

주먹의 드라마성

주먹질이라는 원초적 행위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실력의 범주로 가다듬어지는 과정이라면 쓸만한 감동을 주는 성장담이 되어준다. 반항아들이 자신의 재능을 무의미한 폭력에나 낭비하다가, 좋은 스승을 만나서 그 재능을 스포츠에 발현하여 스포츠 강자가 되어간다는 패턴이 대표적이다. 만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권투만화 중 하나인 고전 [내일의 죠](치바 데츠야, 카지와라 잇키)가 이 방식의 완성형에 가까운데, 재능을 길거리 주먹질로 밖에 풀어내지 못하는 부족한 사회현실을 건드리면서도 개인들의 노력을 통해 성장해 나아가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기에 기본적으로 큰 재미를 준다. 다만 오늘날에 와서는 워낙 많이 반복된 장르코드이기에, 웬만큼 탁월하게 소화해내지 못하면 동어반복의 지겨움을 준다는 것이 단점일 따름이다.

이런 패턴을 탁월하게 소화하는 작품 중 하나는 바로 [일곱개의 숟가락](김수정)이다. 이 작품은 주먹질 재능이 권투로 승화되어가는 과정과, 한국 7-80년대의 불우가족 분투기 신파극의 코드를 유기적으로 섞어 넣는다. 주인공 일룡의 가족은 형제자매가 여럿인데, 부모가 불행한 사고로 세상을 뜬 후 남은 재산을 할아버지가 영화에 대한 꿈을 추구하다가 사기로 날려버리고 대가족이 가난한 달동네 삶을 살고 있다. 한 때 모범생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어진 후 반항적이 된 일룡이 자신의 주먹질 재능을 권투에 쏟게 되고, 권투 선수로 성장해 나아가는 과정이 줄거리의 중심축을 이루며 가족의 소중함과 화해의 과정이 함께 엮여나간다. 일룡의 주먹은 사회의 하층계급 삶에 대한 울분, 가족의 무게에 대한 부담감, 자신의 성장통 고민들을 함께 담아 링 위에서 상대에게 작렬한다. 하나 하나 상대를 이겨 나가고 랭킹이 올라가서 결국 스타 선수의 길을 한 발짝씩 올라가는 주인공의 여정은, 단순히 주먹질의 기술 승부만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강력한 드라마성을 담아낸다.

주먹질의 권력

전쟁 등의 상황에서 그간 인류문명이 발달시킨 칼이나 기타 살상 무기로 상대의 생명을 손쉽게 끊어버리는 것과 다르다. 때리는 사람도 적잖이 힘이 드는 이 폭력 방식은, 상대를 소멸시키기보다 굴복시키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대등한 조건에서든 불평등한 환경에서든(예: 집단구타) 폭력이라는 힘의 우열을 확인시킨 후, 그것이 만들어낸 관계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것은 복싱 같은 스포츠에서의 랭킹일 수도 있고, 흔히 ‘일진’이라는 턱없이 미화된 호칭으로 물타기되곤 하는 학교 조직폭력배들의 권력서열 확인일 수도 있다. 낭만적 경우라면 주먹을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의 대등함을 깨닫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대부분의 우울한 경우라면 강요된 복종의 구도가 만들어진다. 후자의 경우는 더 강력한 적극적 권력 배분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한, 민주적 사회운영 규율이 미비한 사회 현장이라면 어디서나 고개를 든다.

[홀리랜드](모리 코우지)는 카미시로 유우라는 심약한 소년이 길거리 주먹질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해 나아가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성장하는 격투주인공의 모험물이 떠오르지만, 이 작품은 조금 다른 요소들을 접목한다. 바로 싸움 과정의 디테일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해설, 그리고 점점 강력해지는 폭력에 대해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겪는 심경이다. 심약하고 주변에서 괴롭힘 당하던 소년이 방에서 나오지 않고 틀어박혀 정권 찌르기를 집요하게 연습한 후, 길거리에서 불량배들을 공격하는 익명의 ‘불량배 사냥꾼’으로 나서 명성을 쌓으면서 점차 여타 강한 싸움꾼들이 꼬여든다. 더 강해지는 주먹질만큼 그들만의 작은 사회 속 자신의 위치도 올라가지만(밤 골목 길거리 싸움의 현장이 바로 그 부류의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기존 사회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신성한 땅’으로 치부된다), 폭력만으로 해결해야 하는 관계가 점점 늘어나고 폭력의 구도에 뛰어들지 않은 소중한 주변인들에 대한 위협 역시 커진다. 주먹질은 그 작은 사회에서는 우정도 권력서열도 만들어내며 소속감을 찾게 해주는 동시에, 더욱 사회 일반의 룰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묵직한 고민이 통하면서도 오락적 재미를 줄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에서는 격투가 판타지적 상상력의 과장된 필살기 다툼이 아니라 현실 속 싸움 상황의 물리법칙과 격투기술을 집요하게 적용하는 덕분이다.

사회에서의 권력과 주먹질 세계의 권력 사이 괴리를 한층 쌉싸름하게 공략하는 작품으로 [비트](허영만, 박하)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민’은 잘 생기고 주먹질에 대단한 재능이 있는, 하지만 사회적 위치는 너무 밑바닥도 혹은 대단한 상류층도 아닌 애매한 청년이다. 부모와 선생에게 복종하는 고분고분한 성격도, 그렇다고 반항심으로 뭉친 것도 아니다. 그저 다소 무심한 측면이 있고, 살아지는 대로 살아간다. 그를 둘러싸고 조직폭력단에서 출세길을 걷는 친구, 어떻게든 장사를 하고 잘 살아보려는 다른 친구, 모범생의 허울을 썼으나 구김이 많은 좋아하는 여성 등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엮인다. 민의 강력한 주먹은 조직폭력단의 스카웃을 당하지만, 장사하려는 친구의 그저 어설픈 주먹은 철거에 저항하려는 과정에서 감당 못할 배상금으로 귀결될 따름이다. 허영과 돈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과시하는 상류층과 주먹질 능력으로 서열을 유지하는 조폭들의 세계를 주인공은 늘 함께 바라본다. 한국사회 특유의 성찰 없는 거품 성장 속에 남겨진 혼란을 통과하면서 주인공들은 현실 사회에 합류하며 점점 무디어진다. 계급을 타파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 안에서 재능을 소진할 뿐인 허무주의에 가까운 실존적 고민들이 피었다가 또 다음 상황의 주먹질 속에서 사그러든다.

주먹질의 굴레

주먹질이 규칙으로 작용하는 작은 사회에 평생 머물러 있는 경우가 완전히 없지는 않겠지만, 보통은 언젠가는 좀 더 큰 일반 사회로 나오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면서든, 조직폭력단이 해체되면서든, 기타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그 때 주먹질로 만들어냈던 과거는 종종 오히려 굴레가 된다. 잘 적응하는 것이란 운과 노력에 힘입어 주먹질이 권력과 명성을 만들어주던 과거와 단절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상 또한 납득시켜야 한다.

주먹질의 굴레, 폭력의 권력을 탐닉한 생활이 주는 상흔에 대한 적절한 작품으로 [전설의 주먹](이윤균, 이종규)을 꼽을 수 있다. 오래 전 학창시절 주먹질로 유명했던 이들을 다시금 링 위로 불러내 승부를 붙이며 전국적 구경거리로 삼는 격투스포츠 겸 예능 프로그램인 ‘전설의 주먹’을 중심으로, 한 동네 출신으로 지금은 여러 서로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주인공들의 각자의 변변치 않은 현재와 과거의 사연들이 드러난다. 주먹질의 명성은 오늘의 생활에는 방해되는 과거일 뿐이며, 그 과정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은 모두에게 무거운 죄책감으로 남아있다. 주먹질 능력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던 해방감 있는 (하지만 그 안에서도 권력서열과 분쟁들이 넘쳤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누구 하나 마음 편하게 행복한 이가 없다. 그런데 그 응어리를 푸는 것 또한, 비웃음 속에 전국적 구경거리로 펼쳐진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시금 서로에 대한 주먹질로 풀 수 밖에 없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미련하고 씁쓸한 과정 속에서 그래도 어떻게든 자신들의 생활 속 작은 희망을 되찾고자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주먹질 만화가 아닌 주먹질에 ‘관한’ 만화라면 단순한 승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생각을 자극해야 한다. 화려한 ‘필살기’들의 우열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왜 싸우는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고민을 하는 것이다. 그런 요소가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며, 혹은 단순해 보이는 작품에서도 그런 요소를 발견해 나가며 감상해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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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학교도서관저널. 특정 컨셉 아래 청소년들에게 추천하는 책들을 묶는 내용으로, 만화를 진득하게 즐기는 것의 즐거움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배합해보자는 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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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주먹질에 관한 만화들 [학교도서관저널 1207-08합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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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주먹질에 관한 만화’라고 해서 왠지 학원폭력물인 ‘짱’이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오지는 않네요 ㅎㅎ
    ‘주먹질’ 이야기를 하시니까 ‘힘의 논리’에 대해 언젠가 포스팅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 !@#… 불량푸우님/ 일부러 기대를 배반하기 위해 학원폭력물을 제외했죠(…역시 악취미 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