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논평: 일제 잔재 청산은 권위주의적 문화부터 [ㅍㅍㅅㅅ / 130815]

!@#… 지난 광복절 특집. 일련의 트윗과 한 10분동안 메신저 대화로 남긴 몇몇 파편적 단상들을 ppss의 수괴 리수령께서 온전한 글로 합쳐내는 연금술을 발휘. 게재본은 여기로. 여기는 약간 불명확한 문장도 재수정본.

 

[광복절 논평] 일제 잔재 청산은 권위주의적 문화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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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식에 대하여 by 다니엘 데닛 [TED 강연]

!@#… 우리는 우리 의식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꽤 근본적인 회의적 성찰을 제안하는 인지철학자 Dan Dennett의 강연. 철학의 사유방식과 인지과학의 시스템적 탐구를 접목시키는 접근법 자체도 좋은 영감을 준다. 한국어 번역은 컬트적 추종을 누리다가 현재 잠수중이신 intherye님. TED의 작업 절차상 필요한 리뷰만 capcold가 맡았다. 리뷰어가 없어 발간이 되지 않고 있기에 쓱싹 처리. 사람은 스스로 인지하는 것보다 더 멍청할 수 있다는 사상을 신봉하며 잡식성 논증을 좋아하기에 덥썩.

(플레이어에서 view subtitles -> Korean 선택 후 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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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온라인토론문화해부: 자기 똥글 대처 5단계

!@#…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의 진리를 담은 본격 온라인 토론문화 해부 시리즈, 대망의 제174회를 맞이했다. 이번의 토픽은 “자기 똥글에 대처하는 5단계”. 블로그가 되었든 시사토론게시판이 되었든 제도권 언론 매체까지 동원하는 경우든, 자신의 어떤 정체성을 걸고 치열하게 글로 배변을 하시는 어떤 종류의 분들을 이해하기 위한 실로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지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분들이 출몰할 때마다 당사자와 관객들에게 한번씩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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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리, 이상한 시대를 이상하다 이야기하기 [책속해설]

!@#… 막 따끈따끈하게 출간된, 경향신문의 4칸 시사만화 ‘장도리’의 2MB정권 스페셜판 단행본 “삽질공화국에 장도리를 날려라”의 책 속 해설로 들어간 글. 장도리라는 시리즈의 시대적 함의와 장점에 대한 이야기로, 책 자체의 면면에 대해서는 출판사 소개글(클릭) 참조. 여하튼 자신의 사회감각+유머감각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모든분들께 미리 암시를 걸겠다: 이 책을 읽으시오!

(* 주: 글에서 언급된 만화 게재 날짜는 온라인/오프라인 속성상 +1의 오차범위)

 

 

장도리, 이상한 시대를 이상하다 이야기하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워싱턴포스트의 회장 도널드 그래험은 “저널리즘은 역사의 초벌 원고”라는 말로 언론의 동시대적, 그리고 이후 시대를 위한 역할을 명쾌하게 요약한 바 있다. 그런데 그 초벌 원고의 매 페이지마다 모퉁이에 적어놓는, 신랄하고 솔직한 메모 한 줄이 있다. 폼을 잡으며 객관성을 가장하고 점잖음을 추구하는 본 원고와는 달리, 그 메모에는 사건에 대해서 동시대인들과 곧바로 함께 느껴볼 수 있는 여러 감정들이 담긴다. 상황의 역설성, 저열함에 대한 조소, 그냥 순수한 기쁨과 응원, 혹은 답답함. 그 모든 것들이 짧고 직설적이며 종종 기발한 비유적 표현 속에서 세상사의 기록과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연결시켜준다. 그런 엄청난 역할을 수행하는 저널리즘의 필살기, 그것이 바로 시사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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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질주는 브레이크부터 [팝툰 26호]

!@#… 사실 이 비유는 왜 capcold가 사회발전에 관한 방향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닥치고 돌파력이 아니라 바로 성찰과 시스템이라고 강조하는지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한 것이었는데, 마침 이런 타이밍이라서 이쪽 칼럼에 써먹었다.

 

전력질주는 브레이크부터

김낙호(만화연구가)

자고로, 자동차의 본분은 앞으로 힘차고 빠르게 달려 나가는 것이다. 짧은 시간에 긴 거리를 많은 것들을 싣고 이동한다는 것의 실용적인 효과는 따로 말해봤자 피곤한 일이다. 게다가 기능적인 것뿐만 아니라, 엔진의 회전에서 나오는 고속의 움직임이 주는 쾌감은 실로 아드레날린을 펌프질한다. 람보르기니와 페라리가 뭇 청년들의 로망인 이유가 따로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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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들은 지금 – 『소년탐구생활』[기획회의 070201]

그 소년들은 지금 – 『소년탐구생활』

김낙호(만화연구가)

자신이 몸담았던 과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과거 아름다웠던 자기 생활을 기억하며 재충전을 하는 쪽이든, 우울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그래도 지금은 더 나아졌다고 자기위안을 하는 쪽이든 마찬가지로 바로 ‘현재의 나’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그 때의 나, 그 때 내가 살았던 시절은 지금보다 덜 애매했다. 실제로 더 어린 나이, 특히 소년소녀 시절 정도에는 삶의 폭이 더 좁고 단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지나온 경험이기에 전지적 시점에서 반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의미들을 지금은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이 지금의 나로 이어진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소년 시절의 경험담을 담아내는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작품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그 시대의 감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유사한 경험을 같이 투사해가며 과거의 자기 모습을 탐구하고,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도를 걸어가는 회상체의 작품이라면 무릇 ‘생활’에 대한 ‘탐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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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과 소인배의 차이

!@#… 경향신문, 2007년 현재의 그대들은 정녕 대인.

[사설] 역사적 과오의 규명과 참회에는 시효가 없다
2007년 02월 02일 경향신문

!@#… 그에 비해서 소인배들은 뭐 하는 짓거리가 뻔하지 뭐.

경향 ‘과거사 반성’이 돋보이는 이유
[온라인 기자칼럼] ‘과거사 묻기’ 열중하는 긴급조치 미화신문들

2007년 02월 05일 미디어오늘

!@#… “지금 내 말을 경청해주기 바란다.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삶은 하얀 까마귀와 같은 삶이었다. 백로가 되고 싶어 온 몸에 밀가루칠을 한 하얀 까마귀… 그러나 그 까마귀는 비가 오는 날이면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자- 우리 이제 맹세하자꾸나… 양과 같이 순한 삶을 살기로…”
(다찌마와Lee 중)

인혁당 법관 실명 공개로 유신의 개그성을 생각하다

!@#… 최근 공개된, 인혁당 법관 실명 공개를 둘러싼 논쟁. 덤으로 과거사위에서 긴급조치 관련 판사 명단까지 공개. 뭐 공개 전까지 논쟁이었지, 사실 공개가 되자마자 논쟁해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많이들 버로우했지만. 음… 하지만 이런 것이 논쟁이 붙는 것이 용납되는 사회분위기 자체가 capcold로서는 이해 불능. 기자가 자기 이름 내걸고 쓰는 것 당연하고, 국회의원이 자기 이름과 당적 내걸고 법안 표결하는 것 당연하고, 장관이 자기 이름 걸고 정책 추진하는게 당연하다. ‘공공’의 일을 ‘공식적으로’ 하겠다면, 당연히 이름을 걸고 해야 한다. 이름을 걸고 해야 책임을 지니까. 사회심리학의 꽤 고전적인 실험이 있지 않던가. 길거리에서 “도와줘요!”하니까 아무도 안 도와주는데, “거기 붉은 스웨터에 청바지 입고 안경낀 분, 도와줘요!” 하니까 꽤 도와주더라는. 공공적인 일을 공식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권리를 위임받는 것이고, 그 권리에는 딱 그만큼의 책임이 따라주어야 균형이 맞다. 초등학교에서도 배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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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귀환

!@#… 그들의 귀환.

1) 작년 말, 박기영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 복귀.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181250.html
…기억을 되돌리자: 황우석 사기 사건 당시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 대통령 뽐뿌질과 사기연구에 예산 퍼주기 전담. 그 후에도 별 문제 없이 대학교수 복직. (누구는 10년동안 헤메다가 석궁을 쏠 정도로 정신이 망가져도 안되는 교수복직인데…)

2) YTN 새 보도국장에 홍상표 부국장.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796
…기억을 되돌리자: 황우석 사기 사건 당시 ‘맞춤형 줄기취재‘의 책임자.

3) 과기부총리와 언론 과학기자들의 막강 설레발 정신.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782
…기억을 되돌리자: 과학성과검증보다 언론홍보활동으로 갈때까지 갔던 어느 한 겨울, 한 사기사건의 전국적 대형 촌극을.

!@#… 확실한 반성 없이 적당히 버로우만 하고 지나가면, 결국 회전문은 계속 돌고 돌 수 밖에. 몇번이라도.

PS.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그 인덱스를 업데이트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_-;

— Copyleft 2007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동해, 평화의 바다 낚시 쌩쑈.

!@#… 한 이틀동안 또 ‘국민의 여론'(하하핫)을 떠들썩하게 한 노무현 대통령 평화의 바다 제의 파장 사태. 사실 협력적인 제3의 방안을 찾는 것은 이미 한일월드컵 개최에서 증명되었듯 충분히 합리적인 방안인데다가 별로 새로운 아이디어도 아니다. 또한 어차피 제의라기보다는 비공식 비실효성 발언이기에 (게다가 두 달 전 발언) 낚시 떡밥으로서의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건만, 조중동SY(하는 김에, SBS와 YTN도 이 낚시질 저질 뉴스 클러스터에 추가하기로 했다)나 네이버뉴스 리플족들의 심경은 그게 아니더라는. 완전히 준 매국노 취급에, 불타오르며 기꺼이 다음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 그러니까, 살인마 전두환을 큰어른으로 모시며 당당하게 세배하러 가는 사람들 – 을 찍어주겠다는 다짐이 하나가득. 어떤 의도와 맥락에서 이야기하더라도 욕먹을 것이 뻔한데도 결국 못참고 뭔가 ‘참신한’ 표현을 해버리고 마는 노대통령도 한심스럽지만, 도대체 국민의 여론이라는 것을 자처하는 이 인간들은 최소한의 학습능력이라는 것도 없는 것인가하는 현기증이 밀려오는 찰나. 오래 안끌고 청와대측에서 발언록을 공개. 연합뉴스의 보도를 인용해보자:

청와대가 공개한 발언록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당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게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미시적으로만 따지면 문제를 풀기 어렵다”며 “일본이 야스쿠니 문제나 역사교과서 문제에서 `이웃나라를 존중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 `역사문제를 공동연구하자’는 등 새로운 협력관계를 위해 적극적인 제안을 내놓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가령, 동해 바다를 한국은 동해라고 하고 일본은 일본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두 나라가 `평화의 바다’ `우의의 바다’ `화해의 바다’로 하면 두 나라 사이에 대화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해당 표현을 사용했다.

노 대통령은 곧바로 “동해 바다 표기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풀게 되면 상대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것이란 점에서 아이디어 차원에서 예를 들어 말한 것”이라며 “공식 제안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이상헌 기자 (서울=연합뉴스) 2007-01-08

!@#… 물론 당연하게도 이런 저질 낚시질을 한 언론 어디도 책임도 사과도 반성도 없이 그냥 지나갈 것이라는 것에 500원 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저질 낚시질에 기꺼이 분노로 동참하고 오만군데에 확산배포하여 낚시질을 완성시킨 자칭 ‘평.범.한. 일.반.인.’들 역시 아무 반성도 뭣도 없이 그냥 지나갈 것이라는 것에도 500원 건다. 버로우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이미 다들 잊어버린 듯 하지만, 작년 황우석 사기쑈의 여론 쌩쑈는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사기꾼 하나의 힘만으로 일어난 것도 아니다. 만약 이런 거지같은 여론 쌩쑈가 일어난 후 쌩쑈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그 열렬했던 목소리의 단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 만큼의 목소리만이라도 내주어서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한다면 세상은 참 상식적이고 아름답고 발랄하고 명랑한 곳이 될 터.

PS. 한국의 여론 쌩쑈에는 항상 과잉적용된 ‘민족자존심’ 또는 ‘서민경제’의 논리가 걸려있다. 한국 드라마는 맨날 연애질만 한다고 식상해하는 사람들이, 맨날 같은 레퍼토리로 울궈먹는 여론쌩쑈에는 질리지 않는다니 참 신기하다. 하기야 드라마도 질려도 질려도 결국 또 계속 보지만.

— Copyleft 2007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단상] 돈과 나: 소비와 정체성

!@#… 돈이 개입되면 ‘나’만 보인다. 최근 ‘사이언스’ 저널 (황사기 사건, 특히 KBS 홍사훈 기자의 일급 황빠질 덕분에 한국에서 일반인들에게도 무척 유명해진 바로 그 지면)의 뉴스란에 소개된 심리학 실험 논문의 결과다.

사이언스지의 기사 클릭.

!@#… 내용 요약하자면, 이렇다. 미네소타 대학의 Kathleen Vohs 교수와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을 데려다놓고는 한 그룹에는 다른 과제를 주어주기 전에 돈과 관련된 사전 자극을 주었다 (돈에 관한 에세이를 읽게 하든지, 여러가지 돈이 그려진 포스터를 보게 하든지, 기타등등). 그 뒤 퍼즐 풀기 과제라든지, 설문지 등을 풀게 했다. 그 결과 사전에 돈을 떠올리게 했던 그룹의 사람들은 과제 풀이에 있어서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경향이 더 강했으며, 타인과 대화하는 자리를 만들라고 하자 의자를 더 멀리 떨어트려 놓고, 설문지에도 혼자하는 활동들을 선호한다고 대답했다. 한마디로, 더 비사회적이 되었다는 것. 돈이 떠오르면 기를 쓰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초점이 가버린다는 결론 되겠다.

!@#… 그러고보니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유리에 은칠을 하면 거울이 된다고. 즉 돈이 개입되면 자신만 보이게 된다는 것. 동감이다. 돈이 단순히 물질적 축적의 의미에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옛날과는 다르다. 현대 사회라는 것에서 돈은 소비의 방식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역할까지 하니까 말이다. ‘I am what I eat’ 가 아니라, ‘I am what I spend‘다. 위의 연구는 아마도 돈과 사회성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 듯 하지만, 제멋대로 지엽적인 것에 관심가지는 capcold는 바로 이 소비에 의한 정체성이라는 측면을 떠올린다.

!@#… 원래 소위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라는 개념이 있다. 베블렌이라는 학자가 19세기 말 미국의 졸부들의 생활행태를 묘사하면서 이야기한 것으로, 그들이 소비하는 많은 것들이 생활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과시를 위한 소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생각, 하나의 다른 가설이 필요하다. 뭐랄까, 사람들은 흔히 과시의 대상을 남에게만 한정하곤 한다. 하지만 남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과시의 대상이라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자기 주변의 남들과 페이스를 맞추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남들과 자신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정체성을 위해서 과시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에게도 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받으려는 행동이 같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부르디외의 문화취향 이론과 베블렌의 소비 개념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 활동은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다. 단지 물건이나 서비스 자체보다, 그것을 향유함으로써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라는 것이다. 커피의 맛 자체가 아니라, 비싼 아이스 후라푸치노를 먹는다고 남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벅스에 가는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언론학의 프레이밍 이론을 아주 멋드러지게 대중화시키고 있는 레이코프의 이론에서 사람들이 자기 이익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체성에 따라서 투표한다고 주장했듯, 사람들은 소비 역시 즉각적 효용보다는 정체성에 따라서 한다는 생각이다. 굳이 말하자면 스스로에 대한 과시인 셈이다.

!@#… 뭐 이런 이야기를 어디다 써먹을까. 예를 들어 마케팅. 제품의 우수성 어쩌고는 그냥 기본 전제로만 깔아야 할 따름이다. 이것을 소비하기에 바로 당신은 ‘어떤 사람’이다, 라는 접근, 바로 그런 컨셉이 명확해야 팔린다 (예: 애플의 아이팟). 단지 우수한 사람이다 잘난 사람이다라는 식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개성이 확립된다는 것. 이것을 하면 우수한 사람이라는 식의 성장지향 천민자본주의 마케팅도 물론 여러 분야에서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비슷한 레벨의 경쟁이 이루어질 경우, 또는 판이 전체적으로 망가진 경우, 또는 취향의 힘이 강력한 변수가 되는 문화산업 분야에서는 이런 정체성 소비가 한층 중요해진다.

!@#…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실 다른 곳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바로 성찰의 시스템. 남에 대한 과시라면 통제 불능이다. 사회의 성장 속도,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고 말라 죽으라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순수학문(…-_-;)이나 성명서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과시의 경우, 성찰적 훈련을 통해서 일정 부분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발달시킬 수 있다. 즉 성찰의 인지적 훈련에 대한 단초가 되어주는 것이다. 내가 소비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소비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곧 나는 어떤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으며 내가 취하고 있는 방법은 과연 합리적/효율적/심리적으로 만족스러운가라는 한층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돈, 즉 소비가 지니는 역할을 부정적으로 폄하하지 않고 현대적 정체성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현대사회 속에서의 성찰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 돈은 자꾸 ‘나’를 보게 한다는 연구가 나왔다면, 돈을 ‘나’를 돌아보는 도구로 사용해보자는 발상을 파고 들어가보자는 작은 생각이다. 나중에 뭔가 자료만 잘 뽑아낼 수 있다면 논문이나 써볼까… 아마 무시당하겠지만.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저물어 가는 것에 대한 관조 – 『카페 알파』[기획회의060815]

저물어 가는 것에 대한 관조 – 『카페 알파』

김낙호 (만화연구가)

멸망이란 항상 강력한 임팩트를 지니기 마련이다. 어떤 강력한 힘이 하나의 세계를 소멸시키는 모습이란 소멸되는 대상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비극이며, 그 힘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변변한 저항조차 허용되지 않을 때 오는 비극성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이전의 세계가 사라진 곳에는 새로운 방식의 세계가 들어선다. 이렇듯 멸망은 극적인 요소가 강렬하지만, 사실 현실 속에서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크다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그 자리에 가상의 이야기가 들어서게 되는데, 그렇기에 고대 이래로 수많은 신화와 예언서에서 멸망이 거의 항상 언급되는 것이다. 기독교 성서의 아마게돈이든, 북구 신화의 라그나로크든, 힌두신화에서 이야기하는 파괴신 칼리의 폭주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면서 생활 속 불안과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신화와 예언의 기능은 종교기관보다는 대중문화의 손으로 넘어간지 오래다. 즉, 멸망이라는 테마는 만화나 영화, 소설 등 서사형 대중문화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단골소재다.

그런데, 멸망이 항상 모든 것이 부수어지고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운명을 한탄하는 것이어야만 할까. 스피노자가 이야기한 “내일이 세계의 종말이라면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식의 뻔뻔할 정도의 관조는 과연 쓸모없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아주 약간이라도 품어본 적 있는 독자들이라면, 최근 완간된 만화 『카페알파』(아시나노 히토시, 학산문화사, 전14권)가 하나의 좋은 독서 경험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은 인적이 드문 언덕에 있는 카페를 혼자 지키는 여종업원 ‘알파’의 하루하루 일상이 내용의 전부다. 주인은 여행을 떠났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이며, 사람들이 사는 도시는 스쿠터를 타고 한참 내려가야 나온다. 그런 평온한 곳에서 자연과 가끔 한 번씩 오는 단골 방문객들을 보며 나른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비록 여종업원이 안드로이드이며, 대도시들이 대부분 파괴되고 물에 잠겼으며, 지금도 해수면이 계속 올라가는 중이라서 인간문명이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멸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배경에 깔려 있지만 말이다. 사실 써놓고 보면 엄청난 설정이지만,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핵심 정서다.

『카페알파』의 세계는 하루의 흐름에 비유하자면 저녁뜸에 가까우며, 작품에 등장하는 누구하나 앞으로 기나긴 밤이 올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다. 하지만 모두 관조적으로, 그저 그 세상을 살아갈 뿐이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아등바등하지 않고, 주어진 세상에서 평온하게 일상을 영위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삶을 주인공 알파는 그저 미소 지으며 지켜본다. 과도한 극적 감상주의나 직접적인 설교에 빠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듯한 메시지를 전달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스타일의 이런 작품들을 장르 팬들은 소위 ‘치유계’라고 부르곤 하는데, 『카페알파』는 바로 이런 치유계 작품의 가장 모범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극적인 사건보다는 한 템포 쉬어가며 무언가를 돌아보도록 하는 것, 엄청난 반전에 의하여 세상이 구원받기를 기대하도록 하거나 엄청난 행복의 교훈을 주기보다는 그저 나른하게 지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여유를 잃지 않도록 하는 자세가 이 작품이 느리면서도 12년이라는 긴 작품 연재기간동안 고정 팬을 거느렸던 비결이다.

작품 어디에도 자세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부분 따위가 없다. 핵전쟁이 있었는지, 기상재해로 엉망이 된 것인지, 유전공학이 폭주한 것인지 속 시원한 설명 따위는 없다. 그냥 머리만한 밤이나 과일이 있어서 가끔 따먹을 수 있고, 알파가 커피 원두를 사러 나가는 인근 도시 요코하마(그래서 작품의 원래 제목이 『요코하마 쇼핑 기행』인데, 한국어 번안 제목이 원제보다 한층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가 서서히 물에 잠기며 사람이 줄어들고, 가끔씩 높은 상공에 거대한 로봇 비행체가 날아다니며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호수에는 인간형 야생 생물 ‘미사고’가 살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요소들은 멸망의 비극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바로 이 세상 속 느긋하게 자연과 사람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자세를 보여주기 위한 자연스러운 세상의 일부로서 그저 그곳에 있다.

주인공 알파는 이 모든 것을 오랜 기억으로 남기는 자다. 어쩌면 앨범이나 사진기 같은 존재다. 늙지 않고 오랜 시간을 살아나가는 그녀의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은 성장하고 늙어가고 2세를 낳고 어느 틈엔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사실 시간의 영속적 흐름과 그 속에서 불변의 존재로 변화를 바라보는 자의 이야기는 고전 SF 단편 소설들에서 원래부터 종종 사용되는 구도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항상 인간의 의식수준을 초월한 세상의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느라 사람들은 정작 그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부수적 도구에 불과하게 다루어지는 반면, 이 작품은 그 반대의 길을 택한다. 어디까지나 사람에 대한 긍정적 관조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원을 사는 주인공의 운명보다는,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또 천천히 다가오는 멸망의 길에 흥분하거나 피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미소가 핵심이다.

이러한 이야기와 정서를 뒷받침하는 것은 부드러우면서도 둥그런 선, 가끔 나오는 파스텔 톤의 컬러 페이지들, 풍부하고 온화한 표정변화로 가득한 시각연출이다. 극적 긴장감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려는 광활한 파노라마를 남발하지도 않는 절제된 칸 연출 역시 이 작품의 정서에 가장 적합하게 활용되고 있다. 과도한 감상주의적 성찰보다는 그냥 작은 것에 즐거워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자기 할 말을 다 해버리는 관조적 연출의 승리다.

“시대의 황혼기가 이렇게 느긋하고 평화스럽게 오는 것이라니.
이 느릿한 시대에 나는 이 황혼의 세상을 천천히 바라보며 간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1권 중, 알파의 대사)

빠르게 흐르는 현실의 스트레스를 더욱 격렬하고 강렬한 자극적 이야기에 몰입하여 상쇄시키는 것도 하나의 즐김의 방식이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하염없이 느긋한 관조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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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작품의 팬층 성격상 당연히 세트용 수납 박스라든지 박스 세트라든지 OST 특전이라든지 하는 완결 기념 이벤트가 있을법 했지만 뭐 그냥 조용히 완결. 뭐 출판사가 출판사이니만큼 당연한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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