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 서사성에 관한 잡설 [문화저널 백도씨 0706]

!@#… 지난 호 문화저널 ‘백도씨’에서 여름이라고 무려 여행 특집을 의뢰받았던 바 있다. 대중 문화 콘텐츠에 대한 지면인 만큼 그냥 여행지 가이드를 쓰고 넘기기에는 민망하고 (게다가 그런 것은 싸이나 네이버에 널리고 널렸다), 그렇다고 대중문화 속에 나타난 여행지가 어쩌느니 하는 식으로 약간 변형된 여행 가이드도 그다지 집필 자극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말이 되든 말든, 여행이라는 것 자체의 서사성을 한번 건드려보겠다고 선언. 여행을 떠나는 것이 바로 이야기를 경험하는 것,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바로 여행을 떠나듯 하는 것. 즐김에 관한, 창작에 관한 작은 이야기.

여행에 관한 잡설: 여행이 곧 최고의 이야기다

김낙호(만화연구가)

적당히 따듯해지면 종종 여행의 계절이 돌아왔다고들 한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란 참 보편적인 오락/재충전 활동이다. 사실 아주 빡빡하게 보자면, 여행은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행위 가운데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춘 경험을 일컫는다. 그런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다들 여행을 인생에 비유하고, 여행의 즐거움을 논하며 설레인다는 말인가.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여행은 그 뼛속까지 서사성으로 가득한 것, 바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칭 고급예술이든 대중서사문화든지 간에 여행을 소재로 다루는 것들이 차고 넘치는 것 역시, 이런 호환성에서 기인한다. 재미있는 여행은 곧 재미있는 이야기이며, 이야기적인 재미를 깨달을 때 비로소 재미있는 여행이 시작된다. 이것은 여행이 곧 이야기인 이유, 이야기의 재미를 즐기는 것에 대한 잡설이다.

캐릭터들의 이야기

하나의 서사문화 작품이라는 특수한 설정 속에서, 결국 이야기를 꾸려가는 것은 바로 캐릭터들이다. 아무리 배경설정이 중요한 대하스펙타클 판타지 작품을 표방한다 할지라도, 그 배경조차 결국은 캐릭터들의 관계와 행위 속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남, 헤어짐, 오해, 화해, 합심, 적대의 과정 속에서 캐릭터들은 성장한다. 그리고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경험을 선사해준다.

그런데 여행이라는 것은 거의 항상 사람들의 이야기다. 여행을 여행답게 해주는 것은 단지 동네의 풍광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같이 가는 사람들, 여행의 도중에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여행의 목표지점에서 기다리고 있거나 여행의 출발지점에 남아있는 사람들, 혹은 하다못해 그 여행지를 매개로 해서 서로 어떤 느낌을 나누게 되는 수백 수천년 전 어느 문명의 주민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여행의 핵심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고,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 – 즉 하나의 공간에 뿌리박지 않고 다음 장소를 향해서 흘러간다는 것 – 속에서 맺어지는 비일상적 경험이다.

이렇듯 여행은 캐릭터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훌륭한 이야기다. 여행과정 속에서 그 상호작용의 결과 어떤 이들은 성장하고, 어떤 이들은 파멸하고 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여행의 시작과 끝에서 완전히 똑같은 이는 없다. 여러 소년들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시체를 찾아 여행길을 떠난다는 영화 ‘스탠바이미’ 같이 여행을 매개로 하는 성장드라마 작품을 보면 잘 나타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같이 여행이라는 비일상적 경험을 함으로써 캐릭터들의 관계는 새로운 맥락을 얻게 되고, 그 변화한 맥락에 어떻게 적응하거나 거부를 하는지에 따라서 성장이 이루어진다. 그 변화과정이 얼마나 극적인지, 또는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기에 원래의 캐릭터 성격이 더욱 강화되는지가 관건이다. 현실속의 여행이든 그저 이야기든, 가장 재미있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 및 그 사람의 이전 이후 사이의 일들이다.

기승전결의 구조

현실 속의 여행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그 경험을 회상해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여행이란 출발이 있고 도착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파멸 이후 영원한 겨울의 설원을 달리는 유럽만화 ‘설국열차’처럼 언제 출발했는지를 기억 못할 수도 있고, 도착점이 너무나 상상외로 멀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여행은 근본적으로, 이야기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행을 떠나는 시점의 각오와 불안함과 평온함 등 각종 기대, 여행 중 만나게 되는 어떤 뜻밖의 상황, 그 상황이 고조되어 생기는 위기 또는 행운,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어 맞게 되는 결과까지. 즉 전형적인 기승전결이 작은 차원, 큰 차원에서 이어지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가장 큰 차원에서는 출발이 ‘기’, 도착이 ‘결’에 해당될 것이고, 작게 보자면 여행 중에 일어나는 여러 일화들이 각각의 기승전결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여행이 곧 이야기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 역시 이야기를 즐기듯 들길 때 가장 재미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대감을 즐기고, 고조되는 과정을 즐기며, 피크의 스릴을 느끼고, 결과의 해방감을 차례대로 즐긴다는 말이다. 그 와중에는 충격적인 반전이 있을 수도 있고, 평온한 흐름의 잔잔함을 느낄 수도 있다. 충격적 사건의 연속으로 점철된 여행을 다루는 만화 ‘북두신권’의 일방향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것도, 여행 자체에서 별 일이 벌어지지 않기에 오히려 주인공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과 과거 경험들이 작은 에피소드들을 촘촘히 박아 넣는 만화 ‘아날로그맨’의 이야기 구성도 여행의 이야기적 매력을 십분 살려준다.

세계를 배워나가기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는, 그 공간과 관련된 생활의 패턴, 사람들 사이의 원칙, 그것에서 파생되는 사고방식들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다른 공간이라면 또 다른 생활들, 사람들, 사고방식들이 또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여행이란, 그렇듯 ‘다른’ 세계관을 접하도록 하는 기회다. 앨리스는 토끼굴을 지나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면서, 자신이 살던 갑갑한 세상과는 다른 아주 싸이키델릭한 세계관을 잔뜩 접하게 된다. 철이는 미모의 여성과 함께 기차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며 기차역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겪는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세계를 바탕으로 하는 성장이기에, 새로운 경험이 자기 세계의 붕괴가 아니라 보다 넓고 깊은 경험으로 다가오도록 한다. 이전의 것을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는 식이다.

그런데 이야기라는 것의 가장 큰 목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자신이 처한 세계와는 다른 생각, 다른 규칙들을 접하면서 경험의 폭을 늘리는 것이다. 혹은 자신이 처해있는 세계라고 할지라도,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새로운 부분들을 발견해내도록 해야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생긴다. 여행도 이것과 다를 바 없다. 같은 장소를 여러 번 여행한다고 할지라도, 새로운 세계,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해낼 때 비로소 여행은 재미있어진다. 그렇지 않다면 여행이 아니라 단순한 이동이 될 뿐이니까. 여행을 즐긴다는 것은 배움의 과정이고,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여행, 이야기, 즐김

두루뭉실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 잡설의 종착점은, 바로 여행을 갈 때 이야기처럼 즐기고,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나 소설 등을 볼 때 여행을 가듯 즐기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창작도 마찬가지다. 마치 독자들과 함께 여행을 하듯 준비를 하고 출발해서 뜻밖의 일들을 만나고 결국 완성/완결이라는 종착점으로 향해가는 것이다. 어떤 여행은 철저한 준비와 스트레이트한 진행이 미덕이고, 어떤 여행은 느슨하고 헐렁하게 가야 제 맛이다. 1주일에 유럽16개국을 돌아야 하는 여행, 20분 안에 20가지 시사상식 꼭지를 역사 문화적 맥락과 서사적 감동까지 넣어서 풀어나가야 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빠지면 목표한 종착점에 제대로 도착할 수 없다. 거꾸로, 느긋하게 창밖을 내다보며 목적지 없이 가는 여행, 느슨하게 일상을 둘러보려는 일기체 웹툰에 철저한 준비를 한답시고 에너지를 소진하면 자연스러움의 미덕을 잃는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결국 같이 여행하는 사람들과 호흡하며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좀 더 성장해 있는 것을 느낄 때 좋은 여행이 되어준다. 여행의 재미, 이야기 작품의 재미는 바로 같이 여행하는 사람들이 서로 같이 여행한다는 것을 알고 나름의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행도 서사문화 작품도, 결국 사람 겪어 나가는 과정이다.

***

여행에 관한 몇 가지 작품들

죠죠의 기묘한 모험 3부 (만화) : 소중한 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기묘한 능력을 지닌 주인공 모험단이 더욱 기묘한 능력으로 이들을 방해하는 적들을 물리치며 일본에서 이집트까지 긴 여행을 떠난다. 국내 미소개지만, 90년대 이래 일본 소년만화 장르의 근간을 다진 금자탑 중 하나.

은하철도 999 (TV애니메이션) : 지구에서 사라진 개념들이 모이는 곳, 안드로메다에서 기계인간으로 개조수술을 받고 싶어 하는 소년 철이가 기차를 타고 긴 여행길을 떠난다. 청춘, 추억, 사랑, 인간성 등에 대한 철학적 화두로 가득한 성장물. 연인이자 어머니이자 여왕님이자 메이드의 상을 지니고 있는 미녀 동반자도 있고.

스탠드 바이 미 (영화): 어딘가에 있다는 누군가의 시체를 구경하겠다는 일념으로 길을 나선, 동네 소년들의 여정. 실제로는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와 시간이지만, 어느덧 인생의 의미 가운데 90%는 다 깨달아버리는 소년들의 초고속 성숙기. 요절미소년 리버 피닉스의 매력이 물씬 풍긴다.

아날로그맨 (만화) : 폐 끼치지 않지만 여하튼 부적응 인생들, 기차로 누군가를 찾아나서는 여행을 떠난 아날로그적 사고를 고수하는 주인공의 시선 속에서 작품이 되었다. 대단할 것 없지만 각자 방식대로 살아나가는, 사람의 냄새가 물씬한 이야기들.

신곡 (소설) : 천국, 연옥, 지옥을 층층이 다 훑어내는 궁극의 이세계 모험소설. 작가의 자화상인 단테가 펼치는 유람 견문록. 다큐멘터리적 진행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인과응보에 대한 깨달음으로 한층 성장한 주인공 캐릭터의 모습에 아마 독자들도 만족을 느끼지 않았을까.

Copyleft 2007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불허/영리불허 —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