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게이먼의 만화들에 관하여 [판타스틱 0706]

!@#… 2회로 끝난 초단명 칼럼(!)의 마지막회. 평론적 해석을 줄이고 거의 약력 위주로 설명해도 지면이 부족했다는;;; 하기야 바로 그런 것이 이 칼럼란을 정리하는 이유 중 하나겠지만. 칼럼 속성상, 최근 각광받는 소설가로서의 게이먼보다는 본업인 만화스토리 쪽의 게이먼을 다뤘다. 본래의 탈고버전 + Dreamlord님이 잡아주신 정보 오류수정 반영.

현대 신화에 심취한 셰익스피어 – 닐 게이먼의 만화들

김낙호(만화연구가)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집안의 반대로 어긋난 연인들이나 미쳐버린 왕, 복수에 목숨걸다가 결국 주연 인물들 몰살 같은 장중한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의 가장 멋진 본질이 드러나는 것은 상상력 넘치는 환타지 작품 『한여름밤의 꿈』이다. 신화속의 요정들이 인간 세상과 위화감 없이 상호작용하며, 평범한 일상은 기이한 현상으로 가득해진다. 당대 현실의 인간사와 신화적 상상력의 연결, 그것을 통해서 꿈과 현실, 욕망과 허망함을 넘나드는 한바탕 소란을 벌이는 이야기.

그런데 만약 그런 이야기 만들기와 정서를 현대의 작가가 이에 맞먹는 완성도로 구사한다면 어떨까. 최근에는 환타지 소설가로도 명망을 떨치는 영국 출신 만화스토리 작가 닐 게이먼Neil Gaiman의 작품들이 바로 그렇다. 그의 작품들에는 셰익스피어적인 화려하고 섬세한 대사가 넘치며, 신화적 원형들이 현대 인간사에 대한 거울 역할을 하며 촘촘히 배치된다. 덕분에 그가 주도한 작품들은 문학적 완성도와 대중적 인기를 동시에 거머쥐곤 해서, 그는 만화 『샌드맨 Sandman』연작의 성공과 최근작 베스트셀러 소설 『아난시 보이즈 Anansi Boys』까지 축적된 명성을 기반으로 현재 영미권 문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환타지 작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CS루이스나 톨킨, 르귄 등 정통파 환타지 작가들의 진한 영향을 보이며, 그 위에 DC코믹스 류의 현대 슈퍼히어로의 장르법칙들을 녹여넣고 또 비틀어 나가며 심오한 고민까지 풀어나가는 솜씨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게이먼은 작가로 데뷔하기 전, 먼저 글솜씨를 키우기 위하여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일을 하며 자신의 장르적 취향에 충실하게도 『패닉금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공식 가이드』같은 책을 썼다. 그러다가 영미권 만화계의 거장 스토리 작가 앨런무어의 소개로 영국의 청년 대상 SF만화잡지 AD2000 등에서 만화스토리를 쓰며 만화의 장르법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그의 환타지 세계관을 가장 전위적으로 화면에 옮겨낼 줄 아는 그림작가 데이브 맥킨을 만나서 단순한 장르물을 탈피하는 시도를 한다. 결국 둘은『폭력적 사건들 Violent Cases』 등으로 그 능력을 잔뜩 발휘했는데, 이것이 미국 DC코믹스사의 눈에 들어와서 당시 아티스틱한 표현력의 슈퍼 히어로물을 필요로 하던 이 회사에서 『블랙 오키드 Black Orchid』- 국내에서는 ‘흑란’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 라는 작품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죽음, 부활과 번식, 자연의 힘 같은 노골적으로 묵직한 테마들이 배트맨, 스왐프씽 등이 까메오 출연하는 DC 슈퍼히어로물의 세계에서 불온하게 펼쳐지는 이 작품의 반향은 게이먼에게 새로운 진로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1988년, 그의 재능을 집대성한 대표작 『샌드맨』 연작이 이곳에서 연재를 시작했다 (물론, 데이브 맥킨과는 이후로도 샌드맨 시리즈의 표지작업, 『시그널 투 노이즈 Signal to Noise』, 환상 동화책 시리즈 등 최고의 콤비를 유지하고 있다).

『샌드맨』 연작에서, 닐 게이먼은 셰익스피어적 유려함과 장르만화를 통해 구현된 현대 신화를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었다. 샌드맨 연작의 핵심 테마는 바로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의 상상력이 상징적으로 구현되는 영역인 ‘꿈’이다. 샌드맨의 주인공은 바로 꿈의 현신이다. 때로는 모르페우스라는 이름의 신으로 호칭되며, 때로는 그저 꿈의 제왕(Dreamlord) 혹은 그저 드림으로 불리운다. 하지만 그는 신이나 고대영웅이 아니라, 인격화된 하나의 영원한 ‘개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의 중심에는 영원한 개념의 현신인 일곱 남매가 나오는데, 그들이 바로 운명(Destiny), 죽음(Death), 꿈(Dream), 파괴(Destruction), 욕망(Desire), 절망(Despair), 분열(Delirium)이다. 우주의 존재는 운명에 기반하고, 운명은 죽음으로 귀결되며, 죽음을 앞두기에 존재는 꿈을 꾸며, 꿈과 현실이 있는 세상은 파괴를 낳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욕망을 품고, 욕망이 충족되지 않기에 절망을 한다. 원래 막내는 한때는 환희(Delight)였으나, 세상이 험난해지면서 언젠가 분열로 바뀌었다. 이들 일곱의 영원(The Endless)은 우주의 모든 삶을 관장하는 법칙이자 근원이다. 그런데 그 중 가장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야기의 영역, 즉 꿈을 관장하는 드림로드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럽전설에서 아이들이 잠이 들도록 눈에 모래를 불어주고 간다는 상상의 존재인 샌드맨이 작품의 제목인 것은 이런 연유인 셈이다. 샌드맨의 세계에서는 요정들의 왕국, 기독교적 지옥과 천국, 슈퍼히어로의 세계, 인간들의 험난한 세상, 북구신화와 아프리카 토테미즘까지 전 세계 전 시대의 모든 이야기들이 모두 긍정된다. 그리고 드림로드가 관장하는 꿈의 세계는 이런 세계들을 위화감 없이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작품에는 여러 시대의 수많은 이야기꾼들이 꿈의 세계에서 드림로드와 조우한다. 셰익스피어? 물론이다. 셰익스피어가 꿈의 힘을 빌어서 완성한 ‘한여름밤의 꿈’을 공연하는데 진짜 요정계의 왕과 주민들이 관람하고 파크가 연극에 개입하여 미묘하게 소동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단편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991년 세계 환타지 대상 단편 부문 수상)

신화와 상상의 자유로운 혼합을 즐기는 게이먼식 세계관은 특히 샌드맨 연작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안개의 계절 Season of Mists』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지옥의 제왕 루시퍼는 자신에게 창피를 주었던 드림로드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무려 자기 날개를 뜯어버린 후 지옥을 폐쇄해버리고 그 열쇠를 그에게 넘겨버린다. 그러자 지옥의 지배권을 얻기 위해 세계 각지 신화의 존재들이 꿈의 왕국에 모여든다. 이집트 신화의 신들, 오딘과 그 아들들, 요정왕국의 오베론 왕, 카오스와 코스모스… 그리고 기독교의 천사들도 혼란을 막기 위해 경합에 참가한다. 그렇다면 그 후 루시퍼는 뭐하냐고? 인간 세상의 해변가에서 멋지게 누워서 석양을 즐긴다. 그 후 다른 작품에서는 고급 클럽에서 피아니스트를 하며 스타일리쉬한 삶을 산다. 독자들이여, 어느 클럽에서 피아니스트가 너무나 천재적으로 유혹적인 멜로디를 뽑아내면 그가 새벽별의 상징이자 한때 지옥의 제왕이었던 이가 아닌지 의심해보기를.

무려 드림로드의 죽음을(!) 다루는 철학적인 결말로 1996년에 마무리된 샌드맨 연작의 성공은 이후 수많은 스핀오프 시리즈는 물론, DC의 작가주의 성인취향 출판 라인인 ‘버티고 Vertigo’를 탄생시켰다. 이외에도 닐 게이먼판 해리포터(라고는 해도 89년에 시작했으니 훨씬 전에 쓰여진)라고 볼 수 있는 『마법의 책들 Books of Magic』 시리즈나, 조만간 영화로 개봉 예정인 삽화 소설 『스타더스트 Stardust』(찰스 베스 Charles Vess 그림) 역시 현실세계와 신화세계의 교차를 그려내며 온갖 신화와 민담의 장르법칙들을 교묘하게 섞어 넣고 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작으로 스파이더맨부터 엑스멘까지 마블사의 주요 슈퍼히어로들을 모조리 영국 식민지시대 미국을 배경으로 그려내는 『1602』에서는 현대의 영웅 신화인 슈퍼히어로물을 중세적 가치관과 근대적 가치관이 혼합된 시대의 틀로 재해석한다. 물론 그런 깊은 의미와는 별개로, 그 ‘쿨한’ 발상이 팬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큰 히트를 친 것은 물론이다.

상상과 현실, 신화와 생활이 만나는 곳에서 환타지의 가치는 피어오른다. 고대신화와 세익스피어와 팝컬쳐의 변종인 게이먼의 현대적 신화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확장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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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판타스틱>. 페이퍼컴퍼니 발간. 대중 장르문화, 특히 SF판타지의 범주에서 만화를 소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칼럼. 주로 작품/작가/장르 소개 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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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샌드맨 시리즈 한국어판을 나름대로 오매불망 기다려왔던 터라(최소한 현문에서 2001년 무렵에 출간 검토하고 있었을 때부터), 나오고 난 후 따로 소개하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이야 당연. 다만 좀 더 커버스토리스러운 지면으로 다루어져 마땅한 작품이건만, 어째 미디어의 관심이 의아할 정도로 소극적인 느낌(역시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로 만들어야만 관심 1그램인가, 아니면 출판사의 이슈메이킹 능력이 약한 것인가). 작가 닐 게이먼에 대해서는 이전 월간 판타스틱 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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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조금 잘못된게 있는것 같군요. Signal To Noise는 게이먼이 The Sandman을 한창 연재하던 중에 나온 작품이니까, 그것때문에 DC의 눈길을 끌게되었다는건 시차적으로 맞지않죠. 그리고 The Sandman이 연재를 시작한것은 1989년이 아니라 1987년입니다. (The Sandman #1 표지에 1988년 1월호라고 찍혀있으니까, 최소한 2달동안은 가판대에 진열되는걸 목표로 하는 월간지의 성향으로 봐서 1987년 하순에 나온거죠.)

    Violent Cases를 단순히 “폭력적 사건들”이라고 부르는건 원제목의 뉘앙스를 살리지 못하는 번역이지만, 성완경 교수님의 시리즈때부터 굳은 제목이니까 별다른 대안이 없는것 같군요. (어린 시절의 게이먼이 “금주법 시대에 미국 갱들은 바이올린 케이스에 총을 숨겨가지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바이올린 케이스”를 “violent cases”로 잘못 이해한것에서 유래한 제목이죠.) 그나마 최근 몇년동안에 와서 “가이먼”에서 탈피한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Season Of Mists는 The Sandman 스토리라인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작품의 완성도로 따지면 The Kindly Ones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Season Of Mists를 읽으면서 게이먼이 추구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요. 수퍼히어로 만화의 줄거리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서, 매월 The Sandman을 사읽으며 “이제 다음 이슈에서는 Morpheus와 Lucifer의 엄청난 대결이 벌어지겠구나”라고 기대했는데… 정작 다음달에 나온 이야기에서는 Lucifer가 “나 이짓 그만두고 다 너한테 줄께”라고 하는 것을 읽고선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0여년전의 그 기억때문에 아직까지도 Season Of Mists를 좋아하고 있는거죠.

  2. !@#… Dreamlord님/ 항상 그렇듯,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샌드맨 시리즈 시간 오류의 진상은 참 쪽팔리는 일이지만, 닐게이먼 공식홈피의 서지사항 코너에서 이 아저씨가 P&N 출간을 89년이라고 표기한 걸 가져 썼다는…(즉 그 홈피에는 P&N 스토리아크의 완결 시점을 기준으로 표기를 해놨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나니 Signal to Noise 연재가 1989년 6월부터인지라 본문에서 제가 언급한 그 잘못된 타임라인이 나와버린 것이죠. -_-; 여튼 마이너 수정 들어갔습니다~

    Violent Cases의 cases가 말씀하셨듯 워낙 중의적이라, 그냥 이미 알려진 번역으로 가긴 했습니다만… 만약 책을 내라고 하면 차라리 그냥 ‘폭력 케이스’ 정도로 가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생각하는 중입니다 (워낙 ‘사건’이라는 뜻으로도, ‘상자’라는 뜻으로도 꽤 일반화된 외래어니까요, 요즘은).

    저 역시 작품의 방대한 세계관(규모도, 사상도)이 독자에게 처음으로 온전히 소개되는 Season of Mists를 높게 평가하는데, 편안함과 재생, 심지어 화해와 용서의 정서까지도 있는 The Wake도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