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돈과 나: 소비와 정체성

!@#… 돈이 개입되면 ‘나’만 보인다. 최근 ‘사이언스’ 저널 (황사기 사건, 특히 KBS 홍사훈 기자의 일급 황빠질 덕분에 한국에서 일반인들에게도 무척 유명해진 바로 그 지면)의 뉴스란에 소개된 심리학 실험 논문의 결과다.

사이언스지의 기사 클릭.

!@#… 내용 요약하자면, 이렇다. 미네소타 대학의 Kathleen Vohs 교수와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을 데려다놓고는 한 그룹에는 다른 과제를 주어주기 전에 돈과 관련된 사전 자극을 주었다 (돈에 관한 에세이를 읽게 하든지, 여러가지 돈이 그려진 포스터를 보게 하든지, 기타등등). 그 뒤 퍼즐 풀기 과제라든지, 설문지 등을 풀게 했다. 그 결과 사전에 돈을 떠올리게 했던 그룹의 사람들은 과제 풀이에 있어서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경향이 더 강했으며, 타인과 대화하는 자리를 만들라고 하자 의자를 더 멀리 떨어트려 놓고, 설문지에도 혼자하는 활동들을 선호한다고 대답했다. 한마디로, 더 비사회적이 되었다는 것. 돈이 떠오르면 기를 쓰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초점이 가버린다는 결론 되겠다.

!@#… 그러고보니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유리에 은칠을 하면 거울이 된다고. 즉 돈이 개입되면 자신만 보이게 된다는 것. 동감이다. 돈이 단순히 물질적 축적의 의미에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옛날과는 다르다. 현대 사회라는 것에서 돈은 소비의 방식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역할까지 하니까 말이다. ‘I am what I eat’ 가 아니라, ‘I am what I spend‘다. 위의 연구는 아마도 돈과 사회성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 듯 하지만, 제멋대로 지엽적인 것에 관심가지는 capcold는 바로 이 소비에 의한 정체성이라는 측면을 떠올린다.

!@#… 원래 소위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라는 개념이 있다. 베블렌이라는 학자가 19세기 말 미국의 졸부들의 생활행태를 묘사하면서 이야기한 것으로, 그들이 소비하는 많은 것들이 생활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과시를 위한 소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생각, 하나의 다른 가설이 필요하다. 뭐랄까, 사람들은 흔히 과시의 대상을 남에게만 한정하곤 한다. 하지만 남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과시의 대상이라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자기 주변의 남들과 페이스를 맞추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남들과 자신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정체성을 위해서 과시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에게도 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받으려는 행동이 같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부르디외의 문화취향 이론과 베블렌의 소비 개념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 활동은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다. 단지 물건이나 서비스 자체보다, 그것을 향유함으로써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라는 것이다. 커피의 맛 자체가 아니라, 비싼 아이스 후라푸치노를 먹는다고 남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벅스에 가는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언론학의 프레이밍 이론을 아주 멋드러지게 대중화시키고 있는 레이코프의 이론에서 사람들이 자기 이익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체성에 따라서 투표한다고 주장했듯, 사람들은 소비 역시 즉각적 효용보다는 정체성에 따라서 한다는 생각이다. 굳이 말하자면 스스로에 대한 과시인 셈이다.

!@#… 뭐 이런 이야기를 어디다 써먹을까. 예를 들어 마케팅. 제품의 우수성 어쩌고는 그냥 기본 전제로만 깔아야 할 따름이다. 이것을 소비하기에 바로 당신은 ‘어떤 사람’이다, 라는 접근, 바로 그런 컨셉이 명확해야 팔린다 (예: 애플의 아이팟). 단지 우수한 사람이다 잘난 사람이다라는 식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개성이 확립된다는 것. 이것을 하면 우수한 사람이라는 식의 성장지향 천민자본주의 마케팅도 물론 여러 분야에서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비슷한 레벨의 경쟁이 이루어질 경우, 또는 판이 전체적으로 망가진 경우, 또는 취향의 힘이 강력한 변수가 되는 문화산업 분야에서는 이런 정체성 소비가 한층 중요해진다.

!@#…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실 다른 곳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바로 성찰의 시스템. 남에 대한 과시라면 통제 불능이다. 사회의 성장 속도,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고 말라 죽으라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순수학문(…-_-;)이나 성명서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과시의 경우, 성찰적 훈련을 통해서 일정 부분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발달시킬 수 있다. 즉 성찰의 인지적 훈련에 대한 단초가 되어주는 것이다. 내가 소비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소비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곧 나는 어떤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으며 내가 취하고 있는 방법은 과연 합리적/효율적/심리적으로 만족스러운가라는 한층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돈, 즉 소비가 지니는 역할을 부정적으로 폄하하지 않고 현대적 정체성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현대사회 속에서의 성찰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 돈은 자꾸 ‘나’를 보게 한다는 연구가 나왔다면, 돈을 ‘나’를 돌아보는 도구로 사용해보자는 발상을 파고 들어가보자는 작은 생각이다. 나중에 뭔가 자료만 잘 뽑아낼 수 있다면 논문이나 써볼까… 아마 무시당하겠지만.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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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thoughts on “[단상] 돈과 나: 소비와 정체성

Comments


  1. 좋은 글입니다. 소비에 대한 아무런 비판적 성찰 없이, 자본권력이 던지는 허상의 미끼를 좇기에 정신이 없는 한국사회에 더 없이 적절한 글이라 생각합니다.

    글에서 언급하신 언어학자 레이코프는 에서 어떻게 은유의 사회구성원의 정체성을 구성하는지를 분석하기도 했지요. 그 관점에서 보면 한국사회의 소비담론을 지배하게 된 ‘명품’이라는 말도 하나의 은유로 볼 수 있겠는데요, 뭔가 ‘실체’를 담고 있는 듯한 환상을 조장하는 ‘명품’이라는 말은 다른 사회에서는 ‘사치품(luxury good)’이라 불리는 소비재에 불과하니까요.

    인용하신 탈무드의 ‘거울’이 ‘은화’라는 ‘돈’의 비유라면, 프로이트는 ‘금화’를 소유/소비의 상징으로 간주하며 그것을 ‘같은 색’의 물질을 배출하는 항문기의 징후로 설명하기도 했지요. 홍세화씨가 얼마 전 강연에서 ‘역사적으로 한국이 이만큼 풍요로운 적도 없었으나, 이만큼 천박한 적도 없었다’라고 말하며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아파트 광고를 예로 든 적이 있습니다.

    홍세화씨 의도도 그랬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광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사회와 사회구성원의 의식은 어떤 것이냐는 한탄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심하게 말해 ‘모두가 미쳐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님께서 말씀하신 ‘비판적 성찰’의 능력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이것은 푸코가 죽으면서 남긴 ‘자기로의 배려’와도 일치한다는 생각입니다.

    얼마 전 좀 엉뚱하게 에리리 프롬의 를 ‘다시’ 구입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도 같은 을 사서 책꽂이에 꽂아둔 적은 있지만, 제대로 읽은 적이 없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관심을 멀리했던 고전의 필요성이 다시 느껴지는 것은 적어도 한 가지는 말해주는 것이겠지요. 하나는 제가 과거에 독서를 게을리 했던지, 아니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제를 실감할 만큼 제가 오래 살았던지요.

    잘 알고 계시겠습니다만, 베블런은 캡콜드님이 사시는 위스콘신에서 태어났지요. 시간이 나시면, 그의 자취를 좇아 미시건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매니토웍(Manitowoc)에 다녀오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2. !@#… 아아, 매니토웍이라… 안그래도 항상 마음은 콩밭에 가있는 저를, 뽐뿌질하시는군요 :-) 본문보다 알찬 덧글, 감사합니다. 참, 저도 한번씩은 있던 책을 다시 구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책을 다른 이에게 선물해주라는 내면의 목소리라고 애써 위안하곤 하죠… 기억력 감퇴라고는 죽어도 인정못합니다아아!

  3. Poverty is spiritual halitosis.

    라고 한 George Orwell의 말이 생각나서 잠시 실례했습니다. 쓰고 나니, 아마 그는 부유했더라도 입내가 난다고 했을 것 같네요. -_-; 잘 읽었습니다.
    위스콘신 사십니까? 전 누-(으..춥지요, 이제)-욕인데 괜히 반갑군요. ^^;;

  4. !@#… 입내, 좋은 비유죠. 스스로 끊임없이 의식할 수 밖에 없으며, 어찌 피할 도리가 없고, 타인과의 관계 속 자기 위치를 규정해주는… 하지만 부자의 입내는 좀 다른 의미이기는 하겠죠. 입내를 없애기 위해서 어떤 가그린을 쓰느냐에 따라서 다시금 정체성이 규정된다거나;;; 그나저나 “누-욕”이면 이제 슬슬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도 설치하고 한껏 분위기 오르고 있겠군요. :-)

  5. 핫, 가그린…은…(…아, 여기서 벌써 막히면 바닥 드러나는데..;;)
    글쎄, 밖을 나가본지 좀 돼서..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그렇겠죠?
    제가 멋모르고 영문 블로그에 덧글을 남겼는데, 수정이나 지우기가 수월치 않네요. 로그인이 안되니. 괜찮으시다면 싹 지워주십시요. 요 근래엔 Comics Journal을 잘 안봤는데, 혹 아직 글을 올리신 적 없다면 한번 띄워보시죠. Tsuge와 같은 비주류 일본만화작가들을 선호하는 경향인 잡지인데, 국내 현 만화계의 실력가들 소개하는 지면이 마련되었음 하는 개인적 바램입니다.^^(이미 소개하셨다면 제가 게으른 거였고요;) Adrian Tomine, Dan Clowes같은 이곳 작가들도 우리 작품 봐야죠.;; 저홀로 생각으로는 더 뒤로 나아가 고우영님같은 분들을 이곳에서 모른다는 것도 아쉽습니다.^^ 암튼 수고하시고, 쿨쩍.

  6. !@#… 지워드렸습니다. 영문본쪽은 한동안 업데이트를 안하고 방치중이어서 반가웠는데… :-) 코믹스저널에 본격적으로 소개를 하려면 사실 작품의 영문 번역 작업도 같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요새 이렇다할 기회가 잘 안만들어지더군요. 2003년 앙굴렘 당시처럼 한번 영어권 대상으로도 대형 전시 행사와 단편집, 해설집을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은 계속 하고 있으니, 좋은 계기가 생기면 붙잡아야죠.

  7. 출판의 문제…북페어 기회를 치고 들어오실려면 그렇겠군요. 좋은 글들 보고 갑니다. 아, 저는 예전에 혀짧은 글들로 미국 언더만화를 소개하는 칼럼들을 ‘악진’이란 곳에 아주 잠깐 올리다 말았던, 이은진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만화그리고 있습니다. 저같은 연고없는 어믄 개인도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나름대로 울 만화를 알리는 일을 하고 싶었으나 말이 짧고 숨길 좋아하는 체질 탓에 모카 같은 페어에서도 잘 대화를 못하겠더군요.; capcold님은 정말 잘하시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드린 말씀이었고, 계속 수고해 주십시요.^^
    (화두에 벗어나는 어믄 포스팅은 이걸로 끝입니다.;)

  8. 좀 다른 얘기지만 (왜 계속 엉뚱한 얘기만 하는 거야) 일전에 이사하고 면허증의 주소 바꾸러 갔다가 “주소 증명”이 안 된다고 딱지 먹었는데, DMV에서 요구하는 거주지 증명이란 우편으로 받은 “공공 기관에서 보낸 고지서” 혹은 “은행구좌 명세서”였습니다. 우편물도 아무 우편물이나 되는 게 아니고, 고지서와 명세서 – 그러니까 소비의 증명을 제 이름과 새 주소로 받아야만 거주의 증빙이 되는 것이더군요.

    그래도 친구가 손으로 써서 보낸 편지 같은 걸 주소증명으로 받아주는 풍류를 아는 나라도 저기 북유럽 어디에 있다고 하니까,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동사무소 전입신고가 없는 나라의 일화였으니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 경제활동이 아예 공식적으로 존재의 증명이 되는 건 미국만의 경우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실제로는 다 거기서 거기더라도.

  9. !@#… 보라/ 친구가 손으로 써서 보낸 편지는 얼마든지 공범 한명만 있으면 위조할 수 있으니까. -_-; 행정적으로 뚜렷한 증빙은 역시 공공 소비의 증명. 한국의 경우는 소비의 정체성도 아니라 아예 주민등록 전입신고 어쩌고 하는 행정관료주의로 확 옭아매버린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