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잡지여, 튀어 올라라 [한겨레21/650호]

!@#… 지난 한겨레21 650호에 ‘만화잡지여, 튀어 올라라’라는 제목으로 실린, 한국 만화잡지의 흐름을 정리하는 글. 이미 눈치챘겠지만, 씨네21의 만화잡지 ‘팝툰’의 창간 관련해서 잡힌 꼭지. 비슷한 시기 비슷한 컨셉으로 씨네21에서는 이명석씨의 글을 게재했는데, 글 스타일이나 주제의 초점이 전혀 달라서 은근히 재미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명석씨 글쓰기의 대중적 호소력과 직관성을 많이 부러워하고 있다 – 하지만 팩트 오류는 좀 줄여줬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여기 공개하는 버전은 항상 그렇듯 편집을 거치기 전의 송고 버젼. 편집부의 제목과 리드문 뽑는 센스는 역시 현장이기에 해낼 수 있는 귀중한 자산. 지면관계상 압축적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한국의 만화잡지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은 capcold.net 검색창을 활용하시길.

 

만화 잡지, 새로운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다

김낙호(만화연구가)

최근, 80년대 초의 소년시절을 소재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여 화제를 모았던 만화 『소년탐구생활』의 한 에피소드를 보면 만화잡지 ‘보물섬’이 등장한다. 매 호마다 정성스럽게 모으고 있던 잡지의 지난 호 한 권이 없어지자 주인공 소년과 또래 친구들이 벌이는 치열한 신경전이, 해학적이자 실감나게 펼쳐지며 세대적 공감을 자아내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문화계의 복잡성이 증가한 오늘날은 어떨까. 만화가 ‘콘텐츠’로서의 각광받은 것과는 달리 만화 잡지는 대중적 지명도에서나 품질과 다양성에서나 침체를 거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팝툰’(씨네21 발행)의 의욕적 창간에서도 볼 수 있듯, 만화잡지에 대한 기대나 희망은 여전히 크다. 한국에서 만화잡지라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상황이기에 이런 끈끈한 인연을 자랑하는 것일까.

한국만화잡지의 흥망

한국의 만화 잡지는 해방 직후 창간된 ‘만화세계’가 시사만화를 중심으로 하는 뉴스잡지를 표방하며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사만화의 경우 각 일간신문사에서 이미 더 효과적으로 수용했기에 확실한 자기 자리를 확보하지 못했고, 연속 서사극으로서의 만화는 잡지의 형식보다는 딱지만화, 그리고 대본소 만화로 완성되었다. 출판 사정이 좀 더 나아지려는 60년대에는 만화를 길거리에서 화형 시키는 억압 분위기 속에서 ‘저급 문화’인 만화로 잡지를 만든다는 시도가 쉽게 나올 수가 없었다.

돌파구는 정치적 암울함이 한층 더해졌던 70년대에 오히려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스포츠신문과 성인주간지의 등장이 임꺽정, 고인돌 등을 통해서 다시 연재형 서사만화, 잡지 만화의 매력을 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른 한 쪽에서는, 어린이들에게 ‘교양’을 쌓아줘야 한다는 훈육의 물결 속에서 창간된 소년소녀 종합 교양잡지들이 연재만화의 보금자리로 거듭나고 있었다. 새소년, 소년중앙 등으로 대표되는 이 잡지들은, 겉으로는 종합지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인기 만화 작품을 통해서 독자를 유인하고 상호 경쟁을 하고 있었다.

군인 대통령이 다른 군인 대통령으로 바뀌고 문화정책이 유연해진 시대의 1982년, 마침내 전문 만화잡지가 창간되었다(역설적이지만, 육영재단에서 발간했다). 다른 종합잡지보다 두 배는 되는 두툼한 두께의 잡지 ‘보물섬’은 수많은 소년소녀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당대 떠오르는 스타작가들이 잔뜩 포진해 있음은 물론, 순정만화와 명랑만화, 모험활극 등 다양한 장르들이 고르게 안배되어 있는 만화의 ‘종합전과’ 같은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리고 85년에는 성인만화 계열에서도 ‘만화광장’이라는 걸출한 잡지를 배출하며 양 연령층을 충족시켰다. 그리고 8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장르별 분화 역시 이루어져, 88년에는 남자 중고생 성향의 ‘아이큐점프’와 여자 중고생 성향의 ‘르네상스’의 창간되어 보물섬을 보며 자라난 세대를 효과적으로 흡수했다.

그 기반 위에, 90년대는 만화잡지가 활발하게 출몰하고 분화되었다. 아이큐점프와 르네상스의 성공은 수많은 비슷한 취향의 유사 잡지를 촉발시켰고, 일본만화의 정식 개방까지 겹치면서 만화잡지의 품질은 상승하고 시장은 급격하게 확장되어 아이큐점프의 경우 발행부수가 30만부를 넘었다. 늘어난 만화 수요 속에 새로운 작가 세대가 대두되었고, 94년에는 소년지보다 약간 높은 연령대를 대상으로 하는 준성인지를 표방한 ‘영’지들, 그리고 성인지를 표방한 ‘미스터블루’, ‘트웬티세븐’, ‘빅점프’ 등이 일거에 탄생했다.

만화 잡지출판의 어려움

하지만 지나친 연령별 세분화와 경쟁적 창간, 출판사들이 만화잡지를 적자를 감수하고도 연재작품의 단행본 발간을 위한 홍보 팜플렛으로 활용하는 일본식 모델에 심취하는 현상 등은 만화잡지 시장의 불안 요소로 남았다. 이것이 결정적인 파국으로 연결된 계기는 97년 ‘일진회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만화 비난 분위기와 청소년보호법상의 불리한 조항들은, 이미 흔들리고 있던 성인만화잡지들을 확실히 쓰러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대형 출판사들이 소매점을 통한 일반 독자보다는 대여점 공급을 노리고 일본 만화 라이센스를 중심으로 다품종소량 생산에 매진하면서, 만화잡지들의 역할은 판매량과 함께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출판 사업에 있어서 잡지에 대한 당위성은 견고해서, 98년 성인 순정만화지 ‘나인’의 창간 등 여전히 의욕적인 시도들이 있었고 99년 경에는 시공사 등 여러 후발주자들이 만화잡지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때로는 졸속 기획, 때로는 인력 변동, 때로는 단지 운이 없어서 많은 잡지들이 여러 호를 넘기지 못하고 명멸했다.

그렇듯, 만화잡지의 시장성에는 많은 난맥상이 있다. 첫째는 채산성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내부 잡지 운영팀이 아닌 외부 작가들에 대한 의존도 때문에 원고료 지급의 부담이 높고, 특히 만화 원고의 경우 작품이 지면을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한 회당 단가가 글 원고보다 훨씬 높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화잡지의 경우 소비자층의 성향에 대한 연계가 뚜렷하지 않고 미디어 영향력이 현재 낮은 상태이기 때문에, 광고유치에도 불리하다. 둘째는 품질 높은 기획의 어려움이다. 편집부가 작가에게 때로는 작품을 공동기획하고 때로는 작가의 무조건적인 팬이 되어주며 잡지의 색을 만들어야 하는데, 한정된 비용에 따른 한정된 인력으로 그런 섬세한 신경을 쓰기는 힘들다. 관리 자체 뿐만 아니라 기획력을 구비한 전문 인력 자체의 부족도 여기에 더욱 기여한다. 셋째, 마케팅의 난맥상이다. 효과적인 홍보 지면을 활용하는 것이나 집중 공략 배포처를 찾아내는 것에는 비용과 인력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계열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우라면 다행이지만, 영세하거나 폐쇄적인 출판사의 경우 잡지를 만들고도 확실하게 시장에서 터트리고 밀어붙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런 난점들이 잘못 어긋나면 잡지는 중구난방이 되며, 작가도 편집부도 만족하기 힘든 결과물이 만들어지고 만다. 이러한 품질 저하는 당연히 독자층 일탈로 이어지고, 뚜렷한 전환점이 없다면 휴간/폐간이 될 때까지 악순환이 계속된다.

새로운 돌파구, 고집스러운 부활

내부적으로 고난을 겪는 만화잡지에 어느덧 대안으로 대두된 것은 바로 인터넷이었다. 하지만 사실 초고속 인터넷 보급 초기의 ‘n4’ 또는 ‘해킹’ 같은 온라인 만화 잡지는 대여점의 경쟁 상대일지언정, 정작 만화잡지에 대해서는 경쟁자 역할도 대안 역할도 하지 못했다. 종이만화의 스캔본으로는 화면으로 보는 재미를 주기에 부족했고, 그렇다고 해서 종이 단행본 인쇄를 고려하지 않은 화면 전용 만화를 중심으로 놓는 것은 수익모델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종이잡지의 채산성이 점점 더 떨어지고 독자층이 좁아지자 결국 출구가 필요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포털 사이트들의 만화코너가 뜻밖의 큰 호응을 받으며 온라인상에서 잡지형 연재만화 모둠을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희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2년간 일부 만화잡지들이 폐간 대신 웹진 전환이라는 대안을 선택했고, 한때 큰 인기를 구가했으나 현재는 난관에 부딪힌 몇몇 인기 잡지들은 종이잡지와 함께 온라인 버전을 포털 사이트와 연계해서 유료서비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예 ‘만끽’의 사례처럼 기존 종이 만화잡지의 기획 인력들과 작가들이 처음부터 웹진으로 신규 만화잡지를 창간하는 사례도 생겼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종이잡지를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여전히 만화잡지에 대한 충직한 소비층을 형성하리라 인식된 성인 순정만화 독자를 대상으로 ‘오후’, ‘허브’등이 창간되어 손을 내밀고 나름의 성공과 실패를 겪었다. 그리고 씨네21에서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창간한 ‘팝툰’ 역시 성인 남성 독자층을 끌어들이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최근 창간되었다.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들고 다니며 손으로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는 종이 독서의 매력이며, 뚜렷하게 묶여진 만화잡지의 힘이다.

특히 ‘팝툰’의 경우는 이미 ‘씨네21’의 성공으로 기획과 마케팅 능력을 보여준 바 있는 언론사에서 본격적으로 만화잡지에 진출했다는 의의 덕분에, 이후 종이 만화잡지가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리고 등장한 ‘팝툰’ 창간호는 기대와 우려를 반씩 주고 있다. 사실 편성이나 일부 작품의 표현에 있어서 아직 온라인 연재만화에서 받은 영향과 종이만화 전통의 표현력 사이의 융화가 매끄럽지 않은 점은 안정궤도로 올라서면 차차 나아질 부분이다. 하지만 독자층의 취향을 규정하는 뚜렷한 정체성이 아직 잡히지 않는다든지, 잡지만화 일반은 물론 최근 히트 연속극의 공통된 매력요소인 선 굵은 서사를 오히려 부정하는 점 등은 다소 적극적인 방향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

만화잡지의 가장 중요한 효용 가운데 하나를 깜빡 잊고 넘어갔다. 그것은 바로 잡지를 차례대로 쌓아놓고 주변인들에게 자랑하는 것이다. 우리들 대다수가 최소한 어린 시절에는 직접 해봤거나 아니면 그러게 하는 친구를 보고 한없이 부러워한 적이 있다. 종이잡지라면 하나 벽면이 가득한 모습으로, 온라인 잡지라면 목록에 가득한 사용 기록과 자유이용권 아이디로 자신의 뚜렷한 취향을 자랑할 수 있다. 그냥 한번 어떤 작품을 본 경험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나는 이런 만화를 적극적이고 일상적으로 즐긴다는 당당한 자기 문화정체성 규정에서 나오는 쾌감 말이다.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만화잡지가 계속 나와 주고, 그 만화잡지를 자랑스러워 해주는 독자문화가 유지될 때 한국만화는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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