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한마디에 바뀐 것이 아니다 [한겨레 칼럼/ 140331]

!@#… 게재본은 여기로. 계기와 기반, 즉 주목받는 사건과 운동의 축적에 대한 이야기. 당연하게도, 말미의 축적과 참조를 통한 노하우화 이야기는 진보지식생태계 캠페인과도 연결.

 

대통령의 한마디에 바뀐 것이 아니다

김낙호(미디어연구가)

한때는 한국 온라인 상거래의 이른 발달의 일등공신이었다가, 발전을 가로막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다가, 결국은 최근에 들어 전면 수정 수순을 밟게 된 것이 바로 공인인증서 제도다. 오랜 문제제기가 있었음에도 이 제도의 정책 책임자 및 시장의 이해관계자들은 이것을 어떻게든 존속시키고자 땜질로 버텼고, 이전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현 정권 또한 당선 당시 이 사안을 그대로 두고자 했으나, 마침내 움직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런 조치가 취해진 방식은 대통령의 갑작스런 명령이었고, 그 명령의 배경에는 중국인들이 인기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관련 상품을 한국 쇼핑몰에서 구매하는 것이 공인인증서 제도 때문에 어렵다는 하소연이 있었다. 공인인증서 제도 적용에서 유발된 문제로 지금껏 제기되어온 온갖 중요한 논점들, 즉 정보 보안 취약성을 유도한다는 것, 한국 인터넷 환경의 갈라파고스화에 대한 우려, 심지어 국내 온라인 상거래 업체들에 대한 역차별 논리마저 여태껏 담당자들의 복지부동을 뒤집지 못했다. 그런데 한 편의 인기 드라마, 한 번의 호통이 상황을 바꾼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인인증서 폐지가 박근혜 대통령의 공으로 남게 된 반면, 오랫동안 힘들여 운동해온 사람들은 가려진다는 점을 한탄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하지만 변화에 있어서 계기와 기반은 함께 요구되는 것이기에, 계기가 화려한 집중조명을 받는다고 해서 딱히 서운할 필요는 없다. 약간 시계를 앞으로 돌려서, 가요 사전 검열 철폐가 9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이뤄졌을 당시 계기는 절정의 인기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시대유감’이 받았던 대중적 관심이었다. 하지만 그 기반에는 정태춘이 오랜 기간 동안 불법음반 낙인을 받아가면서 주도한 힘겨운 철폐 운동과 법적 소송이 있었다. 담당자들이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촉발하는 것은 화려하게 끓어오른 대중의 압력이라는 계기지만, 애초에 변화의 당위와 추동력, 방향성을 제공하는 것은 해당 사안에 대해서 그간 사람들의 노력으로 축적된 문제의식과 운동이라는 기반이다.

당장 중국 소비자 구매 애로사항으로 공인인증서 제도를 논하는 대통령의 명령이 내려지자 실무자들의 첫 조치는, 공인인증서 없는 외국인 전용 쇼핑몰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물론 관련 법률들을 여럿 고치고 제도를 구석구석 바꿔야 하니까 그냥 국내 법률의 적용범위가 다른 외국인들을 예외로 취급하려는 즉각적인 해결 시도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무슨 박정희 시대 워커힐 외국인 전용 카지노 같은 시대착오적 모습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공인인증서 문제에 대한 오랜 기반 논리와 여론이 이미 있었기에 여론의 압력은 계속되었고, 결국 내외국인 전체를 아우르는 전면 개선을 약속받았다. 이렇듯 계기만 반짝하면 임시변통의 연속으로 대처할 수도 있다. 변화를 구체화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반이다.

계기를 만나서 변화가 촉발된 후, 기반의 역할은 한층 중요해진다. 이후 정책에서 중요하게 참조될 수 있도록 논점과 대안들을 다잡는 것은 물론이고, 비슷한 다른 안건들도 더 효율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그간 과정을 일목요연하고도 풍부하게 정리하여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비치하는 것, 즉 운동의 노하우화가 필요한 것이다. 가깝게는 주민등록제 문제 같은 오래된 정보인권 사안들, 멀게는 파업 손배소 같이 사회적 틀에서 분명히 역기능적임에도 존속되는 온갖 관행에 대해서 널리 이어져야할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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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2030 잠금해제] 필진 로테이션. 개인적으로는, 굵은 함의를 지녔되 망각되기 쉬운 사안을 살짝 발랄하게(…뭐 이왕 이런 코너로 배치받았으니) 다시 담론판에 꺼내놓는 방식을 추구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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