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람들: 엄마들 [기획회의 404호]

!@#… 어쨌든 떠들썩하고 평온하고 사랑하고 호구되고 지리하고 통쾌한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

 

그저, 사람들 – [엄마들]

김낙호(만화연구가)

사람이 무언가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는 흔히, 좁은 초점과 넓은 주변부로 범주를 갈라놓고 접근하게 된다. 칸네만 같은 심리학자들의 깊고 오랜 연구들을 소개하고자 꺼내는 말은 아니고, 우리들이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고정관념을 만들어낼 때도 바로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자기자신, 혹은 자신의 가까운 내부 집단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다양한 사정과 개성, 여러 정체성이 혼재된 복합성을 인식하고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존재임을 인식한다. 하지만 세상의 나머지를 차지하는 드넓은 외부 집단에 대해서는 그런 인지력을 투입하기보다, 효율적으로 단순화시킨다. 사람을 특정한 범주유형으로 손쉽게 갈라 넣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부분만 인식하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눈을 감아버린다. 한쪽으로 보면 필연적인 인지능력 배분이고, 다른 쪽으로 보면 자칫하면 악성 편견으로 빠질 수 있는 시발점이다. 광신도 테러리스트 아랍인이나 범죄자 흑인 같은 인종 편견이든, 배신자 전라도민 같은 지역 편견이든, 된장녀나 김여사 같은 성별 편견이든 말이다.

타인을 어떤 특정한 속성 범주로 묶어버리는 굳어진 편견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흔히 제시되는 것은 바로 대항적 유형을 던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자칫하면, 흔한 나쁜 ** 말고, 좋은 **도 있다는 선에 그치며 오히려 기존의 편견을 역설적으로 강화하는 함정에 빠지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석적인 극복 방법이란 대단히 명료한데, 바로 단순한 유형화 자체를 뒤집는 것이다. 저들 또한 우리가 우리를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존재들이다. 어떤 속성은 자세히 봐도 역시 문제 맞고, 어떤 속성은 좀 더 깊이 생각해볼만 하고, 어떤 속성은 공감도 간다. 유형화된 캐리커쳐가 아니라, 바꿔야 할 부분 바꾸고 납득할 부분 납득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그저 또 다른 ‘사람’들일 뿐이다.

[엄마들](마영신 / 휴머니스트)은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여러 중년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가장 중심에 있는 사람은 이소연으로, 스무 살 때 선을 보고 결혼하고, 일찍 임신하고,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여 여유 없지만 그럭저럭 행복한 생활을 시작했다가, 남편이 지속적인 도박에 빠져서 고생했다. 빚을 갚고 빚이 생기고 또 갚는 쳇바퀴 생활 속에서 춤을 배우다가 연애도 하고, 다시 가족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미 남편도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어서 이혼했다. 이 모든 사연은 그러나 일일드라마처럼 줄거리를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이소연씨의 생활을 보여주기 위해 고작 몇 칸 몇 페이지로 주욱 지나가는 배경일 뿐이다. 노래를 만드는 아들과 살며, 건물 청소일을 나가며, 나이트 웨이터와 장기 연애 중인 지금 말이다. 이소연씨의 또래 친구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흔해빠진, 그런데 그렇다고 딱히 드라마틱하지 않은 것도 아닌 인생 경로 위에서 지금 각자의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바로 이 사람들의 생활, 즉 연애와 사회생활과 여타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참,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자식들이 있다. 엄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엄마’에 대해서 흔하게 만들어진 범주화는, 사람이 아니라 모성애라는 개념의 현신이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걸고 나머지는 그저 부차적인 속성이지,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대항 범주화로 자식에게 막 대하는 엄마를 내놓아 봤자, 그저 진정한 엄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편견만 강화한다. 하지만 [엄마들]에서는 중년 여성들이 이야기의 온전한 화자가 되고, 그들은 연애하는 사람이자, 감정적으로 싸우고 대화하는 평범한 인간이자, 노동자이자, 거기 더해서 누군가의 부모이기도 하다. 엄마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인데 엄마인 것이다. 심지어, 알고 보니 그들도 사람이었다는 식의 신기한 발견의 느낌도 최대한 배제해버린다. 예를 들어, 모성 강요에 눌려있던 엄마의 자아발견 성장담과 거리가 멀어도 이렇게 멀 수가 없다. 그냥 원래 다들 복합적인 모습의 삶을 살고 있고, 독자는 그런 너무 당연한 생활 모습을 스치며 목격하는 것일 뿐이다. 누가 동정해주거나 응원해주지 않아도 이미 능란한 사회인이고, 일터의 부당함에 분노하기는 하지만 조직화해서 대처하는 것에는 초보자인 흔한 우리 사회의 노동자고, 아무리 오래 사귀었어도 무익한 미련도 설레임도 지니며 연애하는 사람이며, 자식의 인생 경로 선택을 그럭저럭 납득한 엄마다.

이 작품 속 중년 여성들은 위대하거나 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무슨 무식하고 억척스런 진상들도 아니다. 도회적인 트렌디드라마 주인공들 같은 새침함으로 무장한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래도 온라인 게시판으로 소통하고 서로에게 문자를 쏘며 그러다가 불이 붙으면 ‘현피’(통신 공간에서 붙은 시비로, 직접 만나 싸움을 벌이는 것)도 한다. 등산복 불륜을 이야기하는 는 흔한 언론보도의 끈적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으면서도, 그것이 데이트 코드인 것은 또 맞다. 50대든 뭐든, 감정은 젊은 세대의 여느 사람들이나 다를 바 없이 그대로다. 다만 딱 경험만큼씩, 인생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애초에 중년 여성들의 자아 찾기를 그려내는 아니기에,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에 대한 묘사 역시 어설프게 타협하지 않는다. 관리소장의 행패에 노조를 만들어보기로 하면서 겪는 일화에는 우리 사회의 일상적인 노동권 멸시, 그리고 아줌마 멸시가 빼곡하게 들어있다. 가부장적 가족 질서의 구속도 여러 인물들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레 등장한다. 외부인이 바라보는 유형화한 과장된 모습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으로 그려내는 것은, 뛰어난 디테일의 힘이다. 주인공 이소연씨의 나레이션에서 지금 흔히 볼 수 있는 중년 말투를 대사로 고스란히 표현해내는 것은 기본이고, 자주 등장하는 통신 대화 속에서도 그들의 문체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감정이 빠지거나 과도하게 들어가고 오타와 생략부호가 난무하는 문자메시지와 덧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블로그와 소셜망 서비스에서 흔히 보이는 중년들의 흔적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엄마로 통칭되는 중년 여성들의 삶의 공간에 현실감을 세밀하게 구축하는 그림 연출이 여기에 더욱 힘을 더해주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탐사보도 같은 건조한 느낌을 주고 끝났더라면, 함의가 높되 매우 재미없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들]은 기본적으로, 대단히 재미있다. 민망한 치정극의 재미도 있고, 알콩달콩한 로맨스물의 요소도 있고, 박진감 넘치는 격투 액션도 있으며, 노동 투쟁이라는 사회파 활극도 있으며, 죽음과 화해도 있고, 아들과 나름대로 굳은 신뢰 같은 인간적 감동도 있다. 그저 사람인 이들의 삶은 그렇듯 지리멸렬하기도, 구질구질하기도, 흥미진진하기도, 멋지기도 하다. 하나의 작품만으로 온 사회가 엄마라는 유형화된 틀을 깨고 그저 사람으로서 중년 여성들을 되돌아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속 깊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쌓이다 보면, 반 발짝씩은 움직이지 않을까.

엄마들
마영신 지음/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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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고고고-해골물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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