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성과 전문소재 -『오늘의 커피』[기획회의 245호]

!@#… 단행본이 좀 잘 나가면 연재도 재개되고 열심히 나와줄까 하는 희망을 담아 보낸다.

 

이야기성과 전문소재 -『오늘의 커피』

김낙호(만화연구가)

대중문화에서 전문 소재를 다룬다는 것은 무척 자주 정해진 패턴을 따르곤 한다. 애초에 “90%의 익숙함과 10%의 신선함”으로 폭넓은 대중을 사로잡아야 하는 목표가 있고 전문 소재는 어디까지나 그 10%의 역할을 위한 도구인 만큼, 그럴듯하기는 하되 너무 본질적으로 깊게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금물이다. 그럴듯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는 자극 (또는 지적 허영)을 주지 못하고, 그렇다고 너무 깊게 들어가면 입문교과서가 되어 재미를 잃는다.

물론 그 균형점이 어디 쯤에 있는지는 장르와 대상층, 시대에 따라서 다르며, 여러 층위로 나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혹은 흔히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로 한국 TV드라마는 어떤 전문소재를 다뤄도 결국 연애멜로물로 깔대기를 탄다는 이야기가 있다. 병원드라마는 병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 경찰드라마는 경찰서에서 연애하는 이야기, 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드라마로서 보편적으로 익숙하게 히트를 칠 수 있는 연애물에 전문소재로 초반에 관심을 끌 수 있는 흥미요소를 주는 정도에서 균형을 맞추는 셈이다. 여기에는 물론 비용과 시간 문제 때문에 해당 전문소재를 정말로 깊게 파고 들어갈 만한 사전 취재를 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까지 겹치는데, 특히 한국에서 영세한 제작관행이 많았던 만화라는 분야에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 전문소재를 미끼로 하는 인기작품의 수요를 대부분 일본만화에서 찾곤 했는데, 다행히도 『식객』 같은 작품의 큰 성공이 최근 수년간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그리고 그 기반 위에 실제 생활 속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전문소재를 제대로 다루면서도 탁월한 재미의 익숙한 이야기에 버무리는 다른 작품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최근의 그런 방향에서,『오늘의 커피』(기선 / 애니북스 / 1권 발매중)는 가장 돋보이는 작품 중 하나다. 우선 무엇보다, 원래 작가 자신의 장점인 보편적 인생사가 담긴 떠들썩한 상황 코미디극의 서사성이 그대로 살아있다. 그 위에 커피라는 전문소재를 흘러가는 배경그림으로 놓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핵심 코드로 심어 넣었다. 카페에서 남장여자가 연애하는 이야기도 재미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커피 만드는 것 자체를 중심에 놓는 것도 제대로 소재에 대한 접근방식을 바탕으로 캐릭터를 배분하고 이야기를 집중할 수 있다면 큰 재미를 준다. 이런 바탕 위에, 언급된 그런 커피를 실제로 구해먹고 싶도록 충동질을 하는 매력적 묘사가 갖추어지면 균형은 완전해진다. 전문소재 만화는 보편적 서사성을 살리다가 소재를 등한시하거나, 소재에 대한 충동질을 강조하다가 서사적 재미가 줄어들거나, 소재를 매개로 한 캐릭터 구도 배분이라는 설정에 몰입하다가 충동질도 서사성도 같이 놓치기가 쉬운데, 영리하게 그 함정을 피해가는 작품인 것이다.

작품은 커피에 반해서 가업을 물려받기를 거부하고 바리스타 수업을 쌓은 재벌3세 남자주인공 나기태의 카페에서 시작한다. 그는 최고의 바리스타가 되기 위해 부던한 노력을 했고 뛰어난 실력을 손에 넣었으나, 지나치게 완고한 원칙주의자라서, 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가장 순수한 에스프레소의 쓴 맛을 뽑아냈는데 왜 장사가 망하고 있는지를 원망하는 쪽이다. 그런 그가, 공원 자판기 커피로도 사람들을 감동시킬 줄 아는 천재적 감성을 지녔지만 커피의 전문적 공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주인공 오난지를 우연히 발견하고 고용한다. 그리고 카페의 운영에 얽힌 보다 굵직한 줄거리와 함께, 매 에피소드마다 하나의 커피 음료 종류를 매개로 누군가의 어떤 인간사 국면이 해결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연애관계 발전에 대한 힌트가 살짝 주어지는 방식이다. 아직 첫 권만 나온 시점에서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갑작스럽게 대결구도에만 몰입한다거나 본격 연애물로 방향전환을 하는 등 현재의 균형이 깨지지만 않는다면 큰 무리 없이 장기 히트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인다.

『오늘의 커피』는 정말로 커피를 핵심소재로 다루고 있다. 커피 한 잔에 억지로 인생의 심오한 의미를 압축해서 우겨넣는다거나 인간사의 갈등을 커피 한잔으로 다 풀어버린다는 식의 과장은 남발하지 않지만, 해당 에피소드와 어울리는 종류의 커피로 이야기의 전체 분위기를 만들어나갈 줄 안다. 게다가 그 커피를 만드는 방법이나 주목해야할 요점을 캐릭터 배치를 통해서 줄거리 속에 녹여 넣는다. 가르치는 남자주인공과 배우는 과정에 있는 여자주인공의 성격 조화가 조금만 어긋나더라도 무척 지루해질 수 있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드라마와 만화 설정을 잘 응용한 설득력 있는 캐릭터 구축으로 안정감을 유지한다. 특히 원래 다른 작품에서도 부산하고 부조리한 상황 속에 여러 사건들이 충돌하고야 마는, 속된 말로 ‘쌩쑈’ 상황을 이야기의 매력으로 삼아온 작가이기에 학습 혹은 교훈적 분위기로 흘러갈 틈도 없다.

물론 이런 균형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어서, 작가는 1년여 동안 작품을 사전 준비하며 실제 바리스타 교육과정을 수료하는 등 취재에 만전을 가했다고 한다. 또한 출판사측 역시 콘텐츠진흥원의 기획창작만화 지원 사업을 활용하여 이런 작업과정을 뒷받침해주었다. 아직 오지 않은 커피 붐(이미 한국을 휘몰아친 바 있는 전문커피숍 붐 말고)이 작품 하나만으로 성큼 다가오지는 않을 수 있겠지만, 책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충실한 커피 설명과 한국의 전체 커피업계에 대한 작가의 메모는 그런 붐의 좋은 밑바탕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 본다.

다만 전문소재 만화는 연재가 길어질수록 소재 자체에 천착하느라, 즉 예를 들어 새롭고 기이한 커피 음료를 강조하느라고 소재에 이야기를 끼워 맞추는 무리수를 두는 함정이 도사린다. 그런데 단순히 에피소드방식도 아니라 긴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식이니 더욱 작위성을 조심해야 한다. 큰 이야기를 몇 개로 나누어 중간에 쉬고 또 그리는 한이 있더라도 전체 틀을 계속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셈이다. 반면, 지속적 연재로서 독자들에게 익숙한 일상으로 파고들지 않는다면 호소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즉 휴식마저도 포함한 정기적 연재 포맷을 고집할 필요가 있는데, 원래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연재되다가 단행본 1권 분량을 채운 후 뚜렷한 연재 재개 스케쥴을 공고하지 않고 휴재중인 현재 상태는 다소간의 불안감을 준다.

『오늘의 커피』가 전문소재 중심의 흐름과 작가 특유의 이야기성 및 유머 감각이 계속 같이 살아있는 작품으로 남기를, 커피 한잔 마시면서 기원한다. 비록 작품 속에 등장하는 최고의 에스프레소와는 거리가 멀지만, 한 손에 커피를 쥐고 그런 것을 상상하게 만들며 이야기 자체를 즐기도록 하는 것이 이런 작품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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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오늘의 커피 1
기선 지음/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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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읽고 싶어지는 만화네요. 소개해주신 내용으로 보면 뭔가 치유계 느낌이 드는데… 샌드맨도 그렇고, 매번 소개해주시는 책마다 리스트에 올려 두고 있습니다.

  2. 90%의 익숙함과 10%의 신선함 이군요. 저라면 8:2를 더 선호할 것 같지만 실제론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상당히 뼈가 있는 말씀이군요. ^^

  3. !@#… 지나가던이님/ 사실 이 연재의 글들이 항상 뼈로 가득합니다(핫핫). 사실 얼만큼의 ‘익숙치 않음’을 견뎌내고 그 속에 담긴 진짜 매력을 즐길 수 있는지는 계속 바뀌기도 하죠. 예를 들어 90년인가에 ‘터치'(미츠루 아다치)가 해적판으로 처음 나올 때 광고의 홍보카피가 “당신은 이 만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곰곰님/ 치유계 특유의 온화함보다는 뭐랄까, ‘활력계’랄까요.

  4. !@#… 당그니님/ 먼치킨급 글 생산력을 자랑하시는 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뭔가 좀… (핫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