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공간 속에서 -『대한민국 원주민』[기획회의 228호]

!@#… 조만간 작가 분의 북포럼도 한다고 하니, 이왕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가보시길.

 

같은 시공간 속에서 -『대한민국 원주민』

김낙호(만화연구가)

현대 한국사회의 두드러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워낙 이런저런 변화가 빠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원래 사회라는 큰 환경은 빨리 변할 수가 없다. 사회의 틀을 바꾸는 것은 정책상으로 어느 날 갑자기 밀어붙일 수 있다 할지라도,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모든 것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정보사회, 문화산업 강국을 부르짖으며 캠페인을 벌이고 예산을 쏟아 부어 시설을 만들 수는 있고, 그 결과 그쪽 산업이 단시간에 크게 융성할 수는 있다. 하지만 평생 농사짓던 분들이 그 정책만큼이나 빠르게 모든 생활방식을 버리고 웹디자이너가 되는 것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계속 밀어붙인다면 사회는 불안해지고 변화는 오래 못가서 반동을 일으키는 것이 순리다.

그렇기에 그런 식으로 낙오되는 이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많은 신경을 써서 사회의 수용 폭을 넓히며 변화를 진행하게 되는데, 마치 새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출시될 때 이전 버전의 여러 프로그램들이 제대로 돌아가는 ‘하위호환성’이 강조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한국사회의 빠른 변화는 많은 부분에서 이런 하위호환성을 깨끗하게 망각하고 진행되곤 한다. 그냥 떨궈진 이들은 떨궈진 대로, 대열을 챙기며 속도를 조절하는 행군이라기보다 그냥 만인의 전력질주로 간다. 가족의 유대나 사람들 사이의 드넓은 오지랖으로 적당히 봉합되어 있고, “누구라도 하면 된다”는 욕망의 자의식이 마취를 제공하기에 신기하게도 파국적 반동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변화의 속도에 발맞추지 못한, 그리고 이제 다시 그 레이스에 참가할 의향을 잃은 이들은 이미 수두룩하며, 어디 가지 않고 여기 우리들 사이에 그대로 있다. 같이 달리지 않게 된 이들은, 이제 그냥 다른 부류처럼 되어버린다. 새 사회 방식의 이들은 이미 다른 종으로 바뀌어 있다. 원래 있던 이들은 원주민이 된다.

『대한민국 원주민』(최규석 / 창비)은 한 가족의 이야기다. 70년대 후반 출생인 비교적 젊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만큼, 무대는 얼추 8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선진국이 열렸다는 식의 선언이 난무하고, 도시가 번성하고 문화가 번창하기 시작한 시기다. 그런데 그렇게 이것저것 바뀌고 있는 와중에서도, 여러 사람들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렇기에 도시 잔디에서 나물 캐고, 학교 뒤 임시 공터에 텃밭을 꾸리며, 처음부터 풍족하게 살아온 듯한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낯설다. 여전히 누나들은 대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가며, 소위 현대적 시민의식보다는 조선 시대적 고지식함이 지배적이다. 그렇기에 많은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고는 마치 60년대의 어려운 시절 같은 모습을 젊은 작가가 그려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감상평을 남기곤 한다. 하지만 냉엄한 현실은, 그 이후 물질적 풍요 속에 다들 변했겠지 하고 넘어갔던 모습들이 사실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고 수십년이고 계속 진행 중이었다는 것이다. 그저 보이지 않는다고 믿었을 뿐이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모습들인데도 말이다.

『대한민국 원주민』은 이미 제목 자체에서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원주민이라 하면, 새 주민들에게 주류로부터 밀려났기에 원주민인 것이다. 그런데 얄궂게도 바깥에서 온 새 인간들에게 밀려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 세상에 밀려난 것이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의 원주민들은 박물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보호구역에 따로 게토 속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있다. 이들은 많은 경우 아예 안보이다가, 혹 보일 경우에는 보는 사람 마음대로 ‘민중의 힘’에 편입되기도 ‘우매한 대중’에 편입되기도 한다. 물론 그 중에는 특수임무자회 같이 극단화하는 황당한 이들도 있고, 원주민의 정서를 그대로 가지고 단지 투표권을 부여받고 의기양양하여 이상한 정치적 판단을 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그저 평범하게 원래의 삶을 계속 살며 세상만큼 바뀌지 않을 뿐이다.

이 작품의 미덕은 명확하다. 여기 있지만 보이지 않던 그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파내서, 보여주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만화적 서사와 사람 풍경에 대한 리얼한 모습을 같이 담아내는 뛰어난 필력과 연출은 여전하다. 사실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서 연재할 당시에는 정작 지면 자체가 마치 소외된 계층을 돌아보자는 식의 뉘앙스가 워낙 강해서 효과가 미진했다. 아니, 신파적인 느낌이 생겨날 정도였고,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단행본으로 묶이면서 원래의 맥락이 잘 살아나고 또한 토막들이 이어져서 하나의 이야기, 삶의 모습이 되자 작품의 매력은 빛을 발한다. 감정의 과잉으로 포장하기보다, 그냥 이런 삶도 있다, 어디서 슬쩍 본 것 같지 않은가, 하고 던져주는 방식이다. 그저 겪은 대로, 들은 대로 던져주고, 그 속에 담긴 섬세한 모순들을 알아서 생각해보라고 펼쳐 놓는다. 작품 속의 ‘원주민’은 바로 작가의 가족이고, 또한 자신조차도 일부분 그 쪽에 속한다. 하지만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 즉 뿌리를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원주민을 바라보지 못하는 현재의 세상에서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물론 그 대화는 상당부분 평행선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평행선은 가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닭살 퍼포먼스로 난데없이 일거에 기울어져 서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행선일지라도 뚜렷하게 직면하다보면, 언젠가는 같이 할 수 있는 선을 새로 그어나갈 수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속죄도 애정고백도 아니라, 이들을 보지 못했다는 부채감을 버리고 독자들과 같이 생각해보도록 재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존 가족에 대한 무게감이 완전히 담담함 속에서 해소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작가가 전작들에서 효과적으로 발휘하곤 했던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한 유머 감각은 상당 부분 자제된 면이 있다. ‘죽는 짐승’ 연작 같이 작가 자신의 느낌이 뚜렷하게 중심에 있는 에피소드나 ‘변하는 건 없다’의 경우처럼 말하고 싶은 바가 직접적으로 두드러지는 경우가 아닌, 주로 다른 가족 성원들의 일화에서 더욱 그렇다. 덕분에 에피소드 사이에 울림의 정도가 다소 굴곡이 있어서, 개인적인 느낌의 무거운 이야기로 부담을 주는 순간과 평범한 상황 속의 절묘한 모순으로 자극을 주는 순간이 교차한다. 나아가 단행본 편집을 하면서 연재 당시의 순서를 전반적으로 따르기보다, 좀 더 느슨하게나마 시간순이나 주제별로 에피소드들을 분류해서 묶었더라면 작품의 매력이 더 잘 살아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아마도 『대한민국 원주민』을 읽는 독자들은 바뀌는 사회 속에서 새 정착민의 길을 삶을 선택하고 그럭저럭 자리를 잡은 이들일 것이다. 항상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들의 존재를 인지하고난 후 더욱 그들을 타자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나름대로 그들과 새로운 선을 같이 그어볼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난 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척 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 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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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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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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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같은 시공간 속에서 -『대한민국 원주민』[기획회의 228호]

Comments


  1.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새 정착민의 길을 삶을 선택하고” 는 길과 삶 중에 어느 단어를 선택하실지 고민하셨던 흔적인가요. ^^a )
    @비밀댓글이 없네요 @.@

  2. !@#… chrisx님/ 고민만 하다가 결국 깜빡하고 정리를 안했군요. 음 종이잡지에서는 담당자분이 알아서 하나 커트해주셨기를 간절히 기원합…;;; (지적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