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이야기 – 『샌드맨』[기획회의 244호]

!@#… 샌드맨 시리즈 한국어판을 나름대로 오매불망 기다려왔던 터라(최소한 현문에서 2001년 무렵에 출간 검토하고 있었을 때부터), 나오고 난 후 따로 소개하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이야 당연. 다만 좀 더 커버스토리스러운 지면으로 다루어져 마땅한 작품이건만, 어째 미디어의 관심이 의아할 정도로 소극적인 느낌(역시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로 만들어야만 관심 1그램인가, 아니면 출판사의 이슈메이킹 능력이 약한 것인가). 작가 닐 게이먼에 대해서는 이전 월간 판타스틱 글 참조.

 

이야기의 이야기 – 『샌드맨』

김낙호(만화연구가)

도대체 인간이라는 종이 다른 동물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는 철학적 질문에 대해서, 수많은 이들이 나름대로 대답을 내놓곤 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존재에 감정이입을 하는 능력을 꼽아서, 그 발상은 흐르고 흘러 『블레이드런너』에 이르렀다. 다른 이들은 좀 더 편하게 사랑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을 운운하며 휴머니즘을 부르짖고는 한다. 필자의 경우, 인간의 특징이라면 바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것에 있다고 본다. 이야기의 전달에는 언어적 소통이 있고, 체험하지 않은 것을 체험시켜주는 이입과 상상력이 있으며, 이야기와 그것을 만드는 이야기꾼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가 들어가고, 현실이 나아갔으면 하는 방향에 대한 구체적 혹은 헐렁한 희망과 상상이 들어간다. 이야기는 가장 근원적인 인간 특유의 활동이며 사회와 문명을 구축하는 벽돌이다.

그렇기에 인간에 대한 섬세한 탐구는 이야기에 대한 탐구, 혹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야기의 매력이 가장 원형적인 모습으로 극단까지 가는 것이 바로 꿈이다. 꿈은 현실에서 체험하는 각종 이야기 재료들이 무의식의 상태에서 자유도 높게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마음 속의 이야기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꿈이 지니는 이야기로서의 속성을 소재삼아 이야기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성공하는 작품이라면, 최고의 이야기 예술의 반열에 오를 가치가 있다.

『샌드맨』(닐 게이먼 글 / 여러 작가 그림 / 이수현 번역 / 시공사) 연작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샌드맨은 유럽민담에서 어린이들의 눈에 마법의 모래를 뿌려서 잠자리에 들게 하는 요정의 이름이자, 가스마스크를 쓰고 최면가스로 적들을 제압하던 60년대40년대 미국 히어로만화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샌드맨 시리즈의 주인공은 그 이미지들을 일부 흡수하지만 더욱 강력한 존재인데, 바로 꿈의 제왕(‘드림로드’)이다. 때로는 모르페우스라는 이름 혹은 그저 꿈, 아니면 여러 문화권에서 그 역할에 해당하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모습 또한 각자가 보고 싶은 모습으로 보이기에 고양이들의 꿈 속에서는 검은 고양이, 아프리카 부족의 전설 속에서는 흑인, 현대 서양인들의 눈, 혹은 마음의 눈에는 산발머리의 크고 흰 고스풍 복장의 남자로 보인다. 하지만 항상 공통된 점은 짙은 어둠을 담고 그 속에 다시금 별들의 반짝임이 보이는 듯한 눈,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목소리, 그리고 꿈 속에서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 있는 전지전능한 힘이다. 꿈의 제왕은 마법사나 신이나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바로 꿈이라는 추상적 개념의 현신으로, ‘영원한 존재’다. 정확히는 영원한 존재들의 일곱 남매 가운데 하나로, 이들은 운명(Destiny), 죽음(Death), 꿈(Dream), 파괴(Destruction), 욕망(Desire), 절망(Despair), 분열(Delirium) 등이다. 태초에 운명이 있기에 존재가 생겨났고, 존재는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에 이야기가 축적되고 꿈을 꾼다. 그런 세상에는 파괴가 있고, 파괴될 수 있기에 욕망과 절망이라는 쌍둥이가 있다. 그 모든 역정을 받아들일 때 삶에 대한 지혜가 되어 환희(Delight)가 탄생하는데, 그 흐름이 막히고 세상이 어지러워져서 분열(Delirium)을 낳는다. D로 맺어진 이들 일곱은 세상의 이치 그 자체이면서도, 각각의 현신으로서 세상에 개입하곤 한다.

샌드맨 연작의 각 권은 이런 세계관 위에서, 주로 꿈의 제왕과 그의 꿈의 왕국을 매개로 인간세상 및 여러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의 모음인 만큼 주인공도 장르도 종종 바뀐다. 시리즈의 첫권 『서곡과 야상곡』은 20세기초의 인간마법사들이 죽음을 극복하여 영생을 누리고자 주술을 걸었다가 잘못해서 꿈의 제왕이 소환되어 봉인되었다가, 수십년 후에 해방되어 그간 엉망이 된 그의 왕국을 재건하는 이야기다. 이런 큰 줄거리 속에 어떤 에피소드는 시간의 흐름과 인생의 유한함을 관조하는 기담에 가깝고, 다른 에피소드는 정상이 아니게 된 꿈과 공포의 흐름 속에 갇힌 레스토랑 손님들이 미쳐가며 서로 죽이는 공포물이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꿈의 제왕이 지옥의 지배자 루시퍼와 지혜와 힘의 대결을 벌이는 신화적 활극이며, 무엇보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꿈의 누나인 죽음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지혜를 건네주는 고품격 에세이에 가깝다. 이런 다양성의 기조는 이후 권에서도 계속 유지되어, 인간세계의 연쇄살인범 모임과 꿈의 왕국 재건을 둘러싼 기묘한 스릴러 『인형의 집』, 현대와 과거의 여러 꿈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모인 단편집 『꿈의 땅』 등이 있다. 그리고 『샌드맨』 시리즈의 범신화적인 매력이 극대화된 『안개의 계절』이 뒤를 잇는다. 『안개의 계절』은 영원의 7남매들 전원과 그들 사이의 역학이 등장하는 첫 권으로, 지옥의 지배자 루시퍼가 마음대로 은퇴하고 자신에게 굴욕을 준 꿈의 제왕에게 보복하기 위해 지옥의 열쇠를 그에게 넘기는 이야기다. 이집트의 동물머리 신들, 북구신화의 전사 신들, 요정왕국의 오베론, 일본의 창세신, 심지어 카오스와 코스모스 등 온갖 신화와 민담 속의 존재들이 꿈의 왕국에서 지옥의 열쇠를 얻고자 각자의 방식으로 신경전을 벌인다. 이쯤되면 상상력의 스케일과 섬세함 모두에서, 도저히 압도당하지 않기 힘들다.

『샌드맨』 연작은 인류사회의 모든 이야기들을 긍정하기로 마음을 먹고 달려드는 듯한 작품이다. 요정들의 왕국, 기독교적 지옥과 천국, 슈퍼히어로 만화의 세계, 수십년전의 펄프 공포만화 시리즈들, 인간들의 험난한 세상, 북구신화와 아프리카 토테미즘까지 전 세계 전 시대의 이야기들이 꿈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위화감 없이 녹아든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또다른 이야기로 합쳐지는 이 흐름은 황홀할 지경이다. 우수한 – 아니, 현재 닐 게이먼은 판타지 장르 최고의 블루칩 취급을 받고 있으니 단순히 우수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지도 – 영국 작가 특유의 문학적 깊이나 사회감각과 위트가 미국 대중문화, 특히 만화 유산과 합쳐지며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작품은 수많은 철학적 화두를 오락적 즐거움과 뛰어난 위트로 섞어 넣다가 1996년에 꿈의 죽음과 재탄생으로 마무리되었는데(작품 성격상, 그다지 스포일러라고 할 수 없다), 이룩해낸 만화 및 판타지 업계 관련 수상 내역이나 평론가들의 찬사, 혹은 굳건한 만화사적 위치 및 ‘고스’문화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해서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한국어판의 경우 전반적으로 원작을 충실하게 옮겼으나(영어판의 글자조차 그대로 둔 표지에서 볼 수 있듯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만화로서의 완성도를 잘 살리지 못한 부분 즉 글꼴 사용의 미진함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원래 이 작품은 인간 이외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해 문화적 코드가 담긴 여러 글꼴을 구사하는데, 한국어판에서는 일괄적으로 건조한 명조체로 통일되어 있다. 한국독자에게 또다른 장해물이라면 적응하기 힘든 그림체도 있다. 전형적 슈퍼히어로물의 호방한 그림체도 유럽작가들에게 흔히 보이는 예술 지향적 개성도 아니라, 펄프적 거칠음과 작가주의적 파격이 묘하게 섞여 있는 그림이 대부분이라서 술술 읽히기지는 않는다. 게다가 여러 그림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작업한 관계로 그림체가 자주 바뀌어, 때로는 캐릭터들을 알아보기조차 쉽지 않은 때도 있다. 물론 적응하고 나면 그것도 작품의 특정 내용에 상당부분 부합하는 의도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여운을 가지고 각 이야기 단위를 흡수하고 여러 각도에서 겹겹이 쌓인 재미의 층위를 충분히 즐기는 것이 나은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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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The SandMan 샌드맨 4
닐 게이먼 외 지음/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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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thoughts on “이야기의 이야기 – 『샌드맨』[기획회의 244호]

Trackbacks/Pings

  1. Pingback by 매부리의 푸른 둥지

    위대하시고 찌질하신 그 분……

    샌드맨, 꿈의 왕, 모르페우스 공, 오네이로스…등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시는 꿈의 현신이신 그 분. 애칭 꿈님.7명의 영원의 현신-운명, 죽음, 꿈, 파괴, 욕망, 절망, 분열 남매 중에서 세번째…

  2. Pingback by 샌드맨 The Endless 피겨세트 [DC Comics] | capcold님의 블로그님

    […] 닐 게이먼의 역작 샌드맨 시리즈 한국어판도 나오고 있는 김에, 간만에 피겨 포스팅. 샌드맨 10주년 기념으로 1998년에 […]

Comments


  1. 바로 몇일 전 5, 6권도 한국어판이 발매 되었으니 참으로 시기적절한 타이밍. 귀엽게 찌질한 꿈님도 좋고 (그 옛사랑…크크크;) 죽음누님 모에~~>_<
    …역시 헐리우드 영화화가 아니면 관심 1그램도 안주는 걸까요OTL

  2. 도데체 표지를 꽁꽁 싸놓은채, 절대 전시용판본을 안주니…

    서점에서 살 마음이 안나더라구용.

  3. !@#… 시바우치님/ 벌써 죽음 누님 모에에 빠지면, 9권 “철야제” 쯤 가면 정신을 가누지 못할 겁니다(보장).

    nomodem님/ 이런 류의 작품에서 전시판본이 없다니, 황당하군요. 아니 래핑하는 것 자체가 곤란하겠다 싶을 정도인데.

  4. Wesley Dodds는 1939년에 처음 등장했으니까 “60년대 미국 히어로만화 주인공”이라고 하긴 좀 그렇죠. 1960년대 Silver Age 때에는 Earth-2의 Justice Society 멤버로써 JLA의 “Crisis on Earth ***” 특별이슈에나 잠깐씩 나왔겠죠.

  5. !@#… Dreamlord님/ 헉, 그러고보니 글을 쓸 때 어째서 당연히 실버에이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언가의 단서에 잘못 점화가 되어버렸는 듯;;; 바로 수정했습니다.

    advantages님/ 이왕 좀 더 뽀대를 내려면 영어원판으로는 Absolute Sandman 이라고, 큼지막하고 보너스 팍팍들어간 양장판 버전도 있습니다. (…)

  6. 어제 1권을 봤습니다. 사전정보가 전혀 없이 보느라 샌드맨이 뭘 뜻하는지 아무생각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네…서양애들의 민담으로 전해지는 바로 그 샌드맨이더군요.

    그렇다면 책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전에 국내독자들을 위해 큰 주석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어린이들이 졸릴때 눈을 부비는 이유는 샌드맨이 모래를 뿌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나라에서는 모래장수로 표현하기도 하고, 미국아해들은 월남이나 중국식 모자를 쓴 이국상인의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실제 디즈니 애니메이션에도 등장하는 표현)’ 이런정도의 해설은 있었어야….(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캡선생님의 자세한 글을 이제 읽었답니당..)

    투구 찾는 이야기에서부터는 아주 흥미롭더군요. 단테의 신곡을 패러디하는 동시에 마치 8마일의 랩배틀을 보여주는듯한 닐게이먼의 내공과 재치..

    2권이 기대되네요.

  7. 2권 ‘운좋은자들’ 편 감탄 또 감탄…

    샌드맨은 걸작이네요.

  8. !@#… nomodem님/ 앞으로도 감탄하실 만한 대목이 매 권 빼곡하게 쌓여있습니다. :-) 그림체 같은 몇가지 낯설음만 극복하고 나면, 아무데나 대충 파기만 해도 보석이 쏟아지는 보물섬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