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슈퍼히어로 – 『배트맨: 허쉬』[기획회의 230호]

!@#… 지난 호 기획회의는 ‘허쉬’, 이번 호에는 ‘다크나이트리턴즈’. 완전히 다른 작품이지만 같은 캐릭터의 시리즈인데다가 같은 출판사의 것을 도서리뷰로 연달아 다루는 것에 0.5초 정도 머뭇거렸지만, 작품 자체의 가치 이외에는 어떤 배분도 고려하지 않는다는 평소의 철학을 떠올리며 그냥 강행. 그러니까, 배트맨 팬보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씀…;;;

 

배트맨, 슈퍼히어로 – 『배트맨: 허쉬』

김낙호(만화연구가)

최근 영화계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단연 최신 배트맨 영화인 ‘다크나이트’를 떠올릴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여름 오락물이 아니라 진지한 명작으로 말이다. ‘맨’자 돌림 슈퍼히어로를 찾는 것은 어린이들, 혹은 어린이에 준하는 유치한 어른들의 전유물처럼 폄하되었던 오랜 사회적 인식을 생각해볼 때, 이런 추세는 (비록 최근 수년간 여러 슈퍼히어로 흥행작들의 범람 덕에 다소 누그러지기는 했어도) 신선하다. 다만 여전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슈퍼히어로 장르 자체가 그 매력을 인정받았다기보다는, 하필이면 가면 쓰고 망토 두른 아저씨가 주인공인 한 편의 잘 만든 범죄드라마가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슈퍼히어로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스판 입은 청년들이 나와서 괴물 같은 악당들과 주먹질 하는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지만, 또 굳이 그것을 억지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 장르의 재미를 살리면서도 좀 더 “쎈”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얼마나 그 장르를 깊숙하게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다룰 수 있는가 하는 내공의 차이다. 『왓치맨』 같은 걸작이 이미 증명해주듯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많은 배트맨 관련 단행본 만화책 가운데 한국에 처음 정식으로 소개되는 것이 『배트맨: 허쉬』(제프 로브 글, 짐 리, 스콧 윌리엄스 그림 / 세미콜론)라는 것은 장르팬에게 있어서 무척 다행이다. 원래 배트맨 시리즈는 가장 중심에 놓인 정식 스토리라인인 수십년째 지속중인 연재물,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된 여러 스핀-오프 시리즈들 및 작가들이 따로 발표하는 별도의 미니시리즈나 그래픽노블 등으로 이루어진다.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외전 혹은 평행세계로 취급 받는 것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 가장 배트맨 본연의 이야기, 바로 ‘정본’에 해당하는 것은 역시 본 연재물인데, 그것 역시 무한 아침 연속극 방식이라기보다는 비교적 독립적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는 완결성 있는 이야기 단위, 속칭 ‘스토리 아크’를 나누는 경우가 많다. 『배트맨: 허쉬』는 그러한 정본의 스토리 아크로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다. 즉 장르적 재미라는 필수요소, 완결성 있는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여기에 특히 장기 연재 시리즈의 정본으로서의 연속성이라는 목표를 훌륭하게 이루어낸 작품인 것이다.

줄거리는 배트맨이 고담시에서 벌어진 납치사건을 해결하면서 시작한다. 하지만 납치사건을 일으킨 악당 킬러크록은 난폭한 돌연변이 성향이 폭주했을 때는 그런 세밀한 범죄를 계획할 지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진범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배트맨 자신을 제거하려는 듯한 음모가 계속되고, 적이자 조력자이자 연인인 캣우먼, 한 때 조수 ‘로빈’이었으나 현재는 독립해서 슈퍼히어로로 활약중인 나이트윙 등이 도움을 받는다. 반면 배트맨의 숙적 악당 캐릭터들이 차례대로 등장하여 배트맨을 각자의 방식으로 괴롭히고, 추적 과정은 슈퍼맨의 도시 메트로폴리스로 잠시 방문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결말에 기다리는 진범은 의외의 인물로 밝혀지지만, 그 역시 배트맨이 빠져들 수 있었던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였던 거울과도 같은 존재다.

이렇게 요약하고 보면, 캐릭터들을 죄다 동원하기만 하고 무슨 이야기인지 모를 법한 내용, 즉 캐릭터 소개에 함몰되어 내용이 망가진 경우가 아닌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우수한 점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수 십년간 지속된 배트맨 시리즈의 주요 캐릭터들을 하나로 엮어 넣어서, 배트맨 만화의 세계관을 정돈 정리해주고 있다. 그간 일어난 수많은 사건 가운데 배트맨 시리즈를 역사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즐기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대부분 간추려 소개한다. 캐릭터들의 관계, 그들의 과거 사연, 앞서 벌어진 바 있던 주요 사건들을 하나의 줄거리 속에 빈틈없이 소개해주고 있다. 나아가 배트맨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원래의 속성들, 즉 슈퍼히어로 탐정물로서의 장르적 지향이라든지 항상 선과 악의 경계에서 겨우 지탱하고 있는 정체성이라든지, 나아가 슈퍼히어로물의 환타지 요소와 도시 범죄라는 현실성을 섞어 넣는 방식 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어두운 과거에 대한 집착, 원망, 선의 타락, 고집스러움, 범죄의 음모 같은 배트맨 특유의 정서 역시 효과적으로 압축되어 있다. 즉 『배트맨: 허쉬』는 현재의 배트맨 만화 시리즈에 입문하기 위한 총정리, 아니 배트맨을 독자들에게 선보이기 위한 종합 선물세트다.

어차피 하나의 시리즈인데 재정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쉽게 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큰 시리즈 속에서 의미있는 분기점을 만들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계관을 완전히 파괴하는 외전을 만드는 경우로, 독립된 걸작이 탄생할 수 있기도 하지만 본 시리즈라는 큰 세계와 연계가 약하다는 것이 약점이다. 반면에 흩어져 있는 세계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시 보듬어 하나로 재정립한다면, 본 시리즈로서의 의미까지 담아낼 수 있다. 파괴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재정립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렵다. 여러 설정 가운데 그대로 갈 것, 살짝 다듬을 것, 같이 봉합할 때 생기는 모순을 처리하는 것, 게다가 하나의 새로운 시작으로써, 이후 시리즈를 위한 판을 제대로 열어놓는 것 등. 파괴가 격한 솔리스트의 힘이라면, 재정립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섬세함이 필요하다. 대신 그 작업에 성공하면, 지난 수십년 축적된 장르적 매력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명작이 되는 것이다.

다수의 캐릭터를 한번에 다루는 것의 베테랑 제프 로브의 능란한 시나리오, 미국 슈퍼히어로물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화려하게 역동적이고도 선명한 작화의 짐 리라는 콤비가 이런 과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또한 그것을 한국판으로 옮겨내는 번역과 인쇄품질 역시 가볍게 합격선을 크게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에 가서는 지나치게 순서대로 돌아가는 느낌도 있는데다가 최고의 숙적인 조커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서 아쉽지만, 그 정도는 독서경험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래픽노블이라는 단품으로서의 맥락이 아니라, 슈퍼히어로 장기 연재작의 일부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더욱 그렇다 (전자의 매력을 원한다면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배트맨 시리즈의 다른 명작인 『다크나이트리턴즈』를 추천한다). 물론 아시아권 만화의 일반적 스타일보다 페이지당 전개 밀도가 더 높은 연출방식에 거리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독서 속도를 줄이고 눈을 더 열심히 움직이면 의외로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단순히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아니라 배트맨이라는 시리즈의 매력, 나아가 미국 슈퍼히어로 만화라는 장르의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Copyleft 2008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배트맨 허쉬 1
밥 케인 원작, 제프 로브 글, 스콧 윌리암스.짐 리 그림, 박중서 옮김/세미콜론

Trackback URL for this post: https://capcold.net/blog/1491/trackback
3 thoughts on “배트맨, 슈퍼히어로 – 『배트맨: 허쉬』[기획회의 230호]

Trackbacks/Pings

  1. Pingback by Room

    배트맨 -『배트맨: 허쉬』…

    요즘 배트맨에 관심이 많아 졌다. 휴가를 나가서 다크나이트를 보고 와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조커와 투페이스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가 진정인지 대해 정말 궁금했고 또 파해치고 …

Comments


  1. 이 책을 살까말까 많이 고민했는데 덕분에 결정했습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도 함께;
    앞으로도 지속적인 뽐뿌질 부탁드리겠습니다. ^^;

  2. !@#… Jens님/ 앞으로는 굳이 고민하시지 마시고, 우선 사고 보세요. 산 다음에 “아하 내가 잘 산 거구나” 하고 뽐뿌질 당하는 것도 나름대로 행복합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