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이라는 참여과정 -『기동전사 건담 1년전쟁사』[기획회의 247호]

!@#… ‘기획회의’의 만화 리뷰 지면에 만화로 되어있지 않은 책을 소개한 첫 케이스이긴 하지만, ‘만화문화’와 떼어놓고는 도저히 성립이 되지 않는 책이다 보니 뭐…;;; 설정의 즐거움이라고 하니, 최근 히트중인 ‘스타트렉 (더 비기닝)’과도 한번 엮어서 생각해볼 구석이 있을 듯.

 

설정이라는 참여과정 -『기동전사 건담 1년전쟁사』

김낙호(만화연구가)

작품을 즐긴다는 것은 종종, 작품에 얼마만큼 참여하는가에 따라 달려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주인공 캐릭터에 대한 감정이입의 형태로 나타나곤 하지만, 때로는 작품 속에 구성된 세계 그 자체에 대한 몰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현실세계를 그대로 가져오기보다는 작품을 위해 하나의 독창적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환타지와 SF 장르의 작품들에서 그런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세계 설정의 재미는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과 상상력의 자유를 유지하는 것 사이의 무척 미묘한 균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장르의 명칭 자체에서부터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있는 SF의 경우 더욱 그렇다. 작품의 핵심 이야기를 떠받들기 위한 하나의 큰 상상력 풍부한 소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온갖 과학을 끌어들이는 역발상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빛나는 광선으로 만들어진 검을 서로 부딪히며 싸운다는 멋진 비주얼의 상상력이 먼저 있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포스라는 무형의 능력,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제다이라는 특수계층, 그런 모든 것이 가능한 어느 멀고 먼 은하계 같은 것을 끼워 넣는 식이다. 그런데 그런 만들어진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단순히 창작자들의 의도로 끝나지 않는다. 팬들이 그 세계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깊이와 즐거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비록 만화책은 아니지만 만화/애니메이션 중심의 취향을 전제하고 있는 책인 『기동전사 건담 1년전쟁사』(각켄사 편집부 저 / 길찾기 / 전2권)는, 세계 설정이라는 재미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기동전사 건담’이라는 SF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만들어낸 하나의 세계에 대한 설정 해설서다. 하지만 그 형식이나 파고드는 깊이가 여느 실제 전쟁사 집중 탐구 해설집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집요해서, 하나의 새로운 경지에 올랐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흐리는 가짜 다큐멘터리라든지 하는 것은 아니다. 2족보행로보트들이 우주와 지구를 무대로 전쟁을 치루는, 어디까지나 가상의 세계라는 점은 누구도 헷갈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가상의 세계를, 현실의 척도로 끝까지 설정을 부여해서 완성해내고 마는 것일 따름이다.

원래 SF 작품에 관한 설정집의 매력은 가상역사의 탐구이자 팬들이 가장 몰입할 수 있는 과정이다. 뛰어난 세계 구축과 넓은 팬층을 확보한 SF작품은, 정작 작품 자체만으로는 그 세계의 여러 측면들이 전부 선보여 지지 않기에 더 파보고 싶게 만든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말이 안되기 때문에 무언가 스스로 나서서 정당화를 시키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작품 외적으로 세계를 해설하는 설정자료가 인기를 끌고, 설정의 구축 과정에서 종종 팬들이 직접 참여하고 만다. 그렇게 만들어진 설정 가운데 일부는 ‘공식’세계관이 되어 이후 관련 작품들에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설정을 즐기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설정의 비교를 통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세계의 어떤 순간에 A와 B가 맞붙었더라면, 누가 이겼을까? 어떤 역사적 순간에 C지점에서 지냈던 이들은 어떤 식의 전투를 치뤘을까? 어떤 세대에게 그것은 태권브이와 황금날개가 붙으면 누가 이길까라는 질문이었고, 어떤 세대에게 그것은 루움 전역에서 자쿠 모빌슈츠 편대가 습격하던 와중에 지구연방군이 약간만 함대전을 서둘러서 지온군의 에이스 지휘관 샤아가 도착하기 전에 전세를 뒤집었으면 어땠을까의 질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시대에 그런 설정의 재미를 소년소녀잡지 특집이나 ‘다이나믹콩콩 로봇 백과사전’ 류로 경험했다면, 이제는 그런 패턴이 발전하고 발전하여 실제 전쟁사 책과 다를 바 없는 『1년전쟁사』로 귀결된 것이다.

사실 ‘기동전사 건담’의 세계를 설정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엄청난 작업이다. 우선 작품 자체가 70년대 말의 거대로봇 애니메이션이다보니, 세부적인 세계 설정은 원래 무척 헐거운 편이었다. 우주로 나간 이민들과 지구인들이 전쟁을 벌이고, 그 와중에 20미터급의 인간형 거대로봇들이 광선을 내뿜으며 싸운다는 컨셉 자체만 놓고 보자면, 2차대전 전쟁드라마의 틀을 빌려온 마징가 제트 같은 인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내용적으로 특유의 비장함, 고뇌하며 성장하는 주인공들, 종래 해당 장르의 단선적 이야기성을 크게 뛰어넘은 정치적 음모와 전략과 전술, 전쟁 차원의 맞물리며 돌아가는 현실적 전개, 그 속에서 젊은 세대에 대한 새로운 희망 같은 메시지들이 합쳐지며 장르지형을 바꿔놓는 걸작으로 자리매김했다. 덕분에 ‘좀 더 현실적’으로 시작한 건담의 세계를, 팬들이 함께 달려들어 ‘더욱 확실하게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해서 TV시리즈를 바탕으로 극장용 버전이 나올 때는 작품 속 전쟁의 국면에 관한 여러 설정들이 추가되었고, 왜 하필이면 인간형 거대로봇으로 근거리에서 서로 싸우는지에 대한 이유가 붙어줬다. 원거리 통신을 방해하는 미노프스키 입자라는 물질이 개발되고, 우주이민들이 전쟁 초기에 지구에 거대한 비행체(우주민들의 생활공간인 콜로니 비행선)를 떨어트려 전황을 유리하게 끌고 가는 비극이 도입되고, 우주 작업복에서 시작하여 다목적 병기로 진화하는 로봇병기(‘모빌슈츠’) 개발사가 연표와 함께 만들어졌다.

『1년전쟁사』는 25년 넘게 진행되어온 그런 수많은 설정 추가의 (현재 시점의) 완성형이다. 원작은 2007년 일본 각켄사에서 나왔는데, 그 출판사가 원래 실제 전쟁사 총서를 만들던 와중에 그 중 하나로 포함시킨 것이다. 즉 역사 전문 출판 라인에 들어간 셈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로봇의 키가 몇 미터고 출력이 몇 마력이니, 주인공의 취미가 무엇이니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흐름 자체를 놓고 바라본다. 작품의 세계를 이루는 전쟁 줄거리 속에서 각 지역의 정치상황, 전선의 구도 등을 총체적으로 살핀다. 근본적으로는 건담의 세계에 심취한 매니아들을 위한 책이기는 하지만, 집착적일 정도의 완성도로 놓고 보자면 전쟁사에 관심을 가지는 독자들 일반에게도 하나의 완벽한 가상세계의 모습으로 흥미를 끌만 하다. 이번 한국어판은 국내의 건담 팬 커뮤니티의 전폭적 지지 아래 높은 품질로 출간되었다. 출간을 한 출판사는 사장 자신부터 이미 건담 매니아로 널리 알려져 있고, 번역을 맡은 장민성은 ZAKURER라는 필명으로 건담 설정 소개 관련으로 국내에서 톱클래스로 꼽히고 있으며, 출간 직후부터 건담 관련 커뮤니티들을 중심으로 공동구매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물론 독자층 사이에서도 몇 가지 단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어서,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이라든지 직역에 가까운 용어 번역을 고수한 번역 스타일에 대한 불만도 간혹 눈에 띈다. 하지만 전체적인 의견은 역시, 이런 적극적인 향유를 완성시켜주고 있는 이 책의 한국어판 출판을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다. 적극적 향유의지와 구매력을 갖춘 이들에게 합당한 책이 나와서 성공을 거두어 이후 여러 후속사례가 이어져준다면, 확실히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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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기동전사 건담 일년전쟁사 -상
이미지프레임 편집부 엮음/이미지프레임(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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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설정이라는 참여과정 -『기동전사 건담 1년전쟁사』[기획회의 247호]

Comments


  1. 설정자료집까지 나왔다면 오덕을 양산시킨 작품이라 봐야죠. 건담은 후대로 갈 수록 설정이 지저분해지니까 1년전쟁 쯤에서 코어한 설정집을 내놓는 것이 나았겠죠. SF도서관에 있을런가 싶어요. 사볼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먼저 보는게 나을 것 같아서리.

  2. !@#… 지나가던이님/ 1년전쟁 쪽이 아무래도 전쟁 설정을 붙이기 좋은 시리즈니까요 (반면 예를 들어 제타만 해도 개발비화 쪽으로는 넣을 것이 많고 세력구도도 더 복잡하지만, 전면적 전쟁으로서 깔끔하게 밀덕들을 설레게 하기보다는 뭔가 외교와 음모…).

  3.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라인 서점 계정에 찜해놓고 말았습니다. 아, 책 읽는 속도는 느린데 책을 찜하는 속도는 광속이니… 이걸 어쩌면 좋을까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