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의 로봇은 가장 인간적 로봇 -『플루토』[기획회의 237호]

!@#… 작가 특유의 만성적인 후반 페이스 망가짐 증후군이 언제 발현될지 몰라 조마조마했지만, 6권까지 이정도 전개해줬으면 안심… 이라고 판단하고 써버렸음. 물론 다음 권에서 당장 뒤집혀서 가토의 왼팔이 될지도 모르지만.

 

최강의 로봇은 가장 인간적 로봇 -『플루토』

김낙호(만화연구가)

한국에도 ‘우주소년 아톰’(원제: 철완 아톰)이라는 작품을 기억하는 분들은 많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종종 어린 날 재미있게 보았던 추억 속 무언가로 치부할 뿐, 그 작품이 얼마나 한 시대를 대표하고 이후의 만화는 물론 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지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은 적다. 현대만화 문법의 상당 부분을 일거에 만들어내고 대중적 인기 또한 출중하여 일본에서 ‘만화의 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데즈카 오사무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이 작품에는,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를 통해서 인간성의 본질을 묻는 SF적 실존의 질문과 활극의 직선적인 재미가 동시에 묻어나온다. 그런데 단순한 추억상품이 아니라 세대를 초월한 파급력이 있는 고전은 종종, 그 영향을 받고 스스로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한 후대에서 새롭게 재해석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재해석이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림만 새로 입힌다거나 배경과 소품만 현대로 바꾸는 정도로는 부족하다(애석하게도 많은 경우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원작의 핵심 가치를 보존하고 큰 맥락을 유지하여 원작의 원형을 쉽게 연상시켜주는 동시에, 가장 현재적인 맥락에서 주제의식들을 구체화시켜서 리메이크 작업에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리메이크를 하고 있는 작가 자신의 개성과 장기를 잔뜩 버무리는 것 역시 기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리메이크를 하는 의미가 없다.

『플루토』(우라사와 나오키 / 학산문화사 / 6권 발매중)는 리메이크의 왕도와도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톰 만화 시리즈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인 ‘지상최강의 로봇’ 편을 원작으로 삼아, 작가의 장기인 미스테리 스릴러 극화풍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SF모험활극과 미스테리 스릴러라는 장르도 그림체도 완전히 다르지만, 전체 줄거리의 기본틀은 동일하다. 로봇들이 인간과 함께 생활하지만 인간들의 생활양식 자체는 현재와 크게 바뀌지 않은 근미래, 수수께끼의 뿔 달린 로봇 ‘플루토’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로봇 일곱 명을 하나씩 습격한다. 스위스의 산지기 몽블랑, 스코틀랜드의 집사 노스 2호, 일본의 아톰, 터키의 레슬링 로봇, 독일의 형사로봇 게지히트, 그리스의 레슬러 헤라클래스, 오스트렐리아의 보모 엡실론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인간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는 최강의 로봇들이 플루토에게 파괴당하는 과정 속에 플루토를 만들어낸 박사의 엇나간 집념이 바탕에 깔리고, 강함의 의미에 대한 교훈이 있다. 아톰의 여동생 로봇 우란과 플루토가 나누는 교감은 또다른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이야기이자 인간성에 대한 질문이다. 다만 로봇들이 날아다니면서 격투를 벌이는 활극의 달콤함에 묻어가다 보니 이런 주제들이 던져주는 울림이 상대적으로 덜 드러났을 뿐이다. 하지만 만약 활극 요소를 줄이고 로봇살인이라는 테마와 그것을 둘러싼 미스테리, 광기의 집념, 인간적인 삶에 대한 질문, 즉 그 쌉쌀한 맛을 즐기는 장르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톰의 활극이 아닌 새 장르에 맞추기 위해, 이야기는 로봇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형사로봇 게지히트를 주인공으로 시작한다. 이들의 미래는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이 있고, 점점 정교화되어 최신 기종 로봇들과 인간의 구분은 현재의 인종 구분에 가깝다. 아직 넘지 못한 차이는 상상력이나 감정이입 능력 정도인데, 그것조차 아톰에 이르러서는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다. 인간 우월론자들은 비밀결사를 만들어 로봇을 린치하고, 일자리를 둘러싼 긴장도 존재한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발생시킨 중동의 전쟁이 있고, 그 와중에 동원되었던 세계최강의 로봇들은 대량 로봇 살상에 따른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있다.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과정은 그 숨겨둔 기억과 다시 마주치는 과정이며, 인간의 광기와 로봇의 죄책감이 섞여들어간다.

하지만 우라사와 나오키라는 작가의 핵심은 미스테리나 서스펜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몬스터』나 『20세기 소년』, 『마스터 키튼』 등에서 그런 재미를 위한 장치들을 넘어서 속내를 보면 항상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자 작가의 정성이 담긴 것은 등장인물들의 인간적인 일상성이다. 목표로 찍은 이가 커피에 타는 설탕의 양이 자신과 같다는 이유로 살인을 멈춘 암살자, 세계를 구하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편의점 점원으로서 저녁노을을 그리는 영웅이 바로 그의 매력이다. 그렇듯 『플루토』 역시 가장 효과적인 부분은 대결구도나 플루토의 정체를 캐는 과정이라기보다, 집사 로봇 ‘노스 2호’가 한 평생 함께한 주인에게 마지막 대접을 하고 평온하게 최후의 대결을 하러 날아가는 장면이다. 격투는 오히려 먼 거리에서 짧게 암시적으로 처리할 뿐이다. 남은 것은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사연과 여운이다. 원작의 주인공 아톰 역시 초월적인 히어로로서의 소년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소년이다. 물론 하늘을 날기도 하고 다소간의 괴력도 발휘할 능력은 있지만, 인간과 지나치게 가깝기 때문에 겪어왔을 혼란과 현재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더 핵심에 놓인다. 독일의 형사로봇이 일본의 히어로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중년 형사가 달팽이를 관찰하는 호기심 많은 소년에게 말을 거는 식으로 처리한 아톰의 첫 등장이 바로 그런 정서를 압축한다.

원래 우라사와 나오키의 장편 스릴러 연재작은, 언제쯤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지 판단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일본 잡지연재 시스템의 특성 속에 자리 잡은 작가의 성향상, 이전의 여러 작품들이 초반의 팽팽한 긴장감을 후반에 무리한 줄거리 연장 때문에 잃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키워놓은 서스펜스 설정 때문에, 원래 구상으로 돌아와서 마무리를 지을 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용두사미의 느낌이 만들어지기는 폐단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플루토의 경우, 원작에 대한 충실도가 높아서인지 이례적으로 그런 늘어짐이 적다. 단적으로 최근 한국에서 발간된 6권에서, 자칫 중년 형사 주인공의 이야기로 무한정 다시 늘어질 수 있었을 이야기를 원작의 궤도로 돌려보내며 대부분의 미스테리를 해소했고 클라이막스의 대결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조차 거대한 활극보다는 사람과 로봇들이 각자의 소중한 일상성을 수호한다는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기에, 만약 페이스를 유지하며 2-3권 이내로 연재가 완결된다면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평가를 들어 마땅할 것이다.

굳이 아톰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SF를 빌어 인간적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작품으로서 볼 때 『플루토』의 매력은 극대화된다. 이 작품에서 지상 최강의 로봇들은, 가장 자신의 사소한 삶을 아끼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하루를 즐거워하고 소중한 이를 돌아보는, 무척 인간다운 것이 바로 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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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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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 Pluto 1
테츠카 오사무 지음, 우라사와 나오키 그림/서울문화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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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thoughts on “최강의 로봇은 가장 인간적 로봇 -『플루토』[기획회의 237호]

Trackbacks/Pings

  1. Pingback by 일본과 한국, 그리고 광장시장(?)

    Pluto (플루토)…

    Pluto (플루토) 먼 옛날…이라고 해봤자 40년..아니 50년쯤 되려나?(검색하기 귀찮아서 안함… 수정하면서 찾아보니 50년전) 데즈카 오사무라는 아저씨가 전후(戰後) 일본에서 패배주의가 팽배할…

Comments


  1. 저 역시 몬스터 최고의 장면은 그 커피 설탕 다섯 스푼 장면이고, 마스터키튼 최고의 장면은 딸의 아름다운 사진을 실어준 신문과 독점 인터뷰를 하겠다던 어머니이고, 플루토 현재까지 최고의 에피소드는 노스2호였다고 생각합니다. ^^ 제가 우라사와 나오키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런 소소한 감동을 신파적이지 않게 탁월하게 표현하는 연출력이고요.
    플루토 만큼은 질질 끌지 않고 끝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 +_+

    위 글과는 전혀 관계없는 다른 댓글을..
    1) 제목에서 순간, 3단 합체 김창남이 생각난건 왜일까요.;_;
    2) 가토의 왼팔 글을 올린 깜악귀는 모밴드 깜악귀와 동일인물인가요.?;

  3. !@#… Cranberry님/ 후반 엿가락 신공을 시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이토록 큰 우라사와 인기연재작은 처음일지도 모르죠. 역시 소학관 편집부보다 데즈카 오사무 가문의 파워가 더 강한 것인가!

    여울바람님/ 1) 그러고보니 그 작품, 연재 한 화 남았는데 아직 합체를 안하고 있습니다(…) 2) 예, ‘두고보자’ 집단이 굴러가던 당시 핵심멤버였고, 눈뜨고코베인 프론트맨. 요새는 “장기하에게 산울림을 가르쳐준 선배”로 더 유명해진 듯 하지만(핫핫).

  4. 플루토 6권이 나왔나 보군요 ㅎㅎ 2권까지 보고나서 썼던 오래전의 글을 트랙백해봅니다. 아톰….참 좋아라 봤었는데 나중에 일본산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5. 몬스터 이후 우라사와제 스릴러는 꽤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가토의 왼팔이라는 용어가 있을줄은 몰랐네요. ^^;; 스토리나 캐릭터가 완전 배가 산으로 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 버린 만화가 꼭두각시 서커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6. !@#… JNine님/ 사실 저는, 아톰이 일본산이라도 사실은 별 상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이 더 큽니다(핫핫). 오랜만에 Akismet 필터님이 집어삼키지 않고 무사히 등록된 트랙백, 감사.

    지나가던이님/ 음… 두고보자 활동 하면서 축적한 여러 개념들을 좀 더 현 시대에 걸맞게 재유통할 필요가 있겠다, 싶군요. 하기야 몇개월만 지나가도 망각의 영역인데, 수년전 것들을 누가 다시 찾아보겠나 싶지만.

  7. 흠. 네 비평을 읽고 보니 알겠네,
    인터넷으로 우라사와 나오키 비평들을 찾아보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몬스터나 20세기 보면서, 후반부로 갈수록 어째 결말이 흐지부지 되는거 같다고 느낀게 나만 그런게 아니었군.

    일본거장계의 이현세?

  8. !@#… 유도르/ 인기연재작으로 판명된 작품을 엿가락 늘리기해서라도 오래 지속시키고자 하는 건 (특히 일본의 만화잡지) 편집부로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지. 그런데 하필이면 하나의 흐름으로 주욱 가야할 스릴러가 그런 패턴에 빠지면 좀 심각해지는데 작가(들)가 굳이 그런 방침에 저항하지 않고 있고. 다만 그래도 결말만은 깔끔하게 원래 의도했을 법한 방식으로 마무리지어주니 그나마 다행.

  9. 잘 읽었습니다.^^ 몬스터 등 우라사와나오키의 ‘용두사미’에 대해서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옆자리 친구의 우려를 capcold님도 같이 가지고 계셨군요^^. 그래서 그런지 플루토는 2권까지 읽다 말았는데 한번 작정하고 봐야곘네요.

  10. !@#… 당그니님/ 몬스터의 경우 전 18권 가운데, 별장 화재사건 이후부터 개구리세마리 마을의 결전 이전까지의 후반 6권 정도 분량을 그대로 적출해버리면 완성도가 2.39448593배 정도 올라가죠. 20세기 소년은 인기가 더 많았기 때문에, 적출할 후반 분량이 더 늘어나고…(핫핫) 플루토는 휴재가 잦아서 현실시간 대비 진도는 느린 편이지만, 오히려 작품의 밀도는 아직 떨어지지 않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제 ****도 죽었으니 더 끌 것도 없고.

  11. 플루토는 엄청 기대하면서 재밌게 읽다가 요즘 뜸하던건데…
    역시나 우라사와씨의 전적들처럼 늘어지기와 용두사미가 보일 기색인가보네요….

    참….아이템은 잘 잡는 작가 같은데……좋게 좋게 가지…좀….ㅜㅜ

    늘어짐과 용두사미가 없는 스토리가 어디 있겠느냐만 전 이오누에씨의 슬램덩크가 거기서 가장 자유로운 스토리 같더군요…..^^

  12. !@#… LieBe님/ 용두사미가 보일락말락 위태로웠는데, 결국 6권만에 ****를 죽여버림으로써 함정에서 탈출했습니다. 슬램덩크의 경우도 사실 편집부에 의한 엿가락질의 전형적인 희생양이었는데(경기 하나 당 소요되는 연재분량이 연재 초기와 말기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작가의 연출능력으로 막아낸거죠. 다만 그게 가능한 건 역시 스포츠라 해도 대결 성장물이라서 그런 것이고, 우라사와식 스릴러는 좀… 어렵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