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lbert Future [기획회의 050120]

!@#… 지난호는 신년특집으로, 그냥 자유롭게 자기가 작년 한해 읽은 책들 중 가장 좋았던 것 하나 골라서 추천하는 것이었음. 원래 한국에 출시도 안된걸로 작품평쓰는 짓거리는 되도록이면 안하는 주의지만… 이번에는 그냥 큰맘먹고 관철. 이 평을 보고 삘받은 사람이 있으면, 아마존에서 주문하시길(사실, 예전에 나왔던 ‘딜버트의 법칙’은 유머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 번역의 수준이 심히 민망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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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에도 멍청함은 계속된다

1년동안 읽은 모든 책을 통틀어서 가장 감동 깊게 읽은 것 한 권만을 뽑는다는 것은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굳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리고 장르에 상관 없이 선택해도 된다면, (Scott Adams / Harper Perennial)을 꼽고 싶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미래학(?) 책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극도로 시니컬한 샐러리맨 만화 <딜버트> 시리즈의 작가인 스콧 애덤스가 제시하는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65가지 트렌드’가 담겨 있다. 1998년에 첫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한국에 번역되어 들어오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이 시리즈의 전작 <딜버트의 법칙>(스콧 애덤스 저/ 이은선 역/ 홍익출판사)이 세계적 명성에 비해서 국내에서는 별로 빛을 못 봤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하기야 책으로서의 모양새도 원전의 독서 흐름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고, 번역 역시 성실하기는 했으나 장난과 유머, 그리고 샐러리맨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원문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는데에는 역부족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는 전작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소개조차 제대로 안되어 있다. 책을 펼치자마자 첫 챕터에서 이미 완전히 압도당해버린 필자로서는,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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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스식 예측불능의 법칙>

좋은 트렌드가 발생하면,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가 그것을 꼭 망쳐놓고 만다. 몇가지 사례:

좋은 트렌드                                                   예상치 못한 악재
컴퓨터 덕분에 일 처리가 100% 더 빨라졌다        컴퓨터 때문에 일이 300% 늘었다
여성에게 더욱 많은 정치권력이 주어졌다             여성들도 남자만큼이나 멍청하다
대중음악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                          내가 너무 늙었나보다
————————— 의 부제는 “21세기에도 계속 사업상의 멍청함을 추구하며”다. 부제에서 느껴지는 재기발랄한 감수성처럼, 저자는 인간의 핵심 원칙을 3가지로 정의한다: 1.멍청함 2.이기성 3.발정. 가벼운 농담 같으면서도,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나 절묘하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우리 세상의 본성을 논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근미래에 일어날 경향들을 툭툭 내뱉으며 뼈있는 농담을 던진다. 그리고 글로 열심히 이야기하다가 어떤 상황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해야할 부분에 도달하면 <딜버트> 만화 가운데 한 편을 적절하게 뽑아서 삽입한다. 만화와 일반 문자도서의 장점을 각각 고루 수용한, 대단히 자연스러운 독서가 가능한 서적인 셈이다. 

이 책은 분명히 사회과학 서적은 아니다. 아니, 아예 작가가 대놓고 통계는 어차피 사기치려고 가져다 붙이는 것에 불과하니까 피차 귀찮은 짓 하지 말자고 넉살 좋게 넘어가 버린다. 하지만 통찰의 깊이는 농담의 깊이 만큼이나 끝이 보이지 않는다. 98년, 즉 인터넷과 초고속 통신의 대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쓰여진 책이면서도 “누구나 뉴스 기자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필요없는 뉴스를 적극적으로 무시해야 할 것이다” 같은 전형적인 인터넷 시대의 모습들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다. 물론 ADSL의 보급화 이전이라서 ISDN을 최신기술로 소개하고 있다든지 하는 기술 특유의 빠른 시대변화상에 따른 격세지감은 어쩔 수 없지만, 가장 단순한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론 위에서 펼쳐내는 현란한 디스토피아의 향연은 박장대소를 금할 길이 없다.

사실, 이 책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작 <딜버트의 법칙>만큼 일관성 있는 흐름과 핵심적인 결론으로 수렴되는 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의 각종 토픽들이 챕터로 잘게 나누어져 있다. ‘애완동물’, ‘사교생활’, ‘건강’ 뭐 이런 식으로 구분하여, 각각에 대해서 이런 트렌드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구난방이라는 것이다. 물론 앞에 소개한 인간본성의 3대 법칙이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기는 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 각각의 것들이 잘 기억이 안 난다거나, 뭔가 끝까지 독파했다는 느낌이 부족한 감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을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이름 짓고, 뉴에이지 운동을 연상시키는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손을 들어준 것은 전체 책 구성이나 시니컬한 감성에 있어서 상당한 마이너스 요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대충 넘어가도 대세에 지장은 없다. 마지막 챕터라 할지라도, 그냥 챕터 통째로 안 읽어도 되는 구조니까 말이다. 여전히 전체적인 책의 인상은, 이 작가는 천재라는 것이다. “미래에는 아무리 쓸모없고 멍청한 상품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사들일, 귀가 무지 얇은 고객을 찾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쉬울 것이다” 같은 자신만만한 예측을 만날 때 더욱 더. 그것을 매니아 마케팅이라고 부르든, 명품족이라고 부르든, 천민 졸부라고 부르든, 이미 우리에게는 현실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더욱더 이런 경향이 강해질 듯 하지 않던가.

어떤 훌륭한 출판사가 한 훌륭한 번역가를 고용해서 내준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사실 차기작인 (딜버트: 얍삽이의 길)가 한국 독자들에게는 더 쉽게 와 닿을 것이다. 왜냐햐면 <딜버트의 법칙> 때 처럼 다시 회사라는 조직사회의 이야기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간단한 비관적 규칙 몇가지를 바탕으로 온 세상의 미래를 종횡무진 예측한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이 사고 싶다. 실전 영어를 배우고 싶으신 분들은 기껏 외서부까지 가서 무슨 이상한 3류 추리소설류를 고를 것이 아니라, 이런 생활 감각과 유머, 통찰력이 가득 담긴 이 책 한권을 주문하실 것을 적극 권장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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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2004년 추천도서 5권

– 안전지대 고라즈데 (조 사코 / 글논 그림밭)
– 널 좋아한적 없어 (체스터 브라운 / 열린책들)
– 남쪽손님/빗장열기 (오영진 / 길찾기)
– 일지매 1-5 완(고우영 / 애니북스)
– 불의 검 1-12 완 (김혜린 / 대원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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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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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네이버덧글 백업]
    – 정석환 – 개인적으로 직장만화의 최고봉으로 꼽는 작품이 [딜버트]죠. 그 낭만이라고는 없는 시니컬함이 어떤 전망을 결여한 미국의 기능주의적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있습니다만.(그리고 뒤늦게나마 블로그 링크해갑니다) 2005/01/28 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