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우리나라 – <조선왕조실록>[기획회의 050605]

!@#… 이번 월간 인물과 사상에 쓴 <만화 박정희> 글(발간 후 올릴 예정)과 다소간 이어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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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우리나라 – <조선왕조실록>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의 정권을 잡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크게 신기할 것도 없는 노릇이다. 권력의 가장 물질적인 형태는 바로 무력이고, 그 무력을 손에 쥐고 있는 자가 서서히 나머지 권력 형태들을 갈구하여 어느날 갑자기 실력행사에 나선다는 시나리오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항상 있어왔던 이야기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말이 하나 있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하리라”. 이 말은 어디까지나 무력의 폭풍 앞에 억압당한 불쌍한 우리네 중생들을 위한 위로의 한마디일 뿐이다. 칼로 일어선 자가 칼로 망하리라는 보장 따위는 어디에도 없으며, 행여나 망한다 할지라도 이미 충분한 권세를 누린 다음에 망하는 경우가 사실은 더 많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칼로 일어난 자를 사후에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별로 정당화할 구석이 없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구국의 결단’이니, ‘그래도 덕분에 경제는 살아서 밥은 굶지 않게 되었다’, ‘각하는 청렴하신 분이었다’는 등의 사실검증과는 상관없는 어거지 신화들을 마구 동원한다. 물론 권력을 잡은 자가 스스로 그런 프로파간다를 실시하는 경우도 많지만, 사실 더 중요한 점은 그들의 아래에서 권력의 대상이 되었던 백성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어느 틈엔가 그것을 인정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권력에 복종을 하며 살아왔던 자신들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니까(심리학에서 ‘인지부조화이론’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그것이 약간 오버를 하면, 하나의 종교와도 같은 신념이 된다. 아주 단순한, 권력의 생리다.

박정희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다. 약간 더 – 한 500년 정도는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한 군인이 있었다. 그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기존의 나라를 뒤엎고 새 왕이 되었다. 그리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뿌리도 뭣도 없이 왕 노릇을 하면 분위기가 좀 거시기해지기 때문에,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관리 노릇을 한 그의 고조를 시작으로 해서 ‘조선왕조’를 상정했다. 그리고 그의 자손대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왕조의 역사를 주욱 묶어내서 만든 기록이 바로 그 유명한 ‘조선왕조실록’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5권 발매중, 휴머니스트)은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만화로 된 현대적인 화답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갖가지 일화들과 큰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현대의 독자들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적절한 현대적 비유와 그것을 만화적 연출로 버무리는 솜씨를 발휘한다. 진지한 내용과 독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대화 건네기, 그것을 딱딱하지 않게 감싸는 유머감각. 그리고 그 속에 명확하게 묻어나오는 작가 자신의 역사와 사회에 에 대한 시각.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주었던 장점들을 이 작품 역시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해외문물에 대한 소개라는 화제성과 보수/수구적인 가치관과는 달리, 자세히 알든 말든 우선 사람들이 지겨워하고 보는 한국사 이야기라는 약점과 진보적인 가치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 속에서 벌어진 일들 이상으로 무척 흥미롭다. 작가는 그 역사가 권력의 암투를 통해서 진행되는 정치사라는 뚜렷한 줄거리를 읽어낸다. 그 정치과정 속에서는 구악을 멸하지 못하여 뒤통수를 맞는 이야기, 힘의 흐름에 따라서 철새짓을 반복하는 군상들, 무력과 모략의 미묘한 결합, 다툼의 속에서 가장 먼저 증발해버리는 신뢰와 사상, 민생 따위의 가치들 등, 무척 친숙한 테마들이 잔뜩 버무려져 있다. 역사가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역사는 바로 권력의 거울이다. 한국사를 다뤄온 다른 어떤 만화보다도 권력의 생리를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현재의 모습과 닮아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조선’이라는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곳이 된다. 먼나라, 우리나라인 셈이다.

특정 인물이나 정파에 대한 일방적인 편들기도, 양비론적 패배주의에도 빠지지 않는 절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은 작가의 오랜 신문시사만화 경력 덕분인 듯 하다. 혹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원작 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부함 역시 작용했을 것이다. 권력의 작용 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사회상과 민중의 동향 등 총체적인 해석을 통해서 조선 역사를 단순한 탐욕스러운 개개인들이 벌이는 궁중드라마로 격하시키지 않은 점이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배경이 합쳐졌을 때 나올 수 있는 미덕이다. 그림체 및 시각연출 방식 역시 지나치게 설명조도, 지나치게 설명이 없어서 불친절할 정도도 아닌 균형을 맞추고 있다. 선은 명확하며 단순하고, 극적인 과장이나 섬세한 세부묘사에 빠지는 일 없이 가장 필요한 만큼의 정확한 장면묘사를 일삼고 있다. 물론 등장인물이 워낙 많다보니 캐릭터들이 간혹 서로 헷갈린다거나 하는 문제도 있지만, 이만하면 ‘양반’이다.

이 시리즈는 워낙 장편으로 기획되어 있고, 이제 한 고비를 넘겼을 뿐이다. 비록 간혹 스케쥴이 삐걱거리고 있지만, 용케 마지막 권까지 무사히 나와 줬으면 하고 바란다. 벌써 이 정도 수준의 1부라면, 마무리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박수를 받아 마땅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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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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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네이버덧글 백업]
    -전진석 – 저 그 책 엄청 좋아해요. ^^ 5권까지 다 샀음. 2005/06/10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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