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경계선의 세계에서 성장하기 – 『농농할멈과 나』[기획회의 276호]

!@#… 이런 류의 이야기를 은근히 좋아함. 아마 개그 다음으로.

 

흐린 경계선의 세계에서 성장하기 – 『농농할멈과 나』

김낙호(만화연구가)

빨주노초파남보라는 7가지 색깔의 언어와 달리, 실제 무지개는 어디서부터 빨강이 끝나고 주황이 시작되는지 뚜렷하게 이야기하기 힘들다. 비교적 명백하게 빨강 혹은 주황으로 부를만한 어떤 지점들이 존재하지만, 그 사이에 놓인 대부분은 어느 쪽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경계선이 흐리며 받아들이기에 달려있다. 사실 우리가 흔히 대척되는 개념으로 놓고 보는 많은 것들이 비슷한 패턴을 따르는데, 밤과 낮, 이성과 감성, 빈곤과 부유함 등 끝이 없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역시 어린이와 어른, 즉 성장이다. 언제까지 어린 마음이며, 언제부터 “큰” 것인가. 현대사회에서는 대충 편의적으로 만 18세가 되면 갑자기 성인의 권리를 마구 던져주고 방치하지만, 예전의 많은 사회에서는 성인식이라는 자격시험을 치러야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사냥을 해온다든지 절벽을 건넌다든지 하는 특정 능력을 중심으로 이뤄지곤 했는데, 그보다는 철이 든다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 그대로 마음의 성장을 이야기할 방법은 없을까. 사실, 그런 방법은 없다. 하지만 언제쯤 뚜렷한 어린이의 영역을 벗어나서 좀 더 흐린 경계선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가늠하는 것은 가능하다. 종종 그 당시에는 모르고, 지난 후 돌이켜볼 때 비로소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2007 앙굴렘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고 최근 한국어판이 출간된 『농농할멈과 나』(미즈키 시게루 / AK북스)는 77년 일본 요괴만화의 대가 미즈키 시게루가 그려낸 자전적 성장담이다. 하지만 자전적이라고 해서 다큐멘터리 방식인 것은 아니고, 경험에 의한 기억, 어릴 적 지녔던 세상에 대한 매혹 등에 기반한 요괴 등 초자연적 존재들에 대한 상상력이 풍부하게 가미되어 있다. 시게루, 혹은 게게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주인공은 30년대 일본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자라나는 꼬마다. 그런데 그 시간 그 공간은 모든 것이 흐릿한 경계선 속에 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번영의 가도와 군국주의의 망령으로 빠지는 시기의 사이에 있고, 도쿄 같은 모던한 도시와 봉건적 구습 양쪽모두로부터 거리가 있는 개화기 농촌마을이다. 그 곳에 사는 게게와 동네 아이들의 일상은 패거리를 나누어 다투는 것인데, 놀이와 싸움의 중간에 있으며 골목대장이 되고 싶어하는 소년들의 마음을 자극한다. 그런데 작가가 회상하는 그곳에는 하나의 경계영역이 더 있는데, 바로 현실세계와 요괴들이 숨 쉬는 기담의 세계의 사이다. 그림자 속에는 요괴가 숨어 있으며, 변고가 생기면 그 바탕에는 요괴와 귀신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마을에서 요괴를 가장 잘 아는 혼자 사는 노파가 있으니, 바로 농농할멈이다. 소년 게게가 마을에서 지내며 겪게 되는 여러 일들에 대해 조언이 필요할 때 농농할멈은 요괴와 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는 힘을 준다.

아직 전기로 인한 빛이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어둠이 많았던 시절, 죽음이라는 것이 병원으로 격리되지 않고 사회의 공간적 일상에 놓여있던 시절, 요괴와 초자연적 영령들은 생활의 일부였다. 단순히 미신에 빠져있다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당시 그들에게 주어진 물질적, 문화적 맥락이었던 것이다.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같은 어쩔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기에 친구의 죽음을 요괴들과 만나서 진기한 경험을 하며 해소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도 실제로는 상상이었겠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서 그리고 작품 속에서 그려내는 풍경 속에서는 요괴와 공존하는 세계가 바로 현실이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소년은 성장한다. 죽음도 이별도 슬픔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세상을 이해해나가는 것이다. 한꺼번에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경험하는대로 하나씩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을 인도해주는 이가 바로 요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농농할멈이다.

요괴의 세계의 다른 한편에는 현실의 모습들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사고뭉치이기에는 소심하고 공부는 역시 잘 못하는 그저 그런 학생인 게게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대기업사원의 스펙보다 마을에서 영화관을 하여 문화적 향취를 퍼트리고 싶어 한다. “흥취를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문화란다. 돈 같은 건 굶어죽지 않을 정도만 있으면 돼”라고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뜻을 게게가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지만 떳떳한 선택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는 있다. 지하철이 다니는 도쿄와 시골의 격차, 점점 다가오는 군국주의적 사회상의 분위기 같은 무거운 환경도 가감 없이 표현된다. 그런 세상 속에서 때로는 친구의 죽음,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팔려가는 친구, 단편소설 ‘소나기’를 연상시키는 도시소녀와의 풋풋한 인연 등이 펼쳐지며 모든 것이 성장의 과정이 되어준다. 비극도 희극도 현실도 요괴기담도 담담하게 섞여들어가며 흘러간다.

『농농할멈과 나』는 이야기의 힘에 관한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 속 농농할멈은 이야기를 통해서 게게에게 세상의 의미를 스스로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그 농농할멈의 이야기를 작가가 함으로써 지금의 독자들에게 그런 느낌을 만들어준다. 농농할멈의 이야기 속에서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희미하듯,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진짜 요괴들이 그런 식으로 존재했는지 혹은 아예 농농할멈에 대한 기억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작가적 상상인지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모든 것이 흐릿한 경계선으로 섞여 들어가는 그 이야기들 속에서 감동이 만들어진다. 기록과 다큐의 정서가 아닌, 이야기꾼이 만들어내는 구전의 정서다. 구분된 개념과 뚜렷한 이해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느슨한 흐름과 과정으로 스스로 느끼고 깨닫는 방식의 옛스러운 풍미의 접근이다. 공포와 해학이 미묘하게 맞닿아있는 전통 민화풍 그림으로 요괴들에 대한 경이와 애착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가 특유의 필체가 있기에 더욱 훌륭하다.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뚜렷하고 화려한 기승전결이나 강렬한 캐릭터성 같은 장르오락물을 바라는 이들에게 적합한 만화는 아니다. 할머니가 해주는 도깨비 나오는 옛날이야기를 듣는데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 꼭 자신 같더라, 하는 재미를 아직 향유할 줄 아는 이들을 위한 만화다. 농농할멈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사는 세상을 둘러보는 주인공처럼, 작품을 읽고 자신의 세상을 다시 볼 줄 아는 어른들을 위한 만화다. 어느덧 이미 세상을 받아들이고 어른으로 성장했는데, 자신이 지나왔던 어떤 흐릿한 경계선의 과정을 다시 돌아보기에 제격이다.

농농할멈과 나
Mizuki Shigeru 지음/에이케이(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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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흐린 경계선의 세계에서 성장하기 – 『농농할멈과 나』[기획회의 2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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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ingback by Nakho Kim

    [캡콜닷넷업뎃] 흐린 경계선의 세계에서 성장하기 – 『농농할멈과 나』(기획회의) http://capcold.net/blog/6204 | 이것은 좋은 책이다. 표지는 엉성해도.

  2. Pingback by HWANGJOO KIM

    엉성한 표지 부분 공감ㅎㅎ 재미있는 책이예요RT @capcold: 흐린 경계선의 세계에서 성장하기 – 『농농할멈과 나』[기획회의 276호] http://bit.ly/aihowq

  3. Pingback by Byung-Jun Park

    농농할멈과 나- http://is.gd/edCJG ㅇㅇ 이거 재미있을꺼 같아요.

  4. Pingback by aeravera

    (책팔러왔어요) 최근책보다가 감동으로눈물찔끔한책이 두권있습니다. 농농할멈과 나 http://tinyurl.com/28gpzwy @capcold 님 소개글로알게되어 어제오늘 푹빠져 읽었습니다. http://twipl.net/AIQi 최고의 장면입니다.

Comments


  1. 이거 좋은 책이죠…..한데 왜 표지가 그렇게 나왔는지는 며느리도 모르지만!
    아버지 캐릭터가 왠지 실감(공감??)가서 좋더군요. 그 밖에 요괴나 옛날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배경/환경을 별다른 문화인류학적 현학적 폼잡기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묘사해서 좋았음.
    그나저나 정말 좋은 타이밍에 오신 것이 마침 이번 달에 카이지 실사판도 개봉!…하지만 솔직히 기대는 안 갑니다…;; ‘일본영화는 하드하게 만들려고 하면 망한다’는 편견이 강화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