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하지 않던 꿈을 위한 최선 –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기획회의 326호]

!@#…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열혈 근성물…이 전혀 아니다.

 

절실하지 않던 꿈을 위한 최선 –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김낙호(만화연구가)

중년에 자아를 찾기 위해 기존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나서는 아저씨나 아줌마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은 적지 않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들은 그런 자아 찾기의 와중에서 그간 잃어버리고 살아왔던 꿈, 좀 더 소박하고 단순한 일상들을 찬미하며 물질적으로만 성공을 이뤘던 이전의 인간적으로 미숙한 삶보다 한층 더 성장한, 더욱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로 자라나는 과정을 그려내곤 한다. 그 와중에서 여러 소중한 인연을 만나는 것은 물론이다.

아무래도 그 쪽이 탈출을 꿈꾸는 여러 독자들에게 통쾌함을 가져다줄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과연 좀 더 현실에 가까운 모습이라면 어떨까. 자아를 찾고자 기존 직장을 때려치우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고난이다. 우선 물질적 부분이 있다. 상당한 부를 물려받거나 축적하지 않고서야, 아무래도 당장 생계가 걱정이다. 그 부분을 조금이나마 해결하는 방법이란 친척이든 친구든 신세를 지는 것인데, 바로 그 순간 구박과 눈치가 시작된다. 그런데 좀 더 근본적인 부분도 있다. 자아를 찾고자,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쪽으로 딱히 실력이든 재능이든 있다는 보장이 전혀 없는 것이다. 신체적 전성기가 걸려있는 스포츠 쪽의 꿈이라면 두 말할 나위도 없고, 세부 기술과 함께 감성적 재능이 필요한 예술계도 만만치 않다. 특정 분야에 대한 공부, 장사, 서비스봉사 무엇 하나 재능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다른 일을 생업으로 추구할 때는 밥벌이를 하느라 꿈을 추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변명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자아 찾기에 나서겠다며 그간 길을 접는 순간, 바빠진다. 우선 꿈을 되찾거나 아니며 없던 꿈이라도 이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스스로 표방하는 허세만큼 잘 풀리지 않을때 써먹을 새로운 변명이 필요하다.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아오노 슌주 저 / 세미콜론 / 송치민 역)은 그간 ‘루저’ 소재의 뼈 있는 만화에 애정을 보여준 출판사다운 선정이 빛나는 작품이다(당연하게도, 번역의 말투부터 식자와 제본까지 성의가 넘친다). 이 작품은 자아찾기를 어쨌든 더 끌고 나가기 위해 필요한 가장 핵심적인 변명을 아예 제목으로 달고 있다. 작품의 내용은 나이 마흔에 그럭저럭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만화가가 되겠다는 아저씨 오구라 시즈오의 고군분투다. 고등학생 딸이 있고 나이든 아버지가 있는데도 결행한 결심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화에 대한 숨겨진 한과 대단한 의지력으로 불타오른다기보다는, 자신을 찾는다며 직장을 때려치운 상태에서 하필 만화가가 되면 대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얻은 것이다. 만화라는 목표를 세웠으나 만화 미학에 대한 학구열이나 완벽한 선을 향한 열의보다는, 최고의 만화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버티며 축구 전자오락을 한다. 그런 애매한 상황에서도 계속 꿈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 바로 “나는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는 확신이다.

뚜렷한 꿈을 위해 새로 매진하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변명의 과정에서 추구하는 길이다보니, 결과적으로는 백수 생활일 뿐이다. 아르바이트하는 레스토랑에서는 나이 때문에 별명이 점장인데, 실제는 말단에 불과하며 이리저리 무시당하며 지낸다. 딱히 비뚤어지지 않은 딸은 알고보니 유학자금을 모으기 위해 안마방 아르바이트를 나가고 있었다. 여유자금은 물론 없기 때문에, 술값은 친구에게 돌리고 용돈은 때로는 딸에게 빌린다. 그런 현실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가 아니기에, 종종 성찰적 자학에 빠진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슬쩍 스스로 북돋아주며 자신은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라는 자존심의 허세가 절묘한 균형추를 이뤄준다. 자학과 자만을 오가면서 그럭저럭 꿈을 향한 시즈오의 길은 한발짝씩 열려 나간다. 비록 아무리 봐도 여전히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어딘가 무기력한 면이 있지만 말이다.

시즈오의 허세와 자만처럼, 작품 전반의 분위기 역시 비정한 리얼리즘과 허망한 개그를 자유롭게 오간다. 아니 그냥 동시에 구현한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시즈오가 작업한 원고를 잡지 편집자가 퇴짜놓는 대목들이 이런 면을 잘 보여주는데, 편집자는 시즈오의 만화를 통렬하게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재능을 잔뜩 추켜세워 주는데, 정작 매번 마지막에 하는 말은 “데뷔 때까지 힘내봅시다”라는 것이다. 즉 데뷔시켜주지 못하겠다는 말이고, 시즈오 역시 그것이 거절의 의미라는 점을 알고 있다. “선생님은 매번 가져오는 원고의 장르가 다르군요. 뭐든지 잘 다루세요”라는 말은 사실은 자기 중점 장르가 없이 어설픈 상태임이 훤히 드러나는데, 시즈오는 그게 데뷔하기에 부족하다는 뜻임을 알면서도 그럭저럭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는 쪽으로 받아들여준다. 이런 대목들이 희화화된 과장 없이 그저 건조하게 상황으로 던져지기에 더욱 현실성과 유머감각이 동시에 빛난다.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의 헛헛한 아저씨 소재와 백수 정서가 건조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전달되도록 만드는 일등공신은, 살짝 구부정한 그림체다. 일본의 부조리개그 인디만화들을 연상시키는 간략한 선 속에, 주인공을 묘사하는 모든 몸짓은 꼿꼿함과 거리가 멀다. 주인공스러운 멋의 몸짓도, 그렇다고 위악적으로 피곤해하는 아저씨의 몸짓도 아니라, 그냥 뭔가 살짝 움츠려들었으면서도 허세로 다소 어깨를 피기도 하는 그런 애매한 몸짓들이다. 거울 앞에서 옛 교복을 입고 불량아 흉내를 내는 대목이 그런 매력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부분 중 하나다. 간략하게 그렸으면서도, 아저씨를 아저씨스럽게 그려내는 훌륭한 솜씨다. 아저씨다운 아저씨의 “자아찾기”를 설득력있게 묘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다행히도 시즈오의 주변 인물들은 그를 확실하게 도와주거나 방해한다기보다는, 조금씩 구박하고 또 응원한다. 때늦은 자아찾기만으로도 모자라 만화가가 되겠다며 눌러앉은 아들을 구박하는 나이든 아버지지만, 그를 받아들여 함께 살고 있다. 일을 때려치웠기에 자신의 유학이라는 꿈을 위해 필요한 돈을 돕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는 무표정한 고등학생 딸이지만,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엄청나게 살갑게 그를 북돋아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묵묵히 용돈도 빌려주고, 결정적인 순간에 한 마디는 해주곤 한다. 다소 불량한 인상이 있던 레스토랑 아르바이트 동료는 반항아 기질은 있지만 그럭저럭 이쪽 가족과 친해져서, 시즈오의 모습을 동경하지도 불쌍해하지도 않으며 지켜봐준다. 너무 강압적이지도, 너무 사랑으로 넘치지도 않는 이런 정도가 백수 생활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한 나름대로 최적의 조건이 아닐까 한다. 결국 최선을 다 해 보려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자발성이기 때문이다.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자기 위안을 위한 변명이라 할지라도, 사실이라면 결국 최선을 다할 만한 계기를 찾는 것도 자기발견의 가장 중요한 일부니까 말이다.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1
아오노 슌주 글 그림, 송치민 옮김/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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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나는 99%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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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최선을 다하지않았을 뿐“만화가가 되겠어!”라며 나이 마흔에 회사를 그만두고꿈을 좇아 나선 시즈오와 그 뒤치다꺼리가 달갑지 않은가족을 둘러싼, 쓴웃음 나는 애수 드라마!★ 슬픈데, 웃느라 배가 아프다★ 백수의 고충을 겪은 사람이라면 절대 공감!★ 느슨하고 단순한 그림이지만, 이것은 능숙한 자의 ‘취권’이다. — 일본 아마존 독자 서평잉여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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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1 – 아오노 슌주 글 그림, 송치민 옮김/세미콜론 국내에 첫 선을 보이는 작가 아오노 슌주의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俺はまだ本気出していないだけ). 예, 부족한 제가 번역을 맡았습니다. 그러니까 저 별 다섯 개는 감안해 주세요.  사회의 낙오자들 – 루저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을 종종 출간하고 있는 세미콜론에서 이번엔 핸섬한 것과는 100만 광년은 떨어진 40대 아저씨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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